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Kg 가량 쇠망치 들고 험준한 산을 호랑이 처럼 날라다녔다니...
  • 오랫동안 장준하 선생을 스승으로 따르던 김용환씨(당시 윤리교사. 나중에 교감으로 퇴직함)는 ‘운명의 그 날’ 수 십 명이 함께 등산 가는 호림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대절 버스에 올라탔다. 1975년 8월 17일 일요일이었다. 40 명 가까운 사람들이 빼곡이 대절버스를 탔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도는 날씨.

  • 말이 등산이지 모두들  시원하게 소리내는 맑은 계곡 물 옆에서 노는, '계곡파'가 되기 원했다. 그러나 밥 지을 사람만 빼고 다들 산행에 나섰다. 김용환은 꾸무럭거리다 그만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앞선 사람들이 갔다고 하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따라 올랐지만 일행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저 앞에 장선생이 앳되 보이는 사병 두 명과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했다. 장선생 혼자 뿐이었다. 장선생과 함께 산행을 했다. 장선생은 문득 "빠른 길로 내려가야 돼. 이쪽으로 가지!"라라고 말했다.

    아뿔사. 그 길은 나중에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이어졌다. 요즘은 이를 암능(Ridge)이라 부른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바위 사이에 난 좁은 길과 나무를 잡아가면서 오르내리는 곳. (서울 중심가에서 제일 가까운 '아찔한' 암능은 북한산 보현봉 직벽, 탕춘대 직벽이 꼽힌다).

    김용환은 장선생님께 "이리로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다, 길이 있네.  절벽으로 보이지만 실은  여러 길이 있네. 바위틈 사이 사이의 좁은 길과 나무를 이용해서 내려가면 되네"라고 말했다.

    김용환은 정신없이 내려갔다. 어느 만큼 내려 왔을까...뒤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장선생은 고운 모래가 있는 부분에 누워있었다. 호흡하는 소리가 났다. 김용환은 장선생을 살피다 정신없이 뛰었다. 처음에 출발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서.

    김용환은 울며 불며 뛰어 내려와 일행에게 알렸다. 그리고 상황을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의문사’에 연관된 ‘의문의 사람’으로 낙인 찍힌 채 살았다. "김용환이 절벽에서 장준하를 밀어서 추락사시켰다"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졸지에 '떠밀기 추락사' 암살범'이라는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연좌제로 교사 취직이 안 되던 사람이 갑자기 정교사로 발령났다"고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당진, 서산은 교사가 태부족이어서 취직되는 게 당연했다)

    DJ, 노무현때는 철저하게 조사받았고 일가 피붙이까지 샅샅이 '센터' 당했다.

    이제 37년이 지나 전혀 엉뚱한 음모론이 튀어나왔다.

    추락(실족이든, 떠밀었든)이 아니라 ‘흉기 타살’이란다. 마침내 '떠밀기 추락사'라는 원시적 방법을 사용한 암살범이 아니라, '흉기 타살'이라는 첨단 방법을 사용한 암살범 누명을 쓰게 된 셈이다.

    머리 뒤통수에 생긴 지름 60밀리미터의 원형 골절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윤성이란 엉터리 법의학자가 이 의문을 처음 암시했다. 애매한 이야기로.

     “추락 충격인지 흉기 충격인지 모르겠다.” 

    이리하여 퇴직교감 김용환 할배는 '신이 점지한 노가다'가 되었다.

  • 지름 60mm가 되는 원형 골절이 생기도록 (그것도 원 내부에는 전혀 금이 가지 않도록) 만들수 있는 대형 흉기를 품속에 넣고...산을 타고...산 속에서 장준하 선생을 제압하고...정조준해서 내리치고.....(기막힌 연기실력을 발휘해서) 울며불며 슬퍼하는 척 연기할 수 있는 초인적 범죄자가 되었다...라는 '슬프고도 웃기는' 이야기.

