•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0> 뜻밖의 상황


    “표현의 자유가 낳은 극악한 폐해로군!”
    “!”
    “이건 처음부터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현실인식을 포기한 거야. 거기다 편협한 시각으로 정치 쟁점만을 끄집어내 기사로 작성했고.”
    재국은 우연히 클릭한 진보계열 잡지의 커버스토리 기사를 보고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오던 유진이 재국의 그런 과민반응에 멈칫했다.
    “유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밑도 끝도 없이 뭘 말이에요?”
    “유신체제와 산업화 말이야?”
    “유신체제와 산업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기사가 실렸나 보군요.”
    “보는 관점에 따라 과(過)만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공(功)도 크잖아. 거기다 경제적인 기적뿐만 아니라 전후 혼란했던 사회이념을 하나로 통합해주는 구심점 역할도 했고.”
    “그러니까 재국 선배는 유신체제가 비록 악마적인 요소가 있을지라도 당시엔 반드시 필요했다, 뭐 이 말이로군요.”
    “그렇지!”
    “하지만 재국 선배와 다르게 보는 시각도 우리 사회엔 엄연히 존재해요.”
    “알아. 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합리적인 민주주의를 통해 과연 경제기적이 가능했을까? 즉 이상이란 칼로 현실을 너무 잔인하게 재단한다는 소리야.”
    “어째서요?”
    “일제의 침탈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 있었다고. 안 그래?”
    “그렇긴 하죠. 전 국토가 지옥불에 그을린 것처럼 초토화되었으니까 말이에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시 국민들은 좌절과 패배주의에 빠져 삶을 간신히 지탱했을걸. 그것을 단기간 내에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역사는 강한 리더십을 가진 인간 박정희를 선택한 거지.”
    “하지만 장기집권 자체를 미화하는 것에 전 동의할 수 없어요.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거기다 탐욕스런 통치자를 만나면 그 나라는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을 역주행할 수도 있어요.”
    “물론 나도 독재체제는 무조건 반대야. 하지만 여타의 다른 나라 독재정권과 박 대통령의 독재체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건 왜죠?”
    “이유는 간단해. 다른 나라의 독재정권과 달리 통치기간 동안 권력층 내부가 부패하거나 현실 감각을 잃어 스스로 붕괴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거든. 또한 국민들 의식 속에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불꽃을 살려낸 것은 경제기적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 적어도 그건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당장 북한의 현실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잖아.”
    “한마디로 진보지식인들의 시각이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소리네요.”
    “그래.”
    “하긴 화폐개혁이란 극약 처방까지 쓰고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 북한의 강성대국 진입과 북한 주민의 처참한 인권유린 실태에 대해선 죄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잖아요.”
    “맞아! 아무튼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야. 쳇!”
    “멀리서 찾을 거 뭐 있어요. 거기도 한 사람 있는데.”
    “나?”
    “그럼요. 아닌가요? 훗!”
    “이거 왜 이래, 난 아냐. 실수로 낚시글에 제대로 걸린 것뿐이라고.”
    “어찌됐건 그런 쓰레기를 읽는 사람이 있으니까 문제예요. 그러니까 진보라는 이름을 팔아 궤변을 늘어놓고 혹세무민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재국 선배?”
    “헐~.”
    “하긴 어쩌면 그게 바로 그네들의 경영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 히~.”
    “이제는 완전히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군. 서유진, 그동안 많이 컸네.”

    매일 당하기만 하다가 재국에게 보란 듯이 한방을 먹인 유진의 웃음소리가 유쾌하고 통쾌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요원들이 두서없이 뛰어왔다. 그리고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갔다. 재국과 유진은 얼른 출입문 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순간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복도는 다시 텅 비었다. 이제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의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국 선배, 무슨 일일까요?”
    “글쎄, 낸들 알 수가 있나.”
    “쾅!”
    “90년대 초부터 충청권에서 대전을 근거지로 암약하던 고정간첩의 꼬리가 마침내 잡혔어. 북한의 지령으로 군사정보수집과 노동자들의 사보타주(태업)뿐만 아니라 최근엔 충청권 주요 인사의 납치와 살인까지 기획했다더군. 그래서 지금 3팀이 국내파트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지원을 받아 검거작전에 돌입한 거야.”
