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6> 두 얼굴


    현우는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는 지수가 쌍둥이 자매의 언니인 지원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다.
    아니, 현우는 지원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현우 역시 여느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환상만 봤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YBAs(Young British Artists) 특별전을 관람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온통 불바다인 도심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달렸다.

    “현우 씨, 오늘 YBAs 특별전 어땠어요. 시각적인 면에서 직접적인 언어를 너무 많이 사용해 충격적이지 않았어요?”
    “세기말적이면서도 사회 전반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 이후 영국을 대표했던 작가들이라서 그런지 삶과 죽음, 모순의 공존, 독창성에 대한 부정 등 혼성적인 이미지와 억압된 문화에 대한 비판들을 잘 드러낸 전시회였던 것 같은데요.”
    “그럼 현우 씨는 어떤 예술가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전위적이고도 충격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가 담고 있는 철학과 의미로 ‘사물보다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개념미술을 잘 설명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예요.”
    “어머! 저도 데미안 허스트인데. 그럼 그의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이 가장 좋았어요?”
    “글쎄요, 다 좋았어요. 지수 씨, 그럼 우리 동시에 말해 볼까요?”
    “예, 좋아요.”
    “하나, 둘, 셋!”
    “<자장가의 봄(Lullaby Spring)>.”
    “전 <살아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thing Living)>이었어요.”
    “어쩌죠, 서로 달라서.”
    “그래도 작가는 같았잖아요. 안 그래요, 현우 씨?”
    “맞아요.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죠. 아무튼 데미안 허스트가 수공으로 제작한 형형색색의 알약 6,136개로 구성된 <자장가의 봄>은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을 거짓 없이 진솔하게 표현한 것 같았어요.”
    “전 포름알데히드로 가득 채워진 수족관 안에서 모터를 달고 매달린 채 죽어 있는 상어를 보면서 죽음의 고통스런 과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공포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저 역시도 작품들을 관람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상상의 이미지 조각들이 끊임없이 분열하고 또 재생되더라고요. 덕분에 제 오감이 살아 있음을 느낀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죠? 히~유! 다행이다.”
    “왜요, 제가 지루했을까 봐 그렇게 걱정됐어요?”
    “히, 예.”
    순간 지원의 얼굴에서 흔든 탄산음료병의 내용물처럼 파스텔톤의 미소와 햇살 같은 눈웃음이 빠져나왔다. 지원의 웃음선은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윗니의 끝부분을 연결한 치아선과 아랫입술의 윗부분이 이루는 입술선이 크게 휘어져 한결 밝고 역동적이며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투명한 미소에는 억지웃음에선 나올 수 없는 종교적인 감사까지도 하나의 색채로 덧칠해져 있었다. 현우가 지원의 웃음에 감사하는 동안 차가 오피스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한 시간쯤 흐른 뒤, 저녁식사를 마친 지원이 비슷한 크기의 화분을 이용해 깔끔함을 강조한 베란다를 서성였다. 그러다 한쪽에서 처음 현우에게 선물했던 로즈메리 화분을 발견했다. 로즈메리는 잎겨드랑이에 엷은 자줏빛 꽃을 달고 있었다. 로즈메리는 그 특유의 달콤한 향기로 주변을 온통 진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지원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솜털이 빽빽이 나 있는 잎의 뒷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곧이어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둘만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됐다. 메마른 땅에 물을 주듯 지원이 건네는 차분한 언어들은 꽃잎에 내리쬐는 햇살처럼 반짝반짝 튀어 올랐다. 둘 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생명을 뛰어넘는 원초적인 교감이 존재했다. 그때 현우가 등 뒤로 무언가를 숨긴 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다.
    “어머, 현우 씨. 벌써 왔어요?”
    “예, 자주색 로즈메리꽃이 참 예쁘죠?”
    “그러게요.”
    “그건 아마도 그 꽃을 선물한 사람의 마음이 예뻐서 그럴 거예요.”
    “히~, 쑥스러워라.”
    “지수 씨,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왜요?”
    “글쎄요.”
    현우는 지원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얹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가 동양적인 선율이 아름답게 흐르는 달빛 아래 지원을 보석처럼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 다음 현우는 잽싸게 해바라기가 디자인된 하얀 세숫대야를 찾아내 미지근한 물을 반쯤 받았다. 이제 현우의 눈빛은 조금 전과 다른 농도 짙고 뜨거운 초여름의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 태산처럼 무거운 진지함까지 엿보였다. 그때 현우가 숨겨놓았던 걸 마침내 지원 앞에 꺼내놓았다. 붉은 장미꽃다발이었다. 환한 달빛 속에서 향기를 내뿜는 장미꽃다발과 지원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루었다.
    “장미네요?”
    “예. 하지만 이 장미는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장미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장미예요.”
