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15> 강치환의 피살

    현우와 지수는 시립도서관에 있었다. 산이 인간의 길을 열고 물이 지인의 마음을 씻는다면 좋은 책은 신의 영혼을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신의 맑은 눈으로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우리네 일반인들이 속세에 머물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 마침내 얻는 정신적인 깨달음이다. 하지만 빌린 것이기에 영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리고 후회하고 또다시 책을 읽는다. 오늘 지수가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그 일상화된 후회의 횟수를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수 씨!”

    “어머! 깜짝이야!”

    “놀랐죠?”

    “훕! 예. 그렇게 책장 사이로 얼굴을 내미니까 꼭 공포영화에 나오는 유령 같아요.”

    “이 책 어때요? 이번 주 베스트셀러라는데. 여성독자들에게 인기 짱이래요.”

    “『최상의 로맨스』. 후후후. 현우 씨, 어쩌죠. 제 취향은 아닌데요.”

    “그럼 어떤……?”

    “전 그냥 남자들이 좋아하는 첩보나 스릴러소설 또는 스펙터클하고 터프한 액션물이 좋아요.”

    “남자끼리 치고받고 하는 거요?”

    “남자들은 대부분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요. 왜요, 현우 씨는 그런 거 안 좋아하세요?”

    “사나이들의 땀냄새 나는 거친 액션물 좋죠. 하지만 지수 씨랑 그거 와는 어째 좀…….”

    “로맨스소설은 읽을 땐 머릿속에 아름다운 그림이 막 그려져요. 그래서 꿈꾸는 것처럼 좋은데 다 읽고 나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파요. 또 지나친 감상이나 환상은 결국 제 삶을 싫증나게 하고 돌아보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하고요.”

    결국 지수가 대여를 신청한 책은 1994년판 『붉은 세포』와 『신용불량자』란 두 권의 책이었다. 『붉은 세포』는 미국의 전설적인 대 (對) 테러리스트부대인 <붉은 세포>를 직접 만들고 지휘했던 리처드 마친코 (Richard Marcinko)가 쓴 소설이다. 그래서 내용도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음모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미국 특수부대원의 활약상을 그렸다. 그리고 『신용불량자』는 우리나라 젊은 여류작가가 쓴 사실주의 소설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환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소설이었다. 그 묘사가 얼마나 적나라하고 부정적이었는지 신문의 서평에서 『신용불량자』를 쓴 여류작가는 자본주의를 볼 때는 한쪽 눈만으로 보고, 공산주의를 볼 때는 세 개의 눈으로 본다.’고 했다. 아무튼 현우와 지수가 도서관을 빠져나올 무렵엔 이미 어둠의 저녁만찬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현우 씨, 들어가서 우리 차 마셔요?”
    “그게 저…….”
    “왜요, 바쁘세요?”
    “조금요.”
    “얼굴 표정을 보니까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사실 내일부터 분당에 있는 백화점에서 세일을 하거든요. 그래서 오늘밤 안으로 전국의 백화점 창고에 있는 재고목록을 파악해서 의류를 분당으로 이동시켜야 해요.”
    “가만, 현우 씨는 감사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세일기간에는 부서에 관계없이 지원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밤 도와주기로 약속을 했군요. 제 말 맞죠?”
    “예, 그래요.”
    “그럼 저 때문에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아요. 어차피 백화점 영업이 끝나는 10시 이후에나 작

    업을 하거든요.”
    “휴~우! 다행이다. 그럼 더 이상 붙잡지는 않을게요. 현우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도 그랬어요. 그럼 좋은 꿈꾸세요.”


