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1
  • <23> 윤지수


    정원은 간밤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을 설친 터라 얼굴뿐만 아니라 의식까지 푸석푸석했다. 그래서 그 건조함을 몰아갈 한 줌의 바람이 필요했다. 폭풍이면 더 좋았다. 그때 재국이 슬며시 등 뒤로 다가와 정원의 허리춤으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재국의 장난에 정원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곤 자신의 컵에 커피를 따르던 것을 멈추고 재국의 머그컵을 먼저 채웠다. 재국이 그런 정원에게 불쑥 선택을 강요하는 눈빛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과거 국민의 정부와 관련된 자료 어디에도 예산관 구인수와 관련된 내용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이건 청소를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 건물을 지어 이사를 가버린 것 같은 황당한 느낌마저 들었다니까요.”
    “허공에다 대고 헛손질하는 느낌이었겠군!”
    “맞습니다. 딱 그 느낌이었어요.”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 이후, 그러니까 우파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갑자기 퇴직한 직원들에 대해서 한 번 털어보지 그랬어?”
    “그것도 당연히 했죠.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 초기까지 모두 털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인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기존에 북한파트가 전담하던 북한 정보 분석기능을 2009년 해외업무를 담당하던 1차장님 산하로 옮기는 과정에서 관련 자료가 일부 누락 내지는 분실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음! 그건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군.”
    “아참! 팀장님, 이건 제 본능적인 직감인데요.”
    “본능적인 직감?”
    “예. 우리 말고도 누군가 구인수의 행적을 은밀히 추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건 왜지?”
    “거 뭐랄까요. 왠지 특수자료 보관실에 남아 있는 오래된 자료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요.”
    “!”
    “사실 지금쯤이면 사람 냄새는 말끔히 지워지고 먼지만 쌓여 있어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생각과 달리 그 당시의 자료엔 먼지를 털어낸 흔적까지도 보였습니다.”
    “그것 참 모를 일이군! 국가기밀자료가 대부분인 특수자료 보관실은 외부 유출이 도저히 불가능한데. 흠……. 그렇다면 과거 자료 열람자는?”
    “검색대에 비치된 컴퓨터를 이용해 그것도 확인했습니다만 기록된 열람자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구인수와 관련된 사항은 그의 가족이 증인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추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팀장님.”
    “!”
    석우는 백도균 전무의 방 앞에서 현우를 기다렸다. 그는 현우가 나타나자 급히 맞은편의 패턴실로 현우를 데리고 들어갔다. 다행히 패턴실은 직원들이 외근을 나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빈 작업대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곡자들 그리고 몇 개의 가위와 샘플작업을 위한 미싱 한 대. 거기다가 숫자가 기입된 무수히 많은 패턴들이 한쪽 벽에 마치 빨래처럼 걸려 있을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팀장님, 혹시 지난번 보고서 때문에 지금 백 전무님 방에서 나오시는 것 아니세요?”
    “그걸 홍 대리가 어떻게 알았어?”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뭘?”
    “전무님이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부탁하시는데 저희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러게. 가만! 그럼 홍 대리와 동해 씨에게도 이미?”
    “심지어 저희에게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으셨는걸요.”
    “협박성 발언을 했다고?”
    “예. 증거도 없는 중상모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법적인 책임도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

    사실 현우는 석우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심 갈등했다. 우선 평소와 사뭇 다른 백 전무의 인자한 얼굴이 그랬다. 게다가 회사운영의 묘(妙)가 바로 그런 데서 생길 수도 있다는 백 전무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물론 백 퍼센트 동의는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석우의 말을 듣는 순간 현우는 입 안이 몹시 꺼끌꺼끌하고 씁쓸했다.

