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4> 사랑

    그 시각 현우는 열린 창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설익은 여름의 향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빛이 닿은 유리창도 섬세한 환영으로 숨이 막힐 듯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더없이 평온한 하루였다. 현우는 흡사 실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팀장님,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
    “저쪽에서 보니까 마치 교생선생님을 숨어서 짝사랑하는 여고생 같던데요?”
    “후후후, 그렇게 보였습니까?”
    “예,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있는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거든요.”
    “놀랍네요. 그런 게 정말 있다니.”
    “그런데 팀장님은 어떤 여성스타일을 좋아하세요?”
    “글쎄요, 딱히 정해진 여성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무척 궁금했었는데 팀장님이 여태 솔로이신 이유가 바로 그거였군요? 자기망상.”
    “자기망상요!”
    “예, 립서비스를 하면 순진하신 거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복잡하시네요. 세상에 운명적인 만남이 어디 있어요. 패턴조각을 이어 붙이듯 운명을 가장한 필연이라면 또 모를까요. 안 그래요, 팀장님?”
    “그런가요?”
    “요즘은 클럽이나 채팅으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하는 것은 눈길도 안 줘요. 심지어 느낌만 좋다면 온라인 쇼핑몰에서 신랑을 구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는 걸요. 디자이너별로 구분되어 있는 의상과 잡화처럼 매끈한 레이아웃에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이미지를 보면서 말이에요.”
    “손비아 씨는 그게 가능해요? 사랑이 눈에 보이나요?”
    “당연히 안 보이죠. 그러니까 보다 실패확률이 적은 현실적인 조건을 택하는 거겠죠. 그리고 더 낳은 조건을 위해 스펙도 만들고요. 아무튼 전 언젠가 꼭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온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 같은 여성이 될 거예요.”
    “…….”
    “메릴 스트립(Mary Louise Streep)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훗! 꼭 저희 실장님 같지 않으세요?”
    “실장님의 분위기가 약간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화려한 패션계의 거물. 그녀의 삶 자체가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살길 바라는 화려함의 끝이잖아요.”

    손비아가 진정 원하는 건 순수한 영혼이 아니라 지방시·카발리·미우치아 프라다·루이비통·맥퀸 같은 명품브랜드였다. 하지만 현우의 기억이 맞는다면 영화 속 미란다는 세상에 드러난 성공을 위해 모든 걸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미란다의 실체를 앤드리아가 본다. 마침내 주인공 앤드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겉으로 드러난 ‘허상’을 결단력 있게 포기한다. 물론 그런 앤드리아의 아름다운 선택을 정신적으로 지지해준 사람이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미란다 프레슬리다. 손비아의 눈은 그런 미란다의 숨겨진 진실보다 CF광고 같은 미란다의 ‘비주얼’만 쫓았다.

    “저, 팀장님. ! 저희 실장님이 팀장님과 전속계약하고 싶으신 모양이던데요?”
    “또 말입니까?”
    “예.”
    “…….”
    “피팅모델이 그렇게 부담스러우세요?”
    “조금요.”
    “어머, 정말이신가 보네. 그럼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예.”
    “팀장님에 준하는 105사이즈 스탠더드를 직접 한 명 구하세요. 물론 저희 회사 콘셉트하고 맞아떨어지면 더할 나위 없는 금상첨화고요. 하지만 회사 내에서 찾는 건 포기하세요.”
    “그건 왜죠?”
    “저희 디자인실에서 이미 인사과의 자료를 가져다가 기본적으로 외모가 되는 직원은 모두 사전조사를 끝냈거든요.”
    “…….”
    “참고로, 이건 제가 보던 이태리패션잡지인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 놓고 갈게요. 그럼, 파이팅!”


    쪽빛바다가 끝날 즈음 태양의 문이 나왔다. 태양의 문에 들어서자 여인의 치마폭을 닮은 한라산이 제주를 품고 있었다. 하늘에서 본 제주는 마치 그림문자 같았다. 파란 하늘을 여과지처럼 통과한 맑은 햇살은 그 그림문자를 읽는 유일한 돋보기였다. 신화와 전설로 얽힌 제주는 그렇게 숨 막히는 광경으로 정원과 유진을 맞았다.
    공항을 빠져나온 정원과 유진은 맨 먼저 파란색 컨버터블(Convertible)을 대여했다. 그리곤 서둘러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다.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제주공항에서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난 1135번 도로를 따라 곧장 남쪽으로 달렸다.