    우리의 신체에서 웃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은 단 두 곳이다. 바로 눈과 입이다. 그래서 눈과 입은 감정 전달의 도구로 쓰인다. 입이 직접적이라면 눈은 그보다 간접적이다. 아무튼 지수는 눈과 입으로 자신의 감정을 사랑스럽게 표현했다. 그런데 그때 지수가 양손을 현우의 등 뒤로 돌려 잽싸게 책을 맞잡았다. 그러자 현우는 가냘프게 떨리는 긴 속눈썹 아래로 달빛을 향해 솟아오른 지수의 코끝과 마주했다. 순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지수의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그 심장소리는 현실이 아닌 꿈과 환상을 부르는 주문 같았다.

    “지수 씨, 저도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정말요?”
    “예.”
    “우리 다음엔 어디서 만날까요?”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예, 있어요.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그런데 현우 씨가…….”
    “거기가 어딘데요. 제가 꼭 데려갈게요.”
    “정말요?”
    “예, 제가 약속할게요.”
    “현우 씨가 사는 집요.”
    “!”
    잠시 후 지수는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플레어스커트처럼 펼쳐진 가로등 불빛 한 자락이 하녀처럼 따랐다. 테라스로 뛰어나온 지수는 역광으로 찍은 사진처럼 환상 속에 있었다. 현우는 한껏 달아오른 마음을 상쾌한 밤공기로 식히며 애써 발걸음을 돌렸다.


    아침 8시경. 호텔 주변은 온통 어둡고 무거운 색채뿐이었다. 바다도 시커멓게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해일이 정원의 침대에 몰아쳤다. 재국이었다. 정원은 전화를 끊자마자 황급히 옷을 찾아 걸치고는 유진의 방을 두드렸다. 그리곤 현관에서 유진을 기다렸다. 유진이 허겁지겁 뛰어나오자마자 정원은 있는 힘껏 엑셀을 밟았다.

    “이제 어쩌죠, 팀장님?”

    “우선 변사 (變死)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건개요부터 파악해야지. 그런 다음 현장 주변을 조사하고 시신에 나타난 법의학적 시체현상 (屍體現象)을 보고 사인(死因)도 밝혀내고.”

    “만약 자살이나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면 어쩌죠?”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의 동선을 읽고 있다는 소리겠지.”
    “…….”
    호텔에서 출발한 지 30여 분 지났을 무렵 서귀포자연휴양림이 나왔다. 15분 정도 더 달리자 한라산 영실주차장이 나왔다. 정원과 유진은 영실 존자암의 진입로를 따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두 사람은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정원과 유진은 종무소 바로 앞 약수로 겨우 갈증을 다독였다. 그리고 서둘러 산문에 들어섰다.

    “저, 서울에서 오셨죠?”
    “아, 예.”
    “저는 제주지방경찰청 강력반 반장 신지욱입니다.”



    “수사과 유상준(최정원의 가명)입니다. 검안(檢案)은 끝났습니까?”

    “예. 피살자의 사체는 지금 막 부검을 위해 헬기로 저희 지역 국과수 서부분소로 이송했습니다.”

    “사체의 최초 발견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본청에서 지금 조서를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최초 발견시간은 언제입니까?”

    “아침 7시경입니다. 그리고 사체 발견장소는 여기에서 영실계곡 쪽으로 한 50m쯤 더 올라간 계곡입니다. 평소 일반인들의 왕래가 거의 없고, 약초꾼들이 자주 찾던 곳입니다.”

    각진 얼굴과 왠지 매서운 눈매,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키, 거기에 굵은 목과 다부진 체형까지 신 반장은 정말 인상과 직업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정원과 유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조릿대가 무성한 숲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기 조릿대 군락 바로 옆의 큰 바위 아래가 사체 발견장소입니다.”

    “신 반장님, 법의관이 추정한 직접적인 사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피살자는 모두 세 발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한 발은 왼쪽 가슴에 맞았습니다. 하지만 심장의 대동맥과 왼쪽 폐를 간신히 비켜나 갔습니다.”

    “그렇다면 내부출혈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손상은 입지 않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발은 정확히 피살자의 미간을 관통 하여 탄흔을 남기고 후두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럼 마지막 한 발은요?”