    음모론을 위해서라면 퇴직교감 할배 하나쯤의 인권은 지렁이처럼 밟아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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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칼럼] 망치에 관한 관찰

    ※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을 퍼왔다. <편집자 주>

     

    (장준하선생님 뒤통수의 직경 60mm 정도의 정말 동그란 원형 골절을, 망치로 쳐서 만들려면,
    대략 직경 80mm 정도로 쳐야 한다
    ■ 그런데 시중의 제일 큰 오함마 라고 하더라도 대충 직경 55mm에 무게 8~10킬로 정도 된다
    ■ 그러므로 직경 80mm 되려면 무게 20킬로 가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했더니 트윗 사용자 @sd0113님이 "닝기리(=니미), 무게 3킬로에 직경 60mm가 정말 없냐? 너, 여러 망치로 맞아 볼래?"라고 하셔서....망치에 관한 쿨한 고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망치 대가리의 무게와 직경은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다.

    아래 사진은 무게 2킬로짜리인데 직경 40mm이다.

  • 그런데 무게 (줄여서) 8킬로짜리는 직경 55mm 이다.

    즉 직경이 불과 1.4배 정도 늘어도 무게는 무려 4배가 된다. 이는 망치 대가리의 길이 역시  늘기 때문이다.

    직경이 1.4배 늘면 단면적이 1.4*1.4=1.96 약 2배 는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길이도 2배 는다.
    그리하여 전체 부피는 4배 는다.
    비중이 같으므로, 부피가 4배가 되면 무게가 4배 된다.

    이와 같은 법칙을 55mm에서 80mm로 확대되는 경우에 적용하면,

    망치대가리의 단면적은 1.5*1.5=2.25 배 증가
    망치대가리의 길이는, 위 법칙을 적용하면 역시 2.25배 증가
    망치대가리의 부피/무게는 2.25*2.25=5 배
    즉 직경 80mm 망치의 무게는 약 40킬로그램.

    이와 같은 법칙을 55mm에서 66mm로 확대되는 경우에 적용하면,

    단면적 1.2*1.2=1.44
    길이 1.44부피/무게=1.44*1.44=2.07배
    직경 66mm 망치의 무게는 약 17kg

    등산하면서 이런 망치를 들고 가서 장준하 선생의 머리를 고정시켜 놓고 정확하게 원형으로 찍히도록 가격하려면, 이는 [신이 내린 노가다]입니다.

    참고로 철물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주먹망치 (오함마가 아님)의 무게는 2Kg.
    망치 대가리 직경은, 위에서 말한 것 처럼 40mm.
    망치 대가리의 길이는 113m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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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하드웨어 작업을 좋아해서 별 장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측정 장비는 집에 있는 저울과, (사진에 보이는) 캘리퍼스를 사용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보유/운영하는 장비를 말씀드리오니, 혹시 노가다 부르실 일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일당이 무쟈게 비쌉니다. 일도 제 맘대로 개기면서 합니다.^^)

    - 콤프레서, 타커, 그라인더, 전기톱, 전기 직소, 전원 연결식 핸드 드릴, 전지 충전식 핸드 드릴, 타커.... (조만간에 용접기도 하나 사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www.facebook.com/bangmo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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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다음은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舊 민주당(1993년)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 보고서」-  김용환씨 증언 녹취요약 1] 전문이다.

     

    ㅇ일   시 : 1993년 4월 17일 오후 6시
    ㅇ장   소 : 구의동 민주당 성동(병)지구당 위원장실
    ㅇ면담자 : 강수림 의원

    1967년 7대 국회 때 장준하선생이 신민당후보로 동대문(을)구에 출마하였을 때 청량리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思想界』를 통해 알고 있던 장선생(지구당)을 찾아갔다. 그 전에는 장선생을 전혀 몰랐다. 김용덕씨(당시 상무위원장) 등과 선생님을 모시고 선거운동을 했다. 선전부라고 하여 선거운동시 연설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당선된 후 인간관계가 계속되고 지구당 운영에 관여했다. 상무위원의 직책을 맡고 그 후 총무와 지구당 간사를 겸임하면서 장선생을 여러 가지로 도왔다. 그 후 삼선개헌 등 정치적 격동기가 있었는데 장선생을 모시면서 일했다.

    1975년에 낙향했다. (고향은 당진) 당시에 지구당 일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선생은 청량리에서 제기동으로 이사해서 거주하고 있었다. 낙향한 후 기반도 잡아야 하고(당시 아버님은 병환중이었음) 생계문제도 있어서 당진중학교 강사로 취직했다.