    “팀장님, 그럼 혹시 오늘 아침의 긴급회의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요?”
    “맞아. 자세한 자료는 이 파일에 있으니까 궁금하면 한번 읽어봐.”
    “전 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군요.”
    “그런데 팀장님, 고정간첩은 누구로 밝혀졌습니까?”
    “남운영이라고, 현재 충청 지역의 환경전문 케이블방송국인 엔티비(ENTV)의 대표이사야.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를 나와 한때는 우익계열 A중앙일간지의 문화부와 경제부 기자생활까지 했어.”
    “유진아, 왠지 고정간첩한테서 박헌영과 여운형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니?”
    “박헌영과 여운형의 그림자요?”
    “응, 박헌영은 북한 정권수립 초기 부총리까지 지냈지만 1955년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처형됐지. 그리고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조직했으나 중도좌파 한지근에게 1947년 암살됐고.”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무슨 공통점이 있다는 거죠?”
    “유진 씨, 박헌영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을 지냈거든.”
    “그런데 팀장님, 혹시 박철진이?”
    “짐작대로야. 그의 진술이 고정간첩 남운영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남운영도 역시 장학생형 고정간첩이야. 80년대 주사파로 1990년 프랑스 유학 당시 북한의 사회문화부(현 노동당 225국) 공작원에게 포섭됐어.”
    “그 뒤 35호실 공작원의 도움으로 92년과 95년, 그리고 2001년 밀입북했고요. 첫 번째 방북 때는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이끄는 혁명가가 되겠다.’는 방명록을 작성했고, 두 번째 방북 때는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네요.”
    “그런데 35호실 공작원으로 밝혀진 신일광이 바로 박철진의 예전 상사야.”
    “아! 아쉽다. 박철진과 관련된 수사를 3팀에 넘겨주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한 건 멋있게 할 수 있었는데, 젠장!”
    “어쨌든 간첩 남운영이 검거됨으로써 그들의 활동 범위가 여론주도층으로 옮겨가 뿌리를 내렸다는 걸 증명해준 셈이네요.”
    “흠,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럼 이젠 정말로 피아(彼我)의 구별이 불가능한 상태에 접어든 건가요?”
    “그건 이미 한참 됐잖아. 우리는 지금 폴리테이너(Politainer·정치연예인)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고. 아마 지금 이 순간도 폴리테이너들이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인터넷 파워를 이용해 여론을 호도(糊塗)하고 있을걸.”
    “그런데 고정간첩 남운영은 다음 번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여당의원 및 지역유지들과 광범위하게 친분관계를 쌓고 있었다더군. 뿐만 아니라 최근엔 홍보효과가 큰 민간케이블방송의 장점을 적극 활용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계획까지도 세웠고.”
    “팀장님, 그뿐만이 아니에요. 심지어 남조선 민족해방전선투쟁위원회라고 적화노선에 동조하는 대규모 반국가단체까지 결성하려고 준비 중이었네요. 그것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윤리의 사회환원이라는 그럴 듯한 미명(美名) 아래 말이죠.”
    “헐~, 상황이 그 정도였다니. 남운영의 실체를 잘 모르는 지역에선 도덕적인 기업인으로 상당한 존경까지도 받았겠는데요?”
    “물론이지. 게다가 자신이 진행하는 시사토론프로그램엔 게스트로 친북·종북 좌파인사를 반복적으로 출연시켰어.”
    “그 의도는 당연히 지역민에게 친북·종북 좌파인사들의 인지도를 높여주기 위함이고요.”
    “정답이야. 하여간 남운영의 검거 때문인지 엄 처장님의 기분이 좋아 보이더군.”
  • 정원의 얼굴에서는 세상의 끝자락에 있다는 죽음의 모래폭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원도 사막의 역사처럼 서서히 모래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원이 빠져든 모래사막은 깊이가 없었다. 그리고 탈출구도 없었다. 그야말로 한번 들어가면 영혼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이었다. 정원이 수렁에 빠져 막 고대문명처럼 사라지려는 순간 누군가 유진을 찾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이시은 형사입니다.”