    “좌측 관자엽으로 들어가 현재 탄자가 머리에 박혀 있는 상태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피살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총상에 의한 뇌출혈로 추정된
    다는 말씀이로군요.”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반장님!”

    “!”

    3D시뮬레이션 장비인 광대역 3차원 계측장비를 이용해 사건현장을 스캔하고 있던 여 검시관이었다. 신 반장이 다른 형사들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형사들이 현장수색을 하다 말고 검시관 주위로 몰려갔다. 정원과 유진은 거리가 있어 형사들의 대화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탄도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얻은 게 분명했다. 그 사이 정원과 유진은 신 반장이 건네준 현장사진을 다시금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상황을 재구성했다.

    “한 발은 정확히 심장에, 또 한 발은 미간을,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관자엽이라. 흠, 한 발 한 발이 모두 의미 있는 슈팅(사격)이야.”

    “팀장님 말씀이 맞았군요. 그런데 팀장님, 어느 것이 첫 번째 총알이고 어느 것이 마지막 총알이었을까요?”

    “글쎄.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모두 세 발이었는지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명중된 세 발이 발사된 총알의 전부라면 정황상 심장에 맞은 탄환이 첫 발이지 않을까?”

    “그럼 두 번째와 세 번째 탄환은 어떤 거죠?”

    “그 다음 두 번째 탄환은 관자엽에 맞은 것이고 마지막 탄환은 확인 사살을 위해 미간을 정확히 관통한 ‘온정의 일격(Mercy stroke)’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는 무슨 구체적인 이유라도?”

    “현장사진에 찍힌 탄흔 (彈痕)의 지름과 그 주위의 그을음, 그리고 주변에 떨어져 있는 혈흔 (血痕)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 즉 총상 주위의 흔적은 저격거리를 말하고 혈흔은 강 과장님의 이동경로와 속도를 말해주고 있지. 또한 죽음 직전의 불안한 심리상태까지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적어도 세 번째 피격을 당하기 전까지 강 과장님은 살아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추정컨대 뇌와 대동맥에 손상을 준 마지막 탄환이 치명적이었을 거
    야.”

    “그러면 최초의 피격장소 역시 이곳이 아니라 주변 다른 곳이라는
    의미가 되잖습니까?”

    “당연하지.”

    정원이 올려다본 거북바위는 소원을 빌면 꼭 들어줄 것 같은 신성함이 있었다. 그때 수색견의 목줄을 움켜쥔 경찰이 신 반장에게 또 무언가를 내밀었다. 순간 신 반장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표정이 사라지고 그 밑에서 단순한 표정이 나타났다. 확신이며 자신감이었다.

    “가만! 팀장님. 저건 스미스&웨슨 (Smith&Wesson)사의 구형 4인치짜리 38구경 6연발 리볼버(Revolver) 맞죠?”

    “응, 한때는 우리나라 경찰도 저걸 제식 권총으로 사용했었어.”

    잠시 후 신 반장이 정원과 유진을 향해 걸어 내려왔다. 신 반장은 뜬금없이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지었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투명한 지퍼팩을 불쑥 내밀었다. 신 반장의 눈빛은 행운이 따라주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했다. 정원은 한 손으로 신 반장에게 현장사진을 건네주며 다른 손으로 지퍼백을 건네받았다.

    “이것은 사건현장에서 수거된 피살자의 휴대전화입니다.”

    “특이사항이라도 있었나요?”

    “통화기록만 가지고 판단하면 이 휴대전화는 수신용으로만 사용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피살 추정시간을 전후해 일주일 사이에 피살자와 직접 통화한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단 한 명이라면 혹시?”

    “바로 ‘이시은’이라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여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반장님, 지금 ‘이시은’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실체를 밝혀내기만 하면…….”

    “어쩌죠, 그 문제의 이시은(서유진의 가명)이 바로 접니다.”

