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이 되어가는 이 땅의 '깡통진보'들을 위한 축령비(畜靈碑)
  • 홍성담이 드러낸 깡통진보의 멘탈:
    [시간 증오][생명 경멸]


    홍성담이 만든 [출산 그림] 두 점은 지난 20여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깡통진보의 멘탈을 추악하게 드러내 준 기념비적 정치 포스터이다.

    심리의 밑바닥을 냉철하게 들여다보고 그리면 세계적 명작이 되고, 그 밑바닥 속에 처박힌 채 허우적거리며 발작을 일으키면 추악한 정치 포스터가 된다.

    심리의 심연을 전율스럽도록 투명하게 통찰한 세계적 명작이 있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E. Munch)가 그린 [절규].
    근대 문명 속에 숨어 있는 폭력성 앞에 홀로 선 개인의 공포와 절규를 그렸다.

    반면에 홍성담은, 깡통진보의 황폐한 세계관을 주장하는 정치포스터를 그렸다.

    뭉크는 인간의 고통에 동참했고, 홍성담은 정치세력의 욕망에 동참했다.
    세계적 예술가정치판 간판쟁이의 차이이다. 

     



  • 그러나 홍성담이 반드시 실패한 인생인 것만은 아니다. ‘홍성담’이라는 고유명사는 미술계의 치욕이 되었지만 ‘홍성담 신드롬’은 병리적 사회심리 현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연쇄 살인범이라도 이름이 남을 수 있다면 장땡이다—이것이 바로 아큐(阿Q) 선생이 가르치신 ‘정신적 승리’ 아닌가!

    그런데 홍성담의 [출산] 그림은 진지하고 심오하게 감상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년 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깡통진보 문화권력의 병적(病的)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신병 환자의 그림이 그 환자의 비틀린 욕망과 콤플렉스를 보여주듯, 홍성담의 그림은 깡통진보의 참혹한 정신상태—두 가지 병적 증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 첫째, 시간에 대한 증오
       둘째, 생명에 대한 경멸

     

    이제껏 깊게 감추어져 왔던, 깡통진보의 내밀한 정신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준 점에 대해, 나는 ‘홍성담’이라 불리는 환자에게 깊이 감사한다.


    1. 시간을 증오하라


    홍성담의 그림에서는 딸이 아버지를 낳는다.
    현재가 과거를 낳는다.

    이는 깡통진보의 마인드가 역(逆)시대착오(reverse anachronism)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  

    시대착오 [과거의 기준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역(逆)시대착오 [현재의 기준을 과거에 적용]하는 짓이다.
    깡통진보
    의 뇌수 속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조작한다.


    대한민국은 지난 60년 동안 선진국이 300 년에 걸쳐 해냈던 일을 이룩했다.
    생물학적으로 단 두 세대 만에, 남들의 열 세대를 살아 낸 것이다.

    40년 전 유신시절의 일은 남들로 치자면 2백년 전의 이야기이고, 6.25 때 일은 3백년 전 스토리이다.

    따라서 현재의 기준을 기계적으로 과거에 적용하면—역(逆)시대착오를 저지르면—과거는 온통 역설과 아이러니가 가득 찬 괴기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가짜진보는 이 같은 느낌을 잔뜩 확대해서 ‘대한민국은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역(逆)시대착오는  [시간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다.
    “과거도 최소한 오늘 정도는 되었어야 할 것 아니야! 왜 그때에는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고 살았던 거야!”라는 마음.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는 멘탈이다.


    깡통진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수치스런 나라]란다.
    백만민란을 일으켜 불살라 버려야 한단다.
    “쫄지 마, 씨바!”라고 외치며 뒤집어 엎어야 한단다.


    깡통진보역(逆)시대착오 멘탈[시간에 대한 증오]가 민주당에 전염되어, 민주당으로 하여금, 이번 대선을 ‘과거심판’으로 몰고 가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엊그제 (11월 25일) 제대로 짚었다.

    “민주당은 선거 막판까지, 돌아가신 아버님과 싸우다 말 것”

    박근혜가 한 말 중에 제일 당차고 똑 부러진 이야기이다.