    “피부로 느끼는 장미요. 그런 장미가 있어요?”
    “사실 이건 비누로 만든 장미꽃다발이거든요. 며칠 전 장애우들이 회사에 와서 이걸 팔더라고요. 그래서 지수 씨에게 선물하려고 하나 사둔 거예요.”
    “!”
    지원은 의자에 앉은 채로 양손을 허벅지에 모으고 풍성한 속눈썹을 반쯤 덮은 채 말이 없었다. 물결이 잦아든 세숫대야에 현우가 꽃잎 하나를 띄우자 순수함의 열기로 사르르 녹았다. 그리곤 뽀얀 거품이 일었다. 거품이 하나둘 터질 때마다 공기 중에 퍼지는 장미향은 눈으로 맛보는 달빛처럼 아주 은은했다. 그때 현우가 잔뜩 움츠리고 있는 지원의 한쪽 발목을 살포시 잡았다.
    “지수 씨, 제가 듣기로는 유럽에서는 피의 상징적인 의미가 바로 꽃이라고 하던데 그게 맞나요?”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럼 이 꽃잎 하나하나가 바로 저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제 영혼이라고 생각해줘요. 지수 씨 스스로에게 그렇게 마법을 걸면 더 좋고요.”
    “…….”
    “그럼 이제 눈을 감아요. 그리고 마음으로 느껴 봐요.”
    “예.”
    “먼저 깨어난 피부의 세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봐요. 이제 서서히 들리나요?”
    “예, 들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의식들이 하나둘 거친 파도에 난파되어 침몰하고 있어요.”
    “제가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의식의 바다에 뛰어들어요. 그리고 지수 씨에게 향하는 세상의 모든 날선 눈빛들도 그냥 물살에 쓸려가도록 내버려두세요.”
    “앗, 사라졌어요!”
    “이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아주 생소한 느낌들이 밀려올 거예요.”
    “예. 그런데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잘 잡히지가 않아요. 하지만 숲에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아주 상쾌해요.”
    “그건 바로 제 영혼의 느낌입니다. 제 영혼의 느낌이 어떤가요?”
    “꽃잎을 가볍게 스치는 바람결인 양 간지러워요. 하지만 복숭아 향기 같은 현우 씨의 체온이 느껴지는 동안에는 신의 정원에 들어온 것처럼 알 수 없는 가벼움이 저를 비눗방울처럼 공중으로 떠오르게 해요.”
    “마음이 편안한가요?”
    “예, 아주 많이. 거기다가 신비한 고래의 멜로디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 무작정 따라가고 싶어요.”
    “한번 따라가 보세요. 무엇이 보이나요?”
    “작고 소박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운 희망이요.”
    “지수 씨에게 행복의 마법을 거는 제 영혼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감동의 목소리예요.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부르는 <카루소(Caruso)>를 듣는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흘러요.”
    “지수 씨, 그럼 이제 이 느낌을 마음속에 잘 간직해주세요.”
    “예, 꼭 그럴게요. 영원히.”
    “자, 이제 눈을 뜨세요.”
    “정말 고마워요, 현우 씨.”
    이제 지원의 하얀 발이 백설공주의 유리구두처럼 빛났다. 동시에 영롱한 눈물방울이 지원의 속눈썹 끝에 매달려 막 세상으로 떨어지려 했다. 마치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았다. 지원은 비로소 자신의 험악한 삶이 풍요의 바다에 이른 것 같았다. 지원은 감동에 사로잡혀 아직도 현실을 꿈처럼 느끼고 있음이 확실했다. 아니, 꿈을 인생으로 만들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절망의 저녁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현우도 그 향기에 취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 “현우 씨, 정말 선수 아니죠?”
    “!”
    “이렇게 잘 해주면 세상에 안 넘어갈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요.”
    “왜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럼 정말…….”
    “적어도 지수 씨에게만큼은 선수이고 싶어요. 그럼, 지수 씨가 제 곁에 있을 때는 언제나 행복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은 좋은데 왠지 부끄럽네요. 그런데 현우 씨, 제가 가장 섹시해보일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글쎄요. 전 한 번도 지수 씨가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바로 현우 씨가 제 곁에서 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줄 때예요. 그러면 마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죠.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저는 그 최면상태에서만 살 수가 있어요.”
    “정말요?”
    “예……에. 그러니까 이제 현우 씨의 옆은 언제나 제 자리예요?”
    “당연하죠.”

    지원은 현우의 등 뒤로 손을 돌려 깍지를 꼭 꼈다. 그리고 살며시 눈꺼풀을 덮은 채 찬찬(燦燦)한 아침 햇살을 받는 꽃봉오리처럼 입술을 한 숨씩 열었다. 그 열린 마음의 문을 통해 훈풍처럼 현우의 밀도 높은 숨결이 불었다. 그리고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듯 이제 어둠의 공간에서 상대를 향한 가스구름이 사랑의 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현우의 영혼으로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을 얻었다. 그리고 현우는 별빛을 모아 지원의 마음속에 지펴놓은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살피고 또 살폈다. 지원은 갑자기 나른함을 느꼈다. 어딘가에 편안하게 누워 밀려오는 행복감을 온전히 탐닉하고 싶었다.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꿈길까지 가져가고 싶다는 영혼의 유혹도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때 두 사람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바람결이 드뷔시(Debussy)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풀어놓았다. 달빛마저 구름 속으로 파고들어 가 두 사람이 연주하는 황홀한 세레나데를 감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