    낙향한 이후에 첫 여름방학이었던 때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에 동생이 이문동에 거주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상봉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8월 16일 저녁 때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김용덕씨를 산악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댁에 같이 가자고 찾아갔는데, 김용덕씨 얘기가 내일 산에 간다고 해서 그러면 산에 가서 뵙겠다고 생각했다. 그 날 '산에 간다' 고 하지 않았다면, 그 날 찾아 뵙고 다시 내려갔을 것이다.

    산악회의 출발은 지구당 조직활동의 일환으로 선생님을 돕기 위한 모임으로 주로 당원이 중심이 되고 당원들과 가까운 일일회원도 있었다. 목적이 지구당 당원들이 산에 감으로써 가까이 지낼 계기로 한 것이다. 약사봉은 그 전에 가본 적이 없었으며, 처음 가는 곳이었다.

    산을 가다보면 벌판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회원들이 같이들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선생님보다 몇 발짝 떨어져서 갔던 모양이다. 쳐졌던 것 같다. 식사하는 지점에서 선생님 어디로 가셨냐고 물었다. 김양이 얘기했다고 하는데 저 위에 갔다고도 그러는데 제 생각에는 김용덕씨가 그랬던 것 같가. 기억이 확실치 않다. 누가 그랬는지 상관없다. 선생님을 모시고 갔는데 선생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찾은 건 당연하다. 저쪽으로 갔다고 해서 찾아 올라갔다. 그 때 누구누가 갔냐 하면 김용덕씨도 갔고, 백범사상연구소 일을 처음부터 보았던 김희로씨, 핵심적인 사람은 이 세상이라고 본다. 김희로씨는 그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난 그 때 혼자서 갔다.

    산굽으로 찾아 올라갔다. 선생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몰랐던 것이다. 왼쪽으로 잡아 올라가니까 산 입구에 다다른 것이다. 조금 더 산으로 들어가니까 선생님이 거기에 계셨다. 혼자 계신 것이 아니라 군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자꾸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병으로 이등병이었는데 아주 촌애들 같았다. 일요일이니까 놀러온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은 차를 들고 계셨다. 난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선생님이 같이 산에 오르자고 해서 같이 차를 먹고, 사병들은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떨어지고, 나하고 단둘이서 올라갔다. 선생님은 긴팔을 입고 계셨고, 난 산을 잘 몰랐으니까 반팔과 반잠바를 입고 있었다. 선생님이 내가 앞에 서야 한다고 해서, 난 그러면 선생님 배낭을 내가 메겠다고 해서 배낭은 내가 메고, 선생님을 뒤따라서 산에 올라갔다.

    바위가 있는 밑에서 선생님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식사준비가 저 밑에 준비되어 있다고 하자, 선생님은 샌드위치를 2인분 해왔기 때문에 같이 먹으면 된다고 해서,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시국관계 이야기를 했다. 일어나면서 아이쿠 빨리 내려가야 하지 않겠느냐, 저기서 기다리지 않겠느냐고 선생님이 그러셨다.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거기는 더 내려온 곳이었는데,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난 이쪽으로 내려가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지형적으로 보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곳이니까, 돌아서 그 전에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가면 좋을 것으로 난 알았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빨리 가야한다고 하셨다. 바로 가자고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극구 말릴 수가 없었다. 지형이 그렇게 나쁜 줄 알았다면 내가 끝까지 막았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으며, 등성이도 넘었다. 그런데 등성이로 넘어가니까 상당히 험했다. 그래서 그 곳은 갈 수 없는 곳이며, 등성이에서 벼랑으로는 절벽이라서 정말 여기는 못 가겠고, 돌아가셔야 한다고 내가 막았다. 거기는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그 계곡인데, 상당히 천야만야 떨어지면 위험한 곳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펄쩍펄쩔 뛰어 넘으면서 나보고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건너가셨는데 내가 안 넘을 수 없었다. 그거 보면 운명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넘은 뒤에 돌아보니까 매우 험했다. 산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나는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때부터 난 경직되고 얼었다. 길을 찾아서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찾아서 내려갔다. 상당히 경사가 지고, 아주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위험한 곳이었다. 돌사이에 나무들이 있고 해서 이렇게 비스듬히 내려갔다. 거기서 얼마를 내려가지고 그 지점에 다다랐다. 내가 먼저 내려갔다. 그 지점에, 그 지점이 어떻게 되었으냐 하면 바위가 쭉 펼쳐지고 저만한 정도(캐비넷을 가리키며)의 바위인데, 바위 밑에 소나무가 나 있었다. 몇 개가 나 있는지 모르겠는데, 소나무를 잡고 뛰어내려 길을 개척해 내려갔다. 조금, 내가 선생님과 불과 몇 미터 차이가 아니었으니까, 내려가다가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내가 들었다는 거다 거기서. 그런데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는 거다. 막 내려와 가지고 선생님 간다고 아까 말씀드렸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때는 상당히 심호흡을 하고 계셨다. 거기는 돌무덤이 아니었고, 잔잔한 모래가 있는 곳이었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 양반이 그런 얘기를 했다. 그래서 이렇게 누이고 인공호흡을 시키고 그래도 안되어서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고, 거의 운명하실 때 내가 입회했다. 그래서 회생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때 천상 연락할 수 밖에 없어서 달려간 거다. 김용덕씨 하고 나, 김희로씨 하고 김용덕씨 동생 그렇게 너댓명인가가 선생님한테 갔다. 가서 또 김희로씨가 다시 인공호흡을 시켰다. 그래가지도 인제 안되겠다. 그래서 내 잠바를 벗어서 들 것을 만들고 선생님을 모셨다.

