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동 논문] 5.16은 4.19의 갈망을 계승한 것1

장준하의 '사상계'는 5.16 지지했다!

김광동 | 최종편집 2012.08.23 16:50:09

張俊河의 '思想界'는 5.16을 지지하였다

金光東    
5·16 혁명 직후에 나온 「思想界」(6월호) 권두언은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그 결과로 사치·퇴폐·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이를 틈 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 혼란의 조성을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4·19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했다.

    5.16은 4.19의 갈망을 계승한 것
  4.19는, 「민족자주·민중 혁명」이 아니라,「근대화」의 거대한 갈망 폭발

金光東 
  




  『4월혁명은 빈곤 해방의 기점이다. 이제는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경제적 自由를 마련해야 한다』(尹潽善 대통령 취임사, 1960년 8월12일)
   
   필자 金光東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大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大 정치학 박사. 한국발전연구원 연구위원, 국회의원 보좌관, 美 스탠포드大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 고려大·숙명女大 강사 역임. 나라정책원장,정치학 박사 
      
  
*左翼들의 시각

      
   흔히 4·19는 「민주주의 혁명」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우리 헌법 前文(전문)에서도 「不義(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朴玄埰(박현채) 교수는 『4·19는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중해방의 실현을 위한 민중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중혁명인 4·19가 4·19에 의해 좌절됐다」는 의미에서 4·19를 「未完(미완)의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4·19는 우리 민중역사에서 최초로 被(피)지배자인 민중이 종속에 대한 민족자주와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자주통일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姜萬吉(강만길) 교수는 4·19를 「민중봉기」라고 평가하면서 『점령군의 자세로 들어온 美軍(미군)의 軍政(군정) 아래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이 좌절되고 분단체제가 고정화됨으로써 민주주의 운동이 또다시 벽에 부딪히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화 주도세력을 자임하는 세력에게 4·19는 「민주주의운동이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한 분단시대 민중운동의 거대한 출발점」이며, 4·19는 「4·19가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에 反動的(반동적)으로 대결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19를 민주혁명으로만 보는 것은 4·19에 대한 恣意的(자의적) 해석이거나 「민중혁명론」에 입각한 목적의식적 역사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속에는 4·19에 의한 민주혁명 시기가 따로 있다고 보면서, 그 이전의 李承晩(이승만) 시대나 4·19 이후의 朴正熙(박정희) 시대는 민주주의에 反하는 체제로 보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와 같은 「민주 對 反민주」라는 二分法的(이분법적) 인식은 李承晩 체제를 뛰어넘어 근대화를 지향했던 4·19가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2共, 「민주주의」보다 「경제건설」 강조
  
   결론부터 말한다면 4·19는 계급투쟁으로서의 민중혁명 또는 민중봉기가 아니었으며, 그 방향이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분단극복을 향한 민족통일운동은 더욱 아니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혁명은 아니었다. 4·19는 한마디로 당시 우리 사회에 가득 차 있던 근대화를 향한 열망이 혁명적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만약 4·19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혁명이었다면, 혁명 촉발의 계기가 된 3·15 선거 前後(전후)나 4·19 이후에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핵심 과제로 부상해야 했었다. 그러나 4·19를 前後한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없었다. 「민중혁명」과 「민족해방」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더욱 없었다.
   1960년 8월12일 尹潽善(윤보선) 대통령의 취임사를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경제」와 「빈곤 해방」을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尹潽善, 『새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다』
  