    “팀장님, 정말 너무하세요.”
    “왜 또 유진 씨?”
    “이건 섬여행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모독! 내가?”
    “여기까지 와서 내륙의 국도를 달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풍광이 보고 싶다 그 말이로군?”
    “당근이죠.”
    “그럼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야 하잖아. 유진 씨도 들었지? 이 길이 지름길이라는 말. 숙녀분이 직접 추천까지 했잖아.”
    “누가 지름길인 걸 몰라요. 전 다만…….”
    “다만 뭔데?”
    “사실 업무가 아니면 평일에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기왕 온 김에 바다와 숲이 있는 올레길을 걸으며 세상의 발톱에 긁힌 마음을 치료하자는 소리죠.”
    “거기다가 자연의 힘과 장엄함을 느끼며 절벽 끝에서 전설과 신화도 가슴에 담아가고?”
    “! 맞아요, 팀장님. 그래야 제주도에 온 보람도 있지 않을까요?”
    “유진 씨, 여기 놀러왔구나? 아니지. 놀러왔네!”
    “팀장님, 이건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휴식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좋아! 내가 오늘 하루는 눈 감아줄게. 그러니까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실컷 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먹어. 일은 나 혼자 처리해도 충분하니까. 됐지?”
    “저 혼자서요?”
    “그럼?”
    “헐~! 차라리 딴생각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저 혼자 무슨 재미로 놀아요. 남들은 다 커플티에 쌍쌍이 팔짱 끼고 돌아다니는데. 피~!”
    “그래도 내륙에선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광이 제주엔 아주 많잖아. 드넓은 초원과 선이 아름다운 오름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바람처럼 질주하는 제주말. 저기, 저쪽 봐봐. 한라산도 보이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전 시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혼자 고독을 즐기며 자연을 포옹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네요. 아! 좋다.”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유진은 이미 깊고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사실 유진은 165cm의 키에 군살 하나 없는 8등신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특수훈련을 받아 다른 여자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터프한 섹시함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진을 돋보이게 하는 건 뛰어난 외모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간혹 놀라거나 즐거울 때만 그 실체를 겨우 보여주는 설산의 호수 같은 맑은 눈이었다. 아무튼 유진의 눈은 호기심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에메랄드빛 호수였다. 유진은 목뒤로 돌아간 꽃모양 펜던트를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햇빛의 궤적이 그녀를 살짝 비켜갔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산방산까지 약 20분 정도만 더 가면 될 것 같아요.”
    “유진 씨, 그런데 어떻게 찾아냈어?”
    “헛수고하는 셈치고 명예 퇴직자 명단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그 시기에 특별한 귀책사유도 없이 강제퇴직을 당한 요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이상해 추가조사를 해봤죠.”
    “당시 임무와 직위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청도(靑島)무역관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해파(해외파견)요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정원 직위는 과장급이었습니다.”
    “파악된 강제퇴직 사유는?”
    “그게 말이죠. 꼬리를 자른 도마뱀처럼 강제퇴직을 당한 사유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아, 일단 그 전직 요원부터 만나보자고. 만나면 모든 궁금증이 풀리겠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정원과 유진이 탄 차량의 바퀴가 민첩하게 진행 방향을 바꿨다. 동시에 계기판의 컴퓨터가 요동치며 분당 회전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정원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채 넓은 타이어의 회전력만으로 빠르게 모퉁이를 돌았다. 차는 경주용 자동차처럼 순식간에 들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작은 오름이 보이자 다시 한차례 거친 코너링을 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차는 가속도가 붙은 치타처럼 똑바로 달려 이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얼마 후 산방산을 지나친 정원은 다시 한 번 사계해안도로 쪽으로 진행 방향을 바꾸어 서서히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왜곡되었던 시공간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왔다.

    “와! 바다다. 팀장님, 저 고운 에메랄드빛 좀 보세요?”
    “여기가 바로 용머리해안인가?”
    “지명 그대로 정말 용머리 같네! 팀장님, 마치 용의 등에 올라타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그나저나 난 태어나서 제주도에 심마니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어.”
    “어머, 저 밑에 목장도 있어요. 흰 제주마다! 흰말은 행운을 상징한다고 하던데. 오늘 내게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그 사람 집이 여기서 가깝다고 그랬지?”
    “팀장님. 우리가 마치 동화 속 세상에 온 것 같지 않아요?”
    “…….”
    “어머, 쟤가 이리로 걸어오네. 너무 귀엽다. 마치 말과 돼지를 한데 합쳐놓은 걸음걸이네. 오동통한 게. 호호호.”
    “유진 씨!”
    “어머! 깜짝이야.”
    “일 안 할 거야?”
    “…….”