    거기서 산악회원들은 미리 내려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산행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길거리 옆에 보이지 않는 곳에, 산악회원들이 보고 자극을 주면 안된다는 차원에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을 모셔놓고, 산악회원들을 내려보내고, 또 김희로씨를 그 아마(지서)로 내려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김희로씨는 총무도 보고, 이 인근부대 의무병인가 누군가 와서 보고 사망하셨다. 그러고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거기 파출소로 가서 의정부경찰서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구치소에서 자고, 그래서 의정부지청인가 가서 오후인가 풀려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때 현장에 검사되신 분이 오셔서 검증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기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모님께서 이일은 식구들이 한 일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것이 아니다 하셔서 저를 확인해 주셔서 내가 풀려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의정부지청에서 나와 가지고 그 저녁인가 선생님댁을 갔다. 그 다음날인가 그 날인가, 그렇게 될 거다. 상봉동에 계실 때, 그 전에 제기동에 계시다가 상봉동에 가셨다. 그 때 누가 계셨냐면 내가 알기로는 계훈제선생님도 계셨고, 함선생님도 계셨고, 작은 아버님 되시는 분 등 몇 분인지 대여섯명이 계셨는데, 그 자리에서 계훈제선생님이 그 상황 좀 이야기 해달라고 해서 그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녹음된 것으로 알고 있고, 녹음됐다는 것은 당시에는 몰랐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녹음되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알고 있고 그것이 대충 줄거리다.

    그런데 이상다하는 게 군인이 있었다는 게 이상하다. 군인이 초입에 있었는데 신문 같은 데를 보면 등성이에서 내가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떨어지는 부분은, 거기 떨어지는 부분에서 떨어진 부분에는 거리가 있는데 그건 어디에서 보았느냐하면 동아일보의 장모 기자의 기사를 보았다. 봤는데 그럴 수가 없다. 부정적인 이야기고, 떨어졌는데 상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고 그래서 그분이 긴급조친가 무얼로 당시 입건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떨어진 장소에 대한 의문은 그것은 그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들이 떨어지는데 바로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옆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앞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떨어지는데 나무를 붙잡고 미끄러진다면,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밑에만 떨어질 수 있겠느냐 그런 이야기이다. 나무를 잡아서 잡고 떨어지면서 나무가 휘어지면서 떨어질 수도 있고, 또 이쪽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저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가. 그래서 그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 가보면 있다.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십여 년 전의 그 기사를 보았으니까, 나는 목격자니까 추측기사로 알고 있다. 가능성은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계를 내가 가졌다는 것인데, 시계를 내가 어떻게 가졌는지 모르지만 김희로씨 이야기는 그 시계는 자기가 풀어서 나에게 주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무엇이 의심스러운지 모르겠다.

    선생님과 칠팔 년 동안 모든 어려운 면 그런 정치적 속에서 나는 가능한 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지구당 간사로서, 총무로서 중앙당에서 상무위원, 그 당시 그 살벌한 속에서 누가 가려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거기 갔다. 지구당에서 중앙당에서 무슨 데모를 한다던가 무슨 전단을 돌린다던가 내가 직접 들고 다녔다. 동화백화점, 화신백화점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