    “!”

    “저희는 피살자를 만나기 위해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어제 제주도에 왔습니다.”

    신 반장의 눈빛이 직선으로 날아오다 한순간 뚝하고 부러졌다. 마치 액체질소에 담근 장미의 줄기 같았다.

    정원의 시선은 10㎜ 이내의 초슬림형 두께 속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폴더형의 휴대전화는 구형이었다. 하지만 전체가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최고가 제품이었다. 유진은 범행에 사용된 권총을 넘겨 받아 꼼꼼히 살폈다. 마지막엔 실린더를 열어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검안의의 검안과 본서 검시관의 검시 결과만으로는 두개골에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져서 일어난 변형성 두부손상이 결정적인 사인으로 보입니다. 또한 외관상 확인 가능한 관통상으로 볼 때 범인이 사용한 탄두는.”

    “9㎜탄 아닌가요?”

    “맞습니다.”

    “팀장님, 역시나 실린더 밑의 일련번호까지 깨끗하게 지워버렸습니
    다.”

    “현재 실린더에 남아 있는 실탄의 수는?”

    “한 발입니다.”

    “그럼 피살자가 발사된 다섯 발 중 세 발을 맞았으니까 나머지 두 발
    은 타깃을 벗어났다는 소리군.”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피살자의 사체에 싸운 흔적이라던가 저항한 흔적 같은 건 없었습니까?”

    “방어 손상은 물론이고, 특별한 외상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망 추정시간은 나왔습니까?”

    “혈액침하(血液沈下·혈액침전)와 시반(屍斑·시체얼룩)이 얼굴, 가슴, 배, 팔다리에 걸쳐 온몸에 선홍색으로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저체온사로군. 게다가 사망 당시의 자세는 엎드려 있는 자세였고.”

    “검안 당시에 이미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지만 부패는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시체경직(屍體硬直·시체굳음)도 이미 손가락, 발가락에 출현하여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고 말입니다.”

    “현재 시간이 10시 30분. 그렇다면 사망 추정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시간 이내라는 소리군요.”

    “맞습니다.”

    “혹시 사찰의 스님들 중 어제 오후 총소리를 들었다는 분은 없었습니까?”

    “평소 수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가끔 사이비종교인들이 근처에서 폭죽을 터트렸답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의 소란도 그런 사이비종교인들의 행패로 생각했겠군요?”

    “맞습니다.”

    “그게 정확히 언젭니까?”

    “방금 말씀드린 피살 추정시간과 거의 일치합니다.”

    정원은 더 이상 신 반장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유진이 건네준 권총을 범죄학 지식과 과학수사기법을 총동원하여 찬찬히 살펴볼 뿐이었다.
    잠시 후 정원은 재킷의 안주머니 속에서 볼펜처럼 생긴 것을 꺼냈다. 빨간색 빛이 나오는 레이저포인터였다. 그리곤 사체가 발견된 장소로 걸어갔다. 이어 정원은 일정한 방향으로 레이저 빛을 쏘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수기라 탑승권 구입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 여객기가 활주로를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런데 하늘을 날아올라 랜딩기어를 접자 마자 빗줄기가 창문에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하늘에선 번개로 인한 강한 빛줄기가 번쩍거렸다.

    “팀장님. 아까 신 반장님에게 총기와 실탄에 대해 왜 좀 더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국과수의 총기연구실에서 아쿨레이드나 진공금속 지문채취기 (VMD·
    Vacuum Metal Deposition) 를 사용하더라도 지문을 채취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럼 탄환의 DNA분석은 어떤가요?”

    “그것 역시도 가능성이 제로야. 거기다 권총과 실탄의 구입 경로에 대한 수사는 수사력의 낭비만 초래할 뿐이고.”

    “하지만 권총탄이 6열짜리 국내산인지 5열짜리 외국산인지는 알 수 있잖아요?”

