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6> 엄 처장

    국정원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DVD의 패스트버튼을 누른 듯 정신없이 돌아간다.
    어느 때는 하루 24시간이 단 1초의 밤도 없이 낮만 계속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화장용 스펀지로 닦으면 켜켜이 쌓인 피로가 하얗게 들떠 일어날 것만 같은 얼굴, 어제보다 그 농도가 한층 옅어져 사물조차 희뿌옇게 보이는 동공,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사무실과 복도, 그리고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정원 요원들의 현주소다. 심지어 요원들의 신분은 죽어서까지도 철저히 비공개되며 더러는 신원(伸寃)하지 못한 억울한 죽음으로 남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내곡동 청사 안에는 이름도 사진도 없는 46개의 위패를 모신 보국탑(保國塔)이 있다.

    “야! 이 새끼, 최정원. 이 새끼 어디 있어?”
    “아 예, 처장님. 떨어진 볼펜 좀 줍고 있었습니다.”
    “너 이 자식, 계속 이렇게 네 멋대로 행동할 거야! 넌 위에 상사도 없어? 내가 네 눈엔 허수아비처럼 보인단 말이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엄 처장의 얼굴은 곧 폭발할 것처럼 주위의 공기를 무섭게 빨아들이는 초대형 화산 같았다.
    정원이 보기에 엄 처장의 심장에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초대형 마그마 저장고가 있었다. 약간의 충격에도 금방 폭발할 수 있는 조건을 엄 처장은 이미 충분히 갖고 있었다. 정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폭발과정에서 생기는 분화구를 최소화하는 것뿐이었다.

    “너, 제주도엔 왜 갔어?”
    “!”
    “그것도 유진 씨까지 데리고. 너 설마, 선머슴아 같은 유진 씨하고 단둘이 신혼여행이라도 갔다 왔다는 씨도 안 먹힐 거짓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누구를 좀 만나러 갔다 왔습니다.”
    “누구?”
    “전직 해파요원이었던 강치환 과장입니다.”
    “강치환 과장! 네가 강 과장을 만나서 뭐하게?”
    “그냥 만나고 싶었습니다.”
    “글쎄, 그냥 왜 만나고 싶었냐고? 네가 강 과장님 잘 알아?”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박철진이 말한 김정일 비밀통치자금의 중간전달자가 강 과장님일까 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처장님.”
    “미친놈. 이런 돌머리가 어떻게 한때나마 분석관에 뽑혔는지 몰라. 그래 좋다! 박철진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너 같으면 그런 비밀공작을 최고 윗대가리들이 일개 과장에게 시킬 것 같냐?”
    “…….”
    “여긴 국정원이고, 국정원은 절대 그런 방식으로 일처리를 안 해. 더구나 강 과장님은 당시 해외경제와 산업정보를 수집하던 산업경제팀의 화이트요원이었어. 임마! 화이트요원이 뭔지는 알지?”
    “강 과장이 화이트요원이었다고요?”
    “그래.”

    화이트요원이란 각국의 정보기관에서 CO(감독요원)로 불리는 해외파트 정보관을 말한다. 이들은 윈-윈 전략의 차원에서 주재국의 정보기관 사람들을 만나 첩보를 수집한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얼굴이나 신원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리고 화이트요원이 주재하는 해당국 정보기관은 방첩을 위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추적한다. 때문에 은밀함이 요구되는 비밀공작을 수행할 때는 공작관의 지휘하에 신분 노출이 전혀 안 된 블랙요원을 활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다. 순간 정원은 엄 처장이 휘두른 핵주먹에 흠씬 두들겨 맞아 그로기상태가 됐다.

    “네가 그렇게 천방지축 사리분별 못하고 날뛰지만 않았어도 최소한 강 과장이 어제 영실계곡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은 없었어. 알아?”
    “!”
    “너, 또 내 지시를 개무시할 땐 각오해. 사격장에 끌고 가서 M&P45의 속사표적지로 쓸 테니까. 이거 농담 아니다.”
    “예.”
    “이 순간부터 박철진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네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 이건 명령이다. 알겠어?”
    “예.”
    “그래 좋다! 오늘은 내가 키스(KSS·Korea Secret Service·국가비밀국을 가리키는 은어)의 CO(감독요원)와 약속이 있으니까 이 정도로 끝내지.”
    “…….”
    “그리고 임마, 넌 목숨이 몇 개라도 되냐? 보국탑엔 아무나 이름을 올리는 줄 알아. 그토록 별이 되고 싶으면 먼저 네 목숨부터 챙겨. 네 가치를 별이 아니라 살아서 증명하란 소리다. 출입국사무소에 여기저기 흔적이나 남기지 말고.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너처럼 허여멀겋게 생긴 놈은 처음부터 뽑는 게 아니었어. 규정이 하루아침에 괜히 생기는 줄 알아. 다 오랜 필드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야. 임마!”

    엄 처장은 들고 있던 노란색 파일을 정원에게 거침없이 집어던졌다. 하지만 분이 덜 풀린 듯 사무실을 빠져나가면서 암울한 저주까지 퍼부었다. 정원은 무의식중에 파일을 받아들긴 했지만 그것을 펼쳐보지 않았다.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작성방법과 작성처 또한 공항분실에서 만든 파일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런데 엄 처장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이 의식 속에서 가장 먼저 지운 건 박철진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니라 바로 엄 처장의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