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9> 의혹의 눈초리


    “귀는 마음으로 통하는 길이다”라는 명언이 있다. 지원과 헤어진 현우의 아쉬움을 라디오는 알아주었다. 그 무렵, 지원은 집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지원은 오늘 오후의 느낌을 음악CD를 재생하듯 다시금 한 트랙씩 되살려 감상하고 또 음미했다. 그러다 느낌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면 데이터를 읽는 헤드처럼 눈빛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감정의 트랙을 서너 칸씩 옮겨가며 그 느낌을 찾으려 애썼다. 그런데 건너편 가로등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명암 대비를 강하게 하려는 것인지 사진의 원판처럼 흑백의 네거티브였다.

    “거기. 누, 구, 세, 요?”
    “조장 동무. 뭐, 죄 지은 거라도 있소. 한숨까지 쉬게.”
    “죄 지은 거라! 내가 그렇게 보였소?”
    “보기에 따라선…….”
    “먹이냄새를 맡고 배수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생쥐에게 내 대답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것이오.”
    “흠, 그건 그렇다고 치고. 수시로 생활총화에 빠지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상부의 지시까지 거부하겠다는 것이오?”
    “거부! 거부라. 동무는 벌써 잊었소? 대상공작 제11규칙. 포섭대상자의 감정이 안정적인 변화를 보이면 절대 그 감정을 흩뜨리지 마라.”
    “흠,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조장 동무의 그 무모함이 도를 넘어 이젠 오만처럼 들리는데. 맞소?”
    “!”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오.”
    “역시 내 욕심이 지나쳤나 보군. 걱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무가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길 기대했소. 그런데 역시나 가슴에 불질을 해대는 도발적인 협박뿐이로군요.”
    “실수가 반복되면 무능한 것이오. 그리고 무능한 조장은 적후종심(敵後縱深)에서 살아남아 당과 조국이 부여한 조선반도의 통일과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하는 우리 조원들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니까.”
    “동무,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은 실수가 아니었소. 사전에 치밀하게 의도한 공작의 일부였소. 그러니까 탐탁지 않아도 동무가 그대로 접수하시오.”
    “공작은 가장 먼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 입각해 수행돼야 하오. 또한 조원들의 안전도 사전에 확보돼야 하오. 설마 조장 동무가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라서 그것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오?”
    “동무! 동지적 신뢰를 깨는 교조주의(敎條主義·사실을 무시하고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태도)적인 발언을 삼가시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오. 그럼 조장 동무의 꿈을 벌써 잊은 것이오?”
    “꿈!”
    “그렇소! 남조선 인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하겠다는 목표 말이오.”
    “동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그런데 요즘 들어 나는 왜 자꾸 의심스러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소. 조장 동무가 당과 조국을 모욕하고 있다고 말이오.”
    “뭐, 뭐요!”
    “하긴 또 모르지. 같이 부화질을 즐기고 있는지도. 만일 조장 동무의 프롤레타리아 작전교범 속에 부르주아적인 반당의 기미가 스며들었다면 인민의 영원한 행복인 통일된 조선반도의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강성대국이란 칼날로 맹아단계에서부터 주저 없이 잘라버려야 할 것이오. 또한 퇴폐적이고 나약한 자본주의 감상도 청산가리보다 몇천 배 독하니까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할 것이오.”
    “동무가 이젠 내 혁명적 열의와 사상성까지 의심하는 것이오?”
    “쥐새끼는 생리적으로 독극물을 피할 수 있는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 쥐새끼가 언제부턴가 조장 동무에게서 맡은 냄새가 그렇다는 것뿐이오. 마치 야수본능을 잃어버려 무리에서 쫓겨나기 직전이라고나 할까.”
  • 순간 피오기는 끊임없이 갈지 않으면 일 년에 30㎝씩 자라는 면도날 같은 네 개의 송곳니를 모두 꺼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곧바로 조원들에 대한 지원의 지도력이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지원은 어금니를 볼이 튀어나오도록 옹골지게 깨물었다. 그리곤 피오기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그동안 숨겨둔 발톱을 꺼내놓고 적대감을 강하게 쏟아냈다.