    “글세, 그게 가능할까?”

    “왜 힘들죠?”

    “유진 씨, 이게 뭔지 알아?”

    “가만! 이건 탄두 아니에요?”

    “맞아. 탄두의 크기로 볼 때 지름 9㎜, 길이 15㎜로 추정되는 틀림없
    는 권총탄이야.”

    “그런데 이걸 어디서?”

    “사건현장에서 발견한 탄두야. 더 정확히는 나무에 박혀 있던 것이고.”

    “그렇다면 이 탄두가 강 과장님을 피격하지 못한 탄환 중 하나군요.”

    “틀림없어.”

    “그런데 이건 인체에 치명상을 입히는 할로우 포인트탄 아닌가요?”

    “맞아.”

    흔히 영국하면 ‘신사의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영국에서 지극히 비인간적인 할로우 포인트탄을 만들었다. 할로우 포인트탄은 인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냄과 동시에 심각한 불구로 만드는 잔인성을 갖고 있다.

    “결국 처음부터 원샷 원킬할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할로우 포인트탄을 직접 제작했다면 킬러 스스로가 프로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고.”

    “직접 만들었다고요?”

    “탄두의 표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봐. 분명 최고의 전문가가 수작업으로 제작한 거야.”

    “세상에, 정말이네!”

    “그리고 권총의 일련번호에 대해 말해줄 게 있어.”

    “산업용 레이저로 깨끗하게 지워버려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이 불
    가능하던데요.”

    “확인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그럼 권총도 정교하게 만든 사제 총기였다는 말씀이세요?”

    “물론이지. 총기는 표면에 저마다 사람의 지문이나 치흔 같은 아주 미세한 고유무늬가 있어. 그런데 범행현장에서 수거된 권총엔 내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특이한 무늬가 있었어.”

    “팀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왠지 조금은 허탈한데요.”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암살자가 우리에게 또렷이 각인시켜 준 사실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뭐죠?”
    “그건 자신이 가진 뛰어난 솜씨보다 더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
    “아! 알겠다. 범행현장에 총기를 버렸다는 사실 때문이죠?”
    “마치 자신을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란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둔 거야.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고나 할까. 그런데 정작 그 킬러가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점은 다른 곳에 있었어.”
    “그게 뭔데요. 팀장님?”
    “휴대전화의 측면에 남은 납심의 탄흔이야.”
    “그것은 용의자가 강 과장님을 근거리에서 피격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요?”

    “맞아. 적어도 강 과장님은 사건 당시 이미 용의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그리고 첫 번째 탄두는 가슴에 넣어둔 휴대전화에 먼저 맞고 피탄된 것이고.”

    “팀장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암살자는 우리 국정원의 내부 사정을 자
    기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우리와 한 공간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으으으, 이거 갑자기 소름이 돋는데요.”
    “아참! 유진 씨. 청도무역관에서 근무할 당시 강 과장님의 활동내역에 대해 조사된 것 좀 있어?”
    “강 과장님이 우리나라 업체들의 수출과 관련해 탁월한 상담 실적을 올린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20여 개 중소기업 수출지원 유관기관들을 총망라한 중국 내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김정일의 비밀 통치자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대중 정부 때 IMF사태에 따른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부당하게 해직된 안기부 직원들이 몇 명이나 되지?”

    “1998년 4월, 1차로 581명이 대량 재택근무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표를 내지 않은 직원들은 1999년 3월 말 직권면직됐습니다. 그러나 소규모의 해임처분은 좌파정권 내내 은밀히 계속됐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국내파트에서 활동했던 대공분야 전문가들이 정리대상이었습니다.”

    “그럼 해외파트인 강 과장님은?”

    “2002년 10월 1일자로 면직처리가 됐습니다.”

    “그 대상자에 강 과장님까지 포함되었다니, 너무 안타깝군.”

    “맞습니다. 처분이 지나치게 과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