    “쾅!”
    “야, 이거. 나 팀장과 홍 대리 아냐. 그동안 잘 지냈어?”
    “어, 이사님. 언제 귀국을……?”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야.”
    “유럽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잘 다녀왔으니까 지금 이렇게 회사에 나와서 자네들을 보잖아. 안 그래? 하하하.”
    “그런가요. 히.”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던 카프리섬 투어는 잘 하셨어요?”
    “카프리섬! 나 팀장, 말도 꺼내지마. 시간이 없어서 출장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간신히 이태리에 들렀어. 그래서 로마 시내 야경만 실컷 구경했다니까.”
    “그럼 어디에?”
    “홍 대리, 왜 궁금해?”
    “후후후, 예.”
    “최근 해외에서 트렌드가 되고 있는 패션 경향 자료 좀 모으느라고 출장기간 대부분을 파리의 대형서점과 거리에서 보냈어. 그런데 혹시 퇴근하고 둘이서만 어디 좋은 데 가려고 모의하고 있는 것 아니야?”
    “예~에? 절대 아닙니다.”
    “나 출장 간 사이에 어디 분위기 좋은 데 봐두었구나. 그치?”
    “후후후. 그런 곳이 있으면 당연히 이사님을 먼저 모시고 가야죠.”
    “그렇지! 역시 나 팀장은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안다니까. 아무튼 오늘은 내 이쯤에서 양보하지. 형식적이지만 사장실에 올라가서 돌아왔다고 눈도장을 찍어야 하거든. 그래야 오고 있는 내일이 편하고. 아참! 두 사람, 마침 잘 만났네. 이거 하나씩 받아. 값은 싸지만 그래도 이태리제 만년필이야.”
    “감사합니다. 이사님. 잘 쓰겠습니다.”
    “후후후. 다음 출장 갈 땐 내가 더 좋은 것으로 사다줄게. 그럼 수고!”
    “예, 올라가십시오.”

    추 이사는 사장의 친동생으로 기획파트와 해외파트 총괄이사였다. 거기다 직원들이 부담스러워 거리감을 두기에 딱 좋을 만한 최고 명문대 출신이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추 이사의 혈연과 학연을 의식하는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추 이사가 먼저 그런 걸 멍에처럼 거추장스러워 했다. 그는 높은 친화력을 지닌 유능하고 노련한 최고 관리자였다. 그리고 소탈하고 직원들을 먼저 배려해주는 상사 아닌 상사였다. 또한 직원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늘 설득과 이해로 채워진 부드러운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이 백 전무와의 극명한 차이였다.