    “동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소. 그건 나태해진 것이 아니라 바로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적응력을 한층 높인 것이오. 또한 그런 근거 없는 의심은 적후에서 조원들 스스로 동지적 신뢰를 무너뜨려 자멸의 길로 걸어갈 수도 있소.”
    “그게 사실이라면 희생은 나 하나로 끝날 것이오. 하지만 인민의 미래를 손톱만큼이라도 훼손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천배, 백배 보복’으로 반드시 무자비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마치 내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소? 아무튼 내가 일전에 분명히 동무에게 엄중한 주의를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오?”
    “!”
    “거듭되는 동무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야말로 혁명과업에 저해요인이 될 수 있음을 동무도 명심하시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이번 생활총화 때 냉철한 사상검토와 함께 자아비판(自我批判)을 하시오. 그리고 동무의 혁명사상과 의지를 다시 한 번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시오. 용서는 그 다음에 하겠소.”
    “그 다음에 용서를 하겠다! 조장 동무, 진짜로 내게 조장 동무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오?”
    “!”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오. 국방위원회가 왜 나에게 조장 동무를 감시하라고 지령을 내렸는지. 난 당과 조국으로부터 철저히 검증받은 최고 핵심 공산당원이오. 하지만 누구는 그 처한 환경이 사뭇 다르지.”
    “지금 그 누구가 혹시 나를 지칭하는 거요?”
    “조장 동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도 조장 동무의 과거 이력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소. 아니,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인지도 모르겠소.”
    “…….”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있소.”
    “!”
    “함남 요덕의 15호 관리소. 그것도 최악질 반당·반혁명분자들만 모아 종신토록 수용하는 완전통제구역. 그 생지옥에서 동무가 어떻게 혁명화구역으로 옮겨졌는지. 더구나 도주가족까지 두었소. 그런 최악의 적대계층이 어떻게 공작원에까지 선발됐는지.”
    “그건……, 당시 혁명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고자 하는 내 충성심이 담당교도관과 보위부요원들을 감동시켰고 다시 그것을 우리 사회주의공화국이 인정했기 때문에…….”
    “조장 동무, 지금 그게 진실이라고 나한테 말하는 거요? 아니면 자위하듯 동무 스스로 그렇게 암시를 걸어온 거요?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오?”
    “없소.”
    “내가 듣기로는 아바지 윤일현 동무의 옛 직장동료이자 현재 국가안전보위부 해외반탐국장으로 있는 어광선 동지가 조장 동무를 강력히 추천한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수감 당시 관리소 내에 아주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고 하던데…….”
    “이상한 소문!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물론 나도 조장 동무가 그 정도로 타락한 여성 동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둘 사이에 부화사건이…….”
    “됐소. 그만! 그건 모두 ‘뜬말(뜬소문)’이오.”
    “뜬말이라, 쩝!”
    “당시 어광선 동지의 직위는 과장으로 순환근무로 관리소에 배치된 하급 보위지도원이었소. 더구나 동무의 말처럼 해외반탐국장이라면 여태까지 국가안전보위부 내에서 그 동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건 어떻게 설명하겠소?”
    “하급 보위지도원이라, 크크크. 하지만 조장 동무가 어광선 동지를 모르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 나머지 소문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게 됐소.”
    “좋소! 동무의 비밀임무가 뭐든 또한 평양에다 나에 관해 어떤 보고문을 작성하든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소. 하지만 지도자 동지의 숭고한 뜻과 의지를 받들어 나는 의연히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인 혁명의 길을 걸어갈 것이오. 그러니 더 이상 쓸데없는 의심으로 나에게서 혁명과업에 쏟아부을 시간까지 빼앗지 마시오. 이건 내가 동무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요.”
    “흠, 마지막 호의라. 왠지 섬뜩하오. 그렇지만 나는 조장 동무에게 호의가 아닌 충고를 한마디 하겠소. 과업을 완수하고 조국으로 돌아가면 사후 물을 수도 있는 후과에 대한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하시오.”
    “그동안 동무가 정찰총국에서 어떻게 전설이 됐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오늘 그 답을 찾은 것 같소.”
    “실망스럽진 않았소?”
    “전혀, 기대 이상이오. 적후에서 여성 조장을 협박할 정도로 작전국의 전투교범이 비열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그리고 내겐 실망이란 없소. 애초 희망이란 씨앗을 뿌린 적이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군. 아참! 문 기자가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얼마 전 반역자 한 명이 또다시 당과 조국을 배신하고 남조선으로 도주했소. 그러니 우리도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을 마친 피오기는 증오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람처럼 지원을 스쳐지나갔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어린 시절 술기운에 젖은 아바지가 자주 부르던 <그리운 강남>이란 동요였다. 지원은 눈앞의 현실을 보며 아바지가 다시 살아 돌아올 것처럼 동요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사이 달빛은 가로등보다 더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달빛 한쪽에서 언제부턴가 아바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미소가 먹물처럼 떨어져 빠르게 번져갔다. 어둠 속에서 지원을 위로하는 건 오직 그 맑은 미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