    문재인의 경쟁상대는 박근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67년’(해방 기점)이 되어 버렸다. 

    역(逆)시대착오, 즉 [시간에 대한 증오]는 어떤 종류의 욕망과 관계가 있을까?

    니체(Nietzsche)는 “복수욕이 [시간에 대한 증오]를 만든다.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증오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과거심판역사전쟁깡통진보 역(逆)시대착오[시간에 대한 증오](=복수욕)를 고스란히 빼다 박은 것이다.

    이 점에서 홍성담은 너무나 민주당스러운 화가이다.
    민주당의 [그림] 대변인이 곧 홍성담이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정치판의 간판쟁이로 타락시킨 것 치고는 제법 출세했다

    또한 민주당은 너무나 홍성담스러운 정당이다.
    홍성담의 멘탈—깡통진보의 멘탈을 정당으로 구현한 것이 곧 민주당이다.
    그 흉악한 멘탈이 정당으로 구현된 것치고는 겉모습이 꽤 그럴싸하다.


    깡통진보의 역(逆)시대착오, 즉 [시간에 대한 증오]는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있는 수많은 선배세대에 대한 폭력이요 테러이다. 그 사람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 인생을 경멸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평생동안 뼈골이 빠지도록 헌신하고 희생해서 오늘의 번영을 만들어 준 선배세대를 버러지 취급하는 태도.

    경남 진주의 이현동 할아버지의 인터뷰를 정리한 절절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 보면, 깡통진보의 역(逆)시대착오가, 선배세대에게 얼마나 끔직한 폭력인지 느낄 수 있다.

    좀 길지만 죄다 읽어 보자.

        저는 일정(日政) 때 조선인 징병 1기 해당자로 금년에 86세가 됩니다. 우리 세대의 해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앞으로 얼마 안 있어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세대는 영원히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꼭 해두고 싶은 말을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일본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神風) 대원이었던 경남 사천시 출신 탁경현씨가 1945년 5월 11일 비행기를 몰고 오키나와 섬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대를 향해 돌진, 자폭하여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날, 저는 당시 대전에 있었던 일본군 제224부대 병영 안에서 징집된 육군 일등병으로 폭약상자를 등에 메고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일 전쟁이 몇 달만 더 끌었더라면 저는 아마 어느 전선엔가 보내져서 훈련받은 그대로 인간 지뢰가 되어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저와 탁경현씨는 지금 똑같이 반민족행위자라는 말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탁경현씨가 죽은 후 석 달 만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해방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성과가 아니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돌변에 의하여 저절로 주어진 요행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해방 덕분으로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저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6·25전쟁 때 경찰전투요원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지금은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으면서 안락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 그때 죽었던 탁경현씨는 일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반민족행위자라 하여, 외로운 넋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같은 동족들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살아서 국가유공자 행세를 하고 있는 제가 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탁경현씨와 저는 나이도 그 당시 20대 전반으로 같은 세대였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습니다. 그것도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은 선대들의 원죄를 물려받아 병역의무가 없는 대신 참정권이 없어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는 열등한 2등 국민이었습니다. 그 서러움은 젖먹이 나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더욱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같은 동족 어른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이라는 속삭임이 간혹 어렴풋이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궁창에서 살고 있는 소녀가 꿈속에서 신데렐라를 보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가 주어져, 저 자신이 징집 1기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두려웠습니다. 죽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 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고향에서 제가 보았던 환송행사가 사실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거짓 행사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내 탓은 아니고 남 탓이었을까요? 우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나라 잃은 선대들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구차스러운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만, 지금 반민족행위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세대의 대부분이 어떻게 되어서이든 간에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냈고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이루는 데 기초를 닦은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만은 기억해주십시오.

        이번에 만들어진 '친일인명사전'인가에는 일본군에 복무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정 계급 이상의 장교는 넣고, 그 이하의 저와 같은 사병들은 개처럼 강제로 끌려갔던 보잘것없는 희생자라 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이름을 뺐다더군요. 그렇다면 그 명부에 등재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있는 완전한 인격을 갖추었고, 이름이 빠진 저희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능력조차 없는 책임 무능력자란 말입니까?