    인간은 바다에 서면 깨달음을 얻는다. 두 눈이 활짝 열리면 산색과 물빛이 바로 본래의 마음이라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진의 영혼은 저 멀리 보이는 용머리해안의 짙푸른 바다에 있었다. 다시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차는 목장 사이로 난 편도 일차선의 굽은 길을 따라 해안가로 곧장 거꾸로 처박히듯 내려갔다. 도착한 해안가 마을은 관광안내 책자에 표시된 그대로 산중의 암자처럼 조용했다. 심지어 비릿한 바다냄새로 둘러싸인 작은 어촌마을에는 용신의 서기(瑞氣)가 어린 듯 신비감까지 감돌았다. 선착장엔 죽은 고래처럼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녹슨 관광잠수정도 있었는데, 그것이 한낮의 고요처럼 어촌의 평화를 말했다.

    정원과 유진은 지역을 나눠 전직 해파요원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사람은 죄다 잡고 물었다. 그러기를 반시간여. 정원은 생각을 바꾸어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오른 좁은 골목길에서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렀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찾아낸 집은 파란 양철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 특유의 한옥이었다. 담은 넘겨다볼 수 있을 만큼 낮았다. 그리고 마당의 한쪽 구석에는 헤어진 어구(漁具)도 버려져 있었다. 벽에는 암초에 붙어 있는 전복을 떼어내는 빗창도 걸려 있었다. 마루 위에는 해녀들이 물질로 잡은 전복이나 소라 등을 담고, 힘들 땐 그것에 의지해 잠시 쉬는 태왁까지 걸려 있었다.

    “유진 씨, 이쪽이야!”
    “찾으셨어요?”
    “그런데 대문도 닫혀 있고 불러도 인기척이 전혀 없어.”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히 미리 전화를 드렸는데요.”
    “저, 왜 그러시는데요?”
    “아! 아주머니. 저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요?”
    “예. 혹시 이 집에 사시는 분 성함이 강치환 씨 맞나요?”
    “강 씨는 맞아요.”
    “지금 댁에 안 계신가요?”
    “강 씨가 산삼도 캐고, 최근엔 초기(草氣)밭까지 시작해서 집엔 거의 없어요.”
    “초기밭요?”
    “아참! 육지 사람들은 잘 모르지. 표고버섯 재배지를 여기서는 초기밭이라고 불러요.”
    “아! 표고버섯 재배지요. 그럼 강치환 씨가 직접 표고버섯 재배농장을 하시나요?”
    “한라산 고지대 초기밭은 완전 무공해라 없어서 못 팔아요.”
    “유진 씨, 아까 직접 통화했었다며?”
    “그게 저……. 휴대전화로 통화를 했거든요. 그래서 전 집에 계신 줄 알고.”
    “직업이 심마니에 표고버섯 재배라…….”
    “거기까진 저도 미처 예상을……. 지금 바로 다시 전화통화를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전화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용머리해안가의 바위 위에 섰다.
    확인 결과 초기밭은 현재 한라산의 700~900m 고지대에 50여 개가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강치환이 소유했다는 초기밭은 아예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초기밭을 임대했거나 아니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소규모임이 분명했다. 하여간 정원은 유진으로부터 강치환이 산삼을 찾아 한라산을 헤매는 심마니라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그때는 그 사실을 무심하게 흘려버렸다. 그렇다고 그냥 서울로 돌아가자니 이만한 사람을 다시 찾아낼 가능성도 희박했다.

    “오늘 제게 실망 많이 하셨죠. 팀장님?”
    “…….”
    “제가 좀 더 침착했어야 했는데 다음부턴 절대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
    “팀장님, 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화가 나시면 제게 화를 내셔도 됩니다.”
    “유진 씨,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제가 한 실수 때문에 아까운 시간과 경비만 날렸으니까요.”
    “실수?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나도 하고 재국 씨도 하고. 어쩌면 진짜 실수는 강 과장님과 정확한 약속을 못한 게 아니야.”
    “그럼요? 제가 저지른 실수가 또 있나요?”
    “물론이지. 그것은 작은 실수 때문에 팀원의 눈치를 살피는 유진 씨의 지금 행동이 아닐까? 눈치를 살피게 되면 그 순간 팀워크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거든.”
    “!”
    “아직 제주도에서의 업무가 끝난 게 아니야. 그리고 이런 일이야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유진 씨는 실수한 게 없는 거고. 따라서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안 그래?”
    “…….”
    “더구나 나는 팀장이야. 유진 씨는 팀장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해?”
    “그건 팀원들의 숨은 능력이나 참신한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것 아닌가요?”
    “유진 씨의 말처럼 결과론적으로는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겠지.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어. 바로 팀원들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올바로 인지하는 거야. 그런 다음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팀장이 팀원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해.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할 수도 있지. 그러면 팀장은 충고가 아닌 너그러운 마음으로 팀원을 보듬어주는 거야. 그러니까 유진 씨가 자꾸 미안해하면 그것은 팀장인 내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밖에 달리 판단할 수가 없어.”
    “팀~장~님.”