    “팀장님!”
    “응, 왜?”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세요?”
    “추 이사님은 적어도 사내에서만큼은 존재 이유가 분명한 것 같아서 말이야.”
    “후후후, 그건 저도 생각이 같습니다. 사실 추 이사님을 모셨으면 하고 생각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죠.”
    “!”
    “아! 물론 팀장님도 함께요.”
    만년필을 받아든 석우는 그 화려함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하지만 현우는 뚜껑에 달린 클립을 벌려 안주머니에 꽂고, 다시 마음에 바위를 안았다. 일반적으로 직장 상사에는 두 종류의 부류가 있다. 하나는 매우 이기적인 이유로 회사가 아닌 자신을 위해 부하 직원을 노예처럼 혹사시키는 상사다. 물론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을 잘하고자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중시해 일을 열심히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하는 상사다. 이런 상사는 존경을 받는다. 결국 존경은 대상인 부하 직원을 소유로 보느냐 존재로 보느냐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 지수는 화원의 하얀 벽에 몇 개의 널빤지를 이어 붙여 설치한 간이책장 앞에 있었다. 지수는 뉘어놓은 책들을 일으켜 세워 한쪽에 가지런히 세웠다. 그리곤 그 밑에서 액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순간 지수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의 그물에 사로잡혔다. 사진 속 오마니와 지수는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뒤로 푸른 물빛의 강이 흘렀다. 전체적인 풍광이 지수의 어린 시절을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때 풀잎 스치는 소리가 났다.
    “피 씨 아저씨, 꽃배달은 잘 했어요?”
    “언제 제가 실수하는 것 봤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배달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하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뭡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그거 사진 아닙니까?”
    “맞아요. 그냥 참고자료로 사용할까 해서…….”
    순간 피오기의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지수는 재빨리 액자를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피오기는 숨겨진 네 개의 송곳니 중 한 개를 살짝 드러냈다. 누가 봐도 그 실룩거림은 본능적인 탐색과 정찰이었다. 그 집요함을 알기에 지수는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러자 피오기도 이내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곤 화원의 안과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무,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연락이 끊기는 것 같소. 혹시 통화불가 지역만 일부러 골라 다니는 거 아니요?”
    “!”
    “그게 아니라면 지도자 동지의 교시(敎示)와 북조선에서 하달한 지시사항을 숙독하고 암기하는 생활총화(주간평가)의 중요성을 동무가 잊었거나.”
    “밥을 굶을망정 어떻게 생활총화에 대한 열정이 식을 수 있겠어요.”
    “맞소! 생활총화는 우리 공화국 인민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소. 때문에 특별한 사유도 없이 불참했다는 건 평양에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일 수도 있소.”
    “어제는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방전됐어요.”
    “지금 우연이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요?”
    “맞아요. 분명 우연이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건데 배터리가 방전됐다는 게 확실한 거요?”
    “!”
    “동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부러 전원을 꺼놓을 수도…….”
    “부조장 동무, 동무가 지금 날 의심하는 것이오?”
    “나는 단지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조장 동무의 상황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걸 지적했을 뿐이오. 더구나 동무가 요즘 만나는 남성 동무…….”
    “됐소! 어째 나를 미제국주의라면 환장하는 나약한 남조선의 여성 동무들과 같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그다지 좋질 않소.”
    “더구나 애초 그 남성 동무는…….”
    “동무는 내가 한낱 그렇고 그런 연애감상에 젖어 당과 조국을 배신할 반동처럼 보이오?”
    “…….”
    “난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혁명전사로서 남조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내 전부를 걸었소.”
    “동무,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난 그저 요즘 적후(敵後)의 국정원이 불을 켜고 있다기에…….”
    “물론 나도 동무가 평양에서 부여받은 비밀임무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소.”
    “!”
    “하나는 1국 소속 전투원의 고유임무고, 또 다른 하나는 먹이냄새를 쫓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생쥐처럼 남조선에서의 내 행동을 감시하는 비밀임무라는 거.”
    “생쥐처럼?”
    “또한 피오기 동무, 내가 분명히 말해두겠소. 동무는 부조장이고 나는 공작조의 조장이오. 따라서 내게는 동무에게 보고할 의무가 전혀 없소. 알겠소?”
    “끙…….”
    “혹시 내가 동무의 상관이란 사실을 잊은 건 아니오? 앞으로 나를 부를 땐 반드시 ‘조장 동무’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시오.”
    “물론 동무는, 아, 아니지. 조장 동무는 상관이오. 하지만…….”
    “내 꿈은 남조선 인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오. 알겠소?”
    “…….”
    “동무가 그동안 위대한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남조선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다는 점은 인정하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런 반당적인 행동을 하면 그땐 엄중히 문책하겠소.”

    뜻밖의 신경전이었다. 하루 24시간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대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딱딱하고 상하 구별이 뚜렷했다. 흡사 엄격한 군대 내의 상명하복식 대화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동무’였다. 그 단어는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금지용어였다. 따라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건 두 사람의 신원이었다. 말을 마친 지수가 책상 속에서 정전 때 사용하는 일자형의 노란색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웃음기를 말끔히 지운 채 화원의 뒷마당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흠!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 크크크, 이거 점점 재밌어지는데. 그리고 나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가 생쥐라. 그런데 그 하찮은 쥐새끼가 동무의 생명줄이었다는 말은 안 하는군. 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