       이건 우리 세대 전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넣으려면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 넣어야 했습니다. 군인은 장교건 사병이건 넓은 의미에서 모두가 병사입니다. 임무를 위해 내던지는 목숨의 무게는 모두 같으니까요.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당시의 일본군인이었던 자를 모두 반민족행위자 명부에 넣었더라면 우리들의 마음은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죄부 뒤에 숨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6·25전쟁 중에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백척간두에서 지켜낸 자랑스러운 국민적 영웅을 일본군 하급장교였다는 이유로 반민족행위자로 규정지은 것은 마치 그가 한때 로마의 관리였다는 전력을 들어 저 위대한 성자인 바울을 악마로 몰아세우는 것과 다른 것입니까?

       지금에 와서 과거의 역사를 심판하여 단죄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폭넓고 열린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 생명을 경멸하라


    옛 그리스인들은 우주의 두 축을 시간(Cronus) 땅(Gaia)이라고 통찰했다.
    하늘—천체의 운행은 시간의 몸짓일 뿐이라고 보았다.
    땅은 곧 생명이요 어머니이며 출산이며 양육이다.

    깡통진보의 정신은 시간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땅(=생명)에 대한 경멸모성, 출산, 양육에 대한 경멸—로 완성된다.

    홍성담여성의 출산 순간 그 자체를 모티브로 잡아 능욕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경멸을 완성했다.

     



  • 홍성담에게 꾸르베(Courbet)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사실주의의 거장으로 꼽히는 꾸르베 역시  ‘생명의 근원’으로 해석되는 여성의 음부를 모티브로 삼아 충격적 작품을 그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꾸르베의 인간됨을 좀 살펴보자.

    우리에게는 흔히 '사실주의 화가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꾸르베는 맹렬한 폭도 정치인이었다.

    ‘백만민란’을 외치며 횃불을 들고 전국을 싸다닌 문성근 정도는, 꾸르베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도 못하다.
    파리 꼬뮨(1871) 때 폭도를 선동하여 프랑스 '방돔 탑' 위에 세워진 나폴레옹 동상에 밧줄을 걸어 끌어 내려 진흙탕 속에 처박았던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꾸르베이다.

    그런데 나중에 더 훌륭한 동상이 들어섰다.

    니체(NietZsche)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고백해 봐!
    네놈이 만들어 낸 소음과 연기를 걷어 내고 나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네놈의 장난에 의해 도시 하나가 통째로 미라가 된들,
    뭐가 변한 거지?
    동상을 끌어내려 진흙에 처박은들
    뭐가 변한 거지?

    동상을 끌어내려 쓰러뜨리는 놈들한테 이 말을 해 주지.
    “바다에 소금을 집어넣는 것과
    동상을 끌어내려 진흙에 처박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바보짓이야”라고.
    쓰러진 동상은 실은 네놈의 [진흙 같은 경멸] 속에 누워 있는 거지.

    쓰러져서 경멸 받는 존재의 이치가 무엇인지 알아?
    그 존재의 생명, 그 존재의 아름다움은
    바로 경멸 받음을 통해서 다시 자라 나오는 거야!
    그게 이치야.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잖아!

    그전보다 더 성스러운 모습으로 일어나는군.
    애잔한 슬픔을 담은 요염한 모습이군.
    네놈들에 의해 [쓰러져서 경멸 받는 존재]는
    네놈들이 쓰러뜨려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해 할걸?

    네놈들, [체제 전복자]들!

    왕이나 교회같이 오래되고 미덕이 쇠퇴한 존재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지.
    “전복시키려는 자들의 손에 의해 전복돼 버리십시오.
    나중에 다시 부활할 겁니다.
    나중에 미덕도 다시 생겨날 겁니다! ”


    꾸르베는 여성의 성기를 모티브로 사용해서 '삶에 대한 염증'을 표현했다. <우주의 시작>(The Origin of the World)이란 작품이다.
    모델에게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취하게 만든 다음에 그 음부를 확대한 화면. 