    유진은 헤로도토스가 말한 바로 그 신화 속의 여전사였다. 그래서 국정원 내에서 유진의 별명도 ‘독거미’였다. 그렇다고 유진이 여군의 최정예라 부르는 수도방위사령부 35특공대대 특임(특수임무)중대 출신은 아니었다. 유진은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최정예 인력으로 구성된 특수전 사령부 대테러 정예부대인 707대대, 일명 백호부대 중사 출신이었다. 그런 강인한 유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나마 매니쉬한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정원은 정면만 똑바로 보면서 차를 몰았다. 길가를 따라 노랗게 핀 유채꽃밭으로 시선을 돌린 유진도 그 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빵! 빵! 빵!”
    “팀장님, 왜요? 어디서 사고 났어요?”
    “아니?”
    “그럼요?”
    “유진 씨, 이쪽을 한 번 봐봐.”
    “그쪽은 왜요?”
    “그냥 한 번 봐봐. 뭐가 있나.”
    “저기는 호텔 아니에요? 그것도 최고급 호텔인데요.”
    “맞아.”
    “저희한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죠.”
    “그렇다고 미리부터 포기할 이유는 없겠지. 안 그래?”

    컨버터블이 호텔 현관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호텔은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정원은 몇 년 전 외국원수의 경호문제로 청와대 경호팀과 함께 이곳에 머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을 맞이한 호텔 현관은 신비한 고대도시 페트라(Petra)의 신전 입구 같았다. 현관은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대리석 문틀이 양쪽 측면으로부터 빛을 잡아주어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거기다 자동문은 여러 가지 빛깔의 색유리를 이용하여 모자이크로 구성했다. 곧이어 차가운 직선과 따뜻한 곡선의 유기적인 조화로 만들어진 3차원의 입체공간이 아름다운 꿈처럼 나타났다.

    “와! 꿈같다.”
    작든 크든 꿈이 이루어지면 환상적이다. 유진은 보이는 게 모두 동화 같았다. 그야말로 꿈과 현실이 하나였다.
    유진이 환상 속을 거닐고 있는 사이 정원은 프런트 담당자로부터 룸 카드키를 받았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어색하게 유진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로비를 가로질러 멈춰선 곳은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정원은 정중하게 유진을 엘리베이터에 먼저 태웠다. 그리곤 객실 층의 버튼을 눌렀다. 유진은 낯설음과 흥분이 뒤섞여 그저 상황에 이끌려갈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유진의 인식체계가 정전된 것처럼 작동을 멈추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을 때 정작 정원은 유진과 한 공간에 없었다. 유진만 남겨두고 정원이 손 안의 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홀로 룸에 남겨진 유진은 겨울을 마중하러 나온 나무 같았다. 유진의 마음은 거칠고 메마른 세계였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불에 타 재가 됐다. 쪽빛이던 하늘도 태양이 마지막까지 숨겨둔 빛항아리가 깨져 온통 붉었다. 유진의 객실은 복도 끝에 있어 전망이 좋았다. 그래서 더 외롭고 잔인했다. 사실 그 방은 정원이 프런트 담당자에게 애원하다시피 해서 간신히 얻어낸 방이었다.
    발코니 쪽에서 비릿한 바다냄새가 왈칵 밀려왔다. 마치 바다가 건네는 위로 같았다. 유진의 눈가가 습기로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습기를 말리려는 듯 들고 있던 것을 입 안에 쏟아부었다. 미니바에서 꺼내온 캔맥주였다.

    “똑! 똑! 똑!”

    여자들은 사랑을 하고, 또 연인에게서 사랑을 받고,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는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 사실 유진은 정원의 작은 친절에도 핑크빛 하트가 마구 만들어졌다. 그리곤 자신이 분류한 상상등급에서 정원을 최상급에 올려놨다. 잔인한 현실이지만 이제 유진은 자신의 일방통행을 인정해야 했다.

    “누구세요?”
    “나 말고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
    “팀장님이세요?”
    “응. 유진 씨, 배 안 고파?”
    “저는 그냥 그런데요. 팀장님 혼자 드시면 안 돼요?”
    “유진 씨, 문 좀 잠깐 열어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지금 제 꼴이 말이 아닌데요.”
    “중요한 일이야. 탑 시크릿이야!”
    “탑 시크릿이요?”
    “그래, 본사에서 방금 연락받았어. 유진 씨는 연락 못 받았어?”
    “아니요, 전 받은 게 없는데요.”
    “그래? 난 시내에서 일보다가 연락받고 급히 달려오는 길인데.”
    “혹시 전 열람할 수 없는 보안등급이라서 그런 건 아닌가요?”

