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2> 윤일현

    지수는 설거지를 하는 내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음악을 한 음도 놓치지 않고 낮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 행복감은 새로운 아침이라도 맞은 듯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는 현우에게 신선한 산들바람으로 불었다. 그때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현우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맑은 시냇물소리 같은 지수의 바람소리가 소곤소곤 흘러들었다.
    “!”
    “잠깐만요. 혹시 제가 왜 현우 씨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글쎄요. 사실 저도 그게 무척 궁금했거든요.”
    “이유는 두 가지예요.”
    “두 가지요?”
    “첫 번째는 현우 씨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된 명품 피아노처럼 손끝에 붙는 친근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목소리가 어미 새처럼 자꾸만 제가 아바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물고와요.”
    “!”
    “제가 다섯 살 때인가. 한번은 그림을 그렸는데 잘못해서 손을 얼굴만큼 크게 그렸어요. 그런데 퇴근하신 아바지가 보시고는 보통의 아이들은 손을 잘못 그리는데 우리 딸은 손을 예쁘게 잘 그렸다며 칭찬해주셨죠. 아바지는 제가 실수를 하더라도 절대로 화내시는 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현우 씨가 꼭 아바지처럼 그렇게 자상해요. 거기다가 세상을 보고 대하는 순수함과 열정도 아바지와 꼭 닮았어요.”
    “그랬군요.”
    “사실 제가 살아온 세상은 너무 무섭고 절망적이었어요. 그에 비해 우리 아바지는 현실을 너무 모르는 이상주의자였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액체 한 방울이 현우의 목에 떨어졌다. 액체는 흐르지 않고 그대로 현우의 가슴에 떨어져 유령처럼 떠돌았다. 오디오에선 베토벤의 <월광소나타(Mondschein)>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수는 마음의 매듭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딸을 몹시도 사랑한 아버님의 사랑이 느껴지네요.”
    “현우 씨도 이미 정원 씨에게서 들었을 거예요. 저희 아바지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최고 엘리트셨어요. 거기다 중국 상하이의 대외무역사업과 외화벌이 사업소의 총책이셨죠.”
    “그런데 어쩌다가 지수 씨의 아버님이……?”
    “아바지가 적대국가의 정보기관으로부터 적선(敵線)자금을 받고, 외부세계에 북한의 실상을 전달했다는 내부고발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간첩혐의를 받았어요. 물론 재외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들어왔다가 국가전복죄라는 죄명으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체포되셨죠. 결국 정치범수용소에서 돌아가셨어요.”
    “…….”
    “머리가 좋아 기득권세력에 편입된 아바지는 늘 주변에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오마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과 군에 잘 보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죠. 그런데 아바지는 늘 빈 웃음으로 때웠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인민들을 입쌀밥(흰쌀밥)으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하시면서.”
    “…….”
    그때 소파 위에 놓아두었던 크로스백이 갑자기 움찔했다. 지수는 얼른 크로스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백의 밑바닥에서 휴대전화를 찾아냈다. 순간 지수는 LCD창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 약간 혼란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휴대전화의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지수는 다시 현우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