     



  • 꾸르베의 <우주의 시작>은 원초적, 실존적 반항을 드러낸 그림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150년 전, 이 그림은 프랑스 문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성과 출산을 [파괴와 풍자를 위한 모티브]로 사용하려면, 최소한 꾸르베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한낱 정파 싸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초적, 실존적 반항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홍성담은, 생명과 존재 전체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파(새누리)와 후보(박근혜)를 공격하기 위해 생명과 존재 전체를 짓밟았다.

    정당정치의 선거를 위해 생명—여성성, 모성, 출산을 모욕하고 짓밟는 멘탈—이것이 홍성담이 도달한 경지이다.

    이는 곧 생명을 경멸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깡통진보의 정신 수준, 문화 수준이다.


    3. 인간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지름길


    깡통진보는 우주의 두 축—크로누스(시간)를 증오하고 가이아(대지=땅=생명)를 경멸한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크로노스를 아버지, 가이아를 어머니로 삼았다.
    크로누스와 가이아를 모르는 상태에 대해 선조들은 “애비(크로누스), 에미(가이아)도 몰라보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불렀다.

    깡통진보는 드디어 짐승의 경지로 해탈하신 것이다.

    감축드린다.
    맑은 정신이 없으니 고통을 모르고, 투명한 의식이 없으니 도덕이 끊겼다.
    무고통, 무도덕이 곧 구원 아닌가!
    나무축생불!(南無畜生佛, 짐승을 부처로 받들어 그에 귀의합니다)


    [시간에 대한 증오][생명에 대한 경멸]이라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십년에 걸쳐 [진실 경멸]을 아침 저녁으로 수련해야 한다.

    깡통진보는 최소한 1980년대 중반부터 약 4반세기에 걸쳐 꾸준히 [진실 경멸]을 수련한 덕분에 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1970년대 말 베트남 보트피플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1980년대 후반의 동구권 붕괴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이때 뒤늦게 알려진 중국 대약진운동(약 3천만명 사망)과 문화혁명(약1천만명 사망)의 참상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또한 이때 뒤늦게 알려진 베트남 개혁개방정책(도이모이)의 성과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1991년 소련 붕괴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소련에서 오픈된 6.25 전쟁에 관한 비밀자료(6.25가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전쟁이었다는 결정적 증거)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1990년대 말 북한의 대량 아사(약 3백만명이 죽었다고 추정됨)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2002년 장갑차 교통사고를 빌미로 한미동맹을 파괴하려 시도했던 ‘장갑차 난동사건’의 진실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2008년 광우뻥 난동의 진실(즉, 시민의 순수한 생명 지킴이 에너지를 사기쳐서 난장판으로 타락시켰다는 점)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2010년 천안함의 진실(평양것들이 폭침시켰다는 진실)에 눈을 감았다.
    그들은 북한이 세계 최악의 전체주의라는 끔직한 진실에 눈을 감았다.


    얼마나 찬란한 [진실 경멸]의 역사인가!

    수 십 년에 걸쳐 이토록 꾸준히 [진실 경멸]을 수행하면 시간을 증오하게 되고 생명(모성, 출산, 양육)을 경멸하게 된다.
    진실은 시간의 예술이며 생명의 보호자(patron 파트롱)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적으로 돌리면 시간을 증오하고 생명을 경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무축생불 종교가 완성된다.

    좀 더 살펴 보자.

    진실시간의 예술이다.
    진실은 [조가리 지식]이 아니라 [좀 더 진실된 것]을 위해 [현재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넘어서기](going-over)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것이 4백년 전, 현대 과학방법론을 확립시킨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의 업적이다.

    그래서 베이컨은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책에,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Organon)을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학’(Novum Organum)이라고 제목 달았다.

    그런데 과정시간이다.
    그래서 진실 [시간의 예술]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현재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넓은 지평의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것이 곧 [진실]이다.

    시간진실이 밟아가는 경로이며, 진실을 숙성시키는 발효 프로세스이다.
    시간은 진실 친화적이다.

    그래서 링컨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을 오랜 시간 동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깡통진보 진실경멸하기 때문에, 시간 자체를 증오하게 되었다.


     
    또한 진실생명의 보호자이다.
    오직 진실만이 [생명이 벋어가는 길]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진실을 무시하면 조만간에 파멸하거나 쇠락한다.
    그래서 [진실 경멸][생명 경멸]과 동전의 앞뒤면을 이룬다.