    탑 시크릿 또는 극비. 숨을 턱턱 막는 이런 종류의 단어들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있어 아드레날린을 마구 솟구치게 하는 촉매제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몰아붙이면 기폭장치다. 그리고 불규칙한 교감신경의 흥분과 혈압의 상승 때문에 중독성도 매우 강했다. 유진은 헝클어진 옷매무새의 정리도 잊은 채 화약이 폭발하듯 객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극비사항이라며 다급함을 호소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정원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게다가 한쪽 손으로 문틀을 붙잡고 있는 모습은 얼음을 한 주먹 집어 먹은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차라리 해맑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마치 개구쟁이 꼬마가 거짓말을 하고 엄마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표정 같았다.

    “팀장님, 저 정말 저녁식사는 생각이 없어요.”
    “진짜?”
    “예.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혹시 나 없다고 혼자서 술 마신 거 아니야?”
    “그게 저…….”
    “흠! 귓불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아 틀림없군.”
    “딱! 맥주 한 캔 마셨어요.”
    “좋아! 못 본 것으로 할게. 대신 이걸 꼭 받아줘야 해.”
    “이게 뭔데요?”
    “나도 몰라. 그러니까 유진 씨가 풀어보고 나한테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가르쳐 줘.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도 설명하고. 식사는 그 다음에 천천히 결정해도 돼. 이제 됐지?”
    “혹시 제게 주시는 선물인가요?”
    “마음에 들면 선물이고 아니면 부담이겠지. 그럼 나는 1층 커피숍에서 기다릴게.”
    “…….”

    정원이 커피 한 잔을 다 마시도록 유진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제 커피숍엔 상품광고로 도배된 여성잡지 외에 더 이상 볼거리도 없었다. 정원은 다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잠시 후, 커피를 가져오던 웨이트리스가 갑자기 시선을 출입구로 옮겼다. 웨이트리스는 무엇을 보았는지 오던 걸음을 멈추고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어 주변에 흩어져 있던 눈빛들도 일제히 동전만큼 벌어진 웨이트리스의 눈과 입으로 빨려들었다. 정원도 그 웨이트리스의 시선을 무심히 따라갔다.
    “!”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정원의 의식은 한 줌 재로 변하며 숨 쉬는 것을 잊고 말았다.
    유진이 세상을 사로잡은 것이다. 평소 유진의 모습은 도발적이거나 관능적인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렇다고 남자 같은 매니시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보이시한 느낌의 미소년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우아함과 섹시함으로 밤을 지배하는 붉은 도시의 공주 같았다.
    사실 유진에게 선물한 드레스는 의류매장 여점원이 강력하게 추천한 상품이었다. 하지만 드레스가 유진을 이처럼 상반된 이미지로 바꿔놓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거기에 단지 은빛 이어링만 하고 있을 뿐인데도 유진은 신부처럼 순수하고 투명했다.
    “팀장님, 저 이상하죠?”
    “응, 그것도 아주 많이. 규정대로라면 아마도 유진 씨는 대기발령이 아니라…….”
    “아니라, 뭐죠?”
    “지금 당장 파면이야. 그것도 회복불능상태로 영원히.”
    “훗! 제가 그만큼 예쁘다는 소리죠?”
    “물론이지. 나는 잡지에서 걸어 나온 패셔니스타인 줄 알았어.”
    “정말요?”
    “응.”
    “고맙습니다, 팀장님.”
    “불편하지 않아? 저녁식사는 할 수 있겠어?”
    “훗! 당연하죠. 저도 여잔데요.”
    “좋아! 그럼, 이제 아름다운 숙녀분을 어디로 모실까? 이런 아름다운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아무 데서나 식사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훗! 팀장님, 뭐 드실래요. 저녁은 제가 쏠게요.”
    “오케이!”

    유진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반전시킨 이브닝드레스는 전체가 화려한 스팽글과 크리스털로 장식됐다. 하지만 유진의 화사한 눈웃음보다 아름다운 광채가 나지는 않았다. 그녀의 짙고 푸른 눈동자엔 신기하게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이 모두 들어 있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물에 비친 단풍처럼 곱게 비추는 무색이었다. 거기다 유진의 입가에서 샘솟은 미소는 타들어 가는 붉은 노을처럼 더욱 그 향기를 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