    [이 형사님, 전 국세청 역외탈세 추적전담센터의 분석팀장 국건입니다.]
    “아, 분석팀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고, 지난주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모 잡지사 기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사람이 해외자금의 국내투자를 이용한 자금세탁방법에 대해 문의했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등에서 유입된 거액의 불법투자자금의 증가추이와 변동내역에 대한 자료협조 요청이었습니다. 또한 금융실명제 이후 해외에서 투자된 자금과 관련된 사항도 질의했습니다.]
    “질문내용이 구체적으로 뭐였나요?”
    [투자자금 중 그 흐름이 의심되는 검은 돈을 제가 직접 추적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가 말한 돈의 성격과 규모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형사님이 조사의뢰한 돈과 유사점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분석팀장님, 그 기자의 연락처를 혹시 받아두셨나요?”
    [딱히 받아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전화기의 메모리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메모해두었습니다. <시사춘추>라는 잡지사의 경제부기자입니다.]
    “흠, <시사춘추>라.”
    “그 잡지는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보수계열 주간지야.”
    “기자이름이 어떻게 되죠?”
    [문상원 기자랍니다.]
    “혹시 그 문 기자가 부탁한 자금추적을 해주기로 약속하셨나요?”
    [아닙니다. 불가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긴급명령에는 금융정보의 제공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비밀보장원칙이 철저히 지켜져야 보다 선진화된 금융시스템을 가진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죠.]
    “훗! 맞습니다. 분석팀장님, 제가 좀 더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그럼 전 이만.]

    뜻하지 않은 카메오의 출연이었다. 정원은 구심력의 반작용으로 의식이 원운동에서 튕겨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황급히 눈을 떴다. 이제 정원의 눈은 고정간첩 남운영으로 인한 먹구름이 사라지고 아주 맑았다. 마치 태풍의 눈 같았다. 적어도 박철진과 관련된 사항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국정원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와 관련된 비밀자금의 행방을 추적하는 기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팀장님, 그 문 기자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의 실수라기보다는 문 기자의 냄새 맡는 능력이 뛰어난 거겠지. 하여간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들을 종합해보면 백 퍼센트 파악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어.”
    “그건 왜죠?”
    “만약 파악했다면 구체적으로 ‘비밀자금’이나 ‘통치자금’이란 용어를 사용했겠지.”
    “맞아요, 팀장님. 문 기자가 분석팀장에게 접근한 목적은 제보된 내용을 보다 구체화화 하기 위한 불법투자자금의 실체 파악일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계속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면 결국 박철진과 관련된 것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어. 사람은 막아도 시간을 막을 수는 없거든.”
    “팀장님, 상황이 돌변한 이상 비밀자금 관련 수사를 이제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낼 때가 된 것 아닌가요?”
    “아니, 그건 너무 도박성이 강해. 잘못하면 우리 스스로 진실을 전설로 만들 수도 있어.”
    “그럼요?”
    “일단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자고. 그래야 만에 하나 우리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 문 기자에게 비밀자금의 실체를 숨길 수가 있지.”
    “글쎄요. 냄새를 맡은 이상 그게 가능할지. 기자들은 가능한 상황을 유추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잖아요.”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잖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유진 씨!”
    “예, 팀장님!”
    “우선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문상원 기자의 신원부터 빨리 털어봐. 문 기자가 작성한 과거 기사내용은 물론이고, 일상생활과 최근 행적까지도 빠짐없이 조사해. 아참! 혹시 사이비 기자일지도 모르니까 보험 하나 들어두는 셈치고 최악의 경우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아킬레스건도 찾아보고.”
    “팀장님. 그럼 저는 낌새를 맡은 또 다른 기자가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당연하지! 그리고 박철진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다른 기자들이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요소요소에 연막도 함께 피워나.”
    “연막요?”
    “응, 북한의 비밀자금은 고사하고 애초 그런 사람조차 우리나라에 망명한 바가 없다고.”
    “한마디로 오리발을 내밀라는 말씀이군요?”
    “아니, 이건 국민의 알권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국정원의 적극적인 방어개념이야. 알겠지?”
    “옛설!”
    “자자, 각자 오늘 스케줄을 다시 짜고 빨리 움직이자고. 기사화되면 상황종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