    깡통진보는 수 십 년에 걸쳐 [진실경멸]을 수행해 온 덕에 이제 [생명 경멸]을 완성하게 되었다.


    4, 자아가 없는 좀비들


    홍성담깡통진보의 멘탈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시간에 대한 증오] [생명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노출시켰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제껏 깡통진보는 세상의 온갖 그럴싸한 단어는 죄다 자기 것인 양 꼴값을 떨어왔기 때문이다.

    환경, 생명, 강, 자연, 생태계, 도롱뇽, 구럼비, 정의, 평화…

    깡통진보의 ‘깡통’ 속은 지난 30년 동이 같은 단어들에 대한 조직적 능욕과 강간이 이루어져 온 끔직한 범죄 소굴이다.

    이제 깡통진보의 멘탈이 드러남으로써, 그 범죄의 흉악함을 좀더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진실을 경멸하는 습성]을 익히면 자연히 시간을 증오하고 생명을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아(Self)가 붕괴된다.


    자아척추이다.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하는 개인이 곧 자아이기 때문이다.

    마주하려면 척추가 반듯해야 할 것 아닌가?

    이 척추의 이름은 [진국](integrity, ‘진국’은 필자가 선정한 번역어이다)이다.
    “그 사람 진국이야!”라고 말할 때의 진국이다.

    현대심리학은, [진국]이야말로 ‘자아됨’의 핵심이라고 가르친다.
    진국은, 나의 현재의 알량한 이익, 입장, 이해관계를 [넘어서기](going-over
    )하여 진실을 수용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깡통진보에게는 자아가 없다.

    좀비다.
    수십년 동안 [진실 경멸]을 수련해 온 덕에 자아가 붕괴해 버리고 말았다.

    뱀발:
    주류제도권—보수가 힘을 못 쓰는 이유는 [진실을 옹호하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깡통진보진실경멸하고, 보수진실비겁하다.
    진실에 관한 경멸과 비겁—이것이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비참한 지형이다.

    작년 말까지,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에만 해도, 깡통진보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김정일의 어드바이스(?)가 종북성골(=평양커넥션을 가진 집단)을 움직이고,
    종북성골이 종북잡골(=평양커넥션이 없는, 노동계, 교육계 대중 조직의 종북 그룹)을 움직이고,
    [종북 성골+잡골]
    친북(=그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이익을 위해 종북의 역성을 드는 인간들)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작동해 왔다.

    깡통진보를 그나마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것은 이 지렛대가 치밀하게 작동했던 덕분이었다.

    이 같은 [조직적 일사분란]이 지금까지 깡통진보공허함—자아의 붕괴—를 감추어 왔다.

    그러나 이제 위와 같은 지렛대는 더 이상 치밀하게 작동하지 못 한다.
    김정일이 죽고 평양의 붕괴가 급가속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앉는 배에서 쥐들이 앞다투어 뛰어 내리듯 깡통진보 내부가 아비규환이다.

    통진당 분열 사태에서 드러나듯, 서로 등짝에 칼 질하고 뒷다리잡고 머리를 밟고 올라서고….
    난리가 아니다.

    이번 대통령선거만 보더라도, ([진실 경멸, 시간 증오, 생명 경멸] 증후군을 공유한다는 문맥에서 민주당 역시 깡통진보로 분류한다면) 깡통진보 후보가 무려 네 명이다.

     
    진실경멸하면, 시간을 증오하고 생명을 짓밟고 자아를 붕괴시키게 된다.

    그 종착점은, 서로 잡아먹는 식인성 좀비집단이다.

    “나무축생불"(南無畜生佛..짐승을 부처로 받들어 귀의하옵니다)을 외치며 아케론(Acheron, 단테의 ‘신의 코메디’에 나오는, 지옥 앞을 흐르는 강) 강변을 헤매고 있는 짐승들!
    그들의 [되다만 영혼]을 달래는 축령비(畜靈碑. 죽임을 당한 짐승의 영을 달래주기 위해 세우는 비석)를 깍기 시작해야 할 때가 왔나?.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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