   尹대통령은 『4월 혁명은 국민의 民權(민권) 탈환의 금자탑이요, 빈곤 해방의 기점이다. 이제는 국민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은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이다』면서 『새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로 나아가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있다.
   尹潽善 대통령이 강조한 「경제제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당시 국민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國政(국정)책임자였던 張勉(장면) 국무총리는 그해 8월27일 첫 국회 연설에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하여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마지 않는다』면서 『경제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제안정의 테두리 안에서 장기 개발계획의 실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10월1일 제2공화국 출범 경축사에서 張勉 총리는 『민족의 당면한 과제가 산업의 현대화와 국민 소득의 加增的(가증적) 증가에 있음을 再확인한다』고 했다.
   4·19의 원인이 되었던 1960년의 3·15 선거과정을 보면 4·19가 지향한 것이 무엇인지 좀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선거과정 내내 민주주의는 선거 쟁점이 되지 않았었다.
   물론 선거과정에서의 부정문제나 경찰조직과 같은 행정기관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나, 학생들을 집회에 동원하는 것에 대한 지적은 많았다. 하지만 어떤 민주제도를 지향하자거나, 민주이념의 문제가 선거과정에 대두된 적은 없었다.
   당시 신문 社說(사설)을 보면, 「정·부통령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동일 티켓제」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早期(조기) 선거를 주장하는 정부·여당과 이에 반대하는 야당 간의 논란 정도가 선거와 관련된 관심사였다.
   잡지 「思想界(사상계)」를 보면 1959년부터 1960년 4월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9 이전까지 「思想界」가 마련했던 특집을 보면 「아메리카니즘」, 「민족성의 반성」, 「관료제도」, 「리더와 리더십」, 「방황하는 현대사회주의」 등이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근대화」였다. 4·19 역시 「민주혁명」의 범주를 넘어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3·15 부정선거나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곧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癌的(암적)인 요소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4·19는 反共主義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일부 左派(좌파)인사들은 『4·19는 李承晩 정권 시절의 철저한 反共主義(반공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李承晩 정권 시절의 지나친 反共主義 때문에 4·19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4·19를 통해 억압되었던 진보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했던 것이 아니었다.
   4·19 이후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인 한국사회당은 1석, 사회대중당은 4석, 통일당은 1석을 차지했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사회대중당 1석, 한국사회당 1석에 불과했다.
   4·19 정신은 姜萬吉·朴玄埰 등 左派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反共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고려大 학생들은 4·18 선언문에서 『우리 高大는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前衛的(전위적) 대열에 섰다는 것을 자부심 있게 여긴다』고 선언했다.
   서울大의 4·19 선언문에는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피를 흘려 온 것처럼 우리는 또한 사이비 민주주의의 독재를 배격한다』면서 『학생들은 대학의 역할이 赤色專制(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白色專制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자부하겠다』고 했다.
   4·19 이후 들어선 許政(허정) 과도 정부도 反共을 강조했다. 許政 정부수반은 5월3일 기자회견에서 『反共을 더 확고히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만약 4·19 정신이 反共主義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4·19 당시의 대학생들이나 許政 과도정부가 이처럼 反共을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19 이후 左翼운동 확산
  
   물론 4·19 이후, 지하에 잠복해 있던 左翼(좌익)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4·19 이후에 전개된 혼란을 틈타 일부 左派세력은 공산주의적 논리와 反외세 논리를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4·19가 일어난 지 1주년이 되는 1961년 4월19일 서울大의 과격 학생들은 『역사를 변혁시키기 위해 反봉건·反외압세력·反매판자본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연세大에서는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서리의 퇴임을 요구하고 『외국인에 의하여 한국 대학의 참다운 민족교육이 성취될 수 없다』며 미국인 원일한 총장을 몰아냈다.
   서울大에서는 1960년 11월18일 「민족통일연맹」을 발족시키고 反외세 민족통일운동을 본격화했다. 1961년에 들어 左派세력들은 「경제적 예속화와 내정간섭 중단」이라는 명분 아래 韓美경제협정 체결 반대에 나섰다. 5·16 직전에 학생들은 「가자 北으로, 오라 南으로」라는 구호 아래 판문점에서 남북학생대표자회의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李大根(이대근) 교수는 『4·19 혁명은 시간의 전개에 따라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혁명정신이었던 의회민주주의의 정상화나 자유와 인권보장의 요구가 어느덧 反美(반미)·親北(친북)을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을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그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사태의 전개에 의혹을 갖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과격운동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통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국가보안법 강화를 추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학생다운 순진성을 지녔더라면 차라리 現 질서를 부정하는 공산분자로 자처하고 나서라』며 학생들의 급진성에 대해 경고했다. 4·19 이후 일부 학생들과 혁신세력은 통일문제를 들고 나왔다.
  
   *1950년대 末의 경제적 상황
  
   4·19 혁명의 본질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기보다는 생존과 번영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었다. 4·19 직전의 한국사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실현하기에 모든 것이 미흡했었다. 1955년 현재 농어민 수는 全국민의 71%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합해 9.5%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5년 당시 65달러에 불과했다.
   1960년 기준으로 한국의 산업구조는 1차 산업이 35%에 달했고, 2차 산업은 19.8%였다. 경제성장률은 1956년 당시 불과 1%에 불과했다. 미국의 對韓 원조가 가장 많았던 1957년에 8.1%의 성장이 있었을 뿐, 그 뒤부터는 하락하여 1959년 4.8%, 1960년 2.5%로 계속 하향추세에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對韓 원조 축소는 경제상황을 惡化(악화)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957년 3억8000만 달러를 기점으로 미국의 원조는 급격히 하락했다. 3억8000만 달러는 우리나라 재정수입의 약 53%, 국민총생산(GNP)의 약 23%에 달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에 3억2000만 달러, 1959년에 2억20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원조자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우리나라 기업들은 시설 과잉과 원료 부족 등으로 타격을 받고 있었고 失業(실업)은 다시 증가했다.
   또한 駐韓美軍(주한미군) 병력의 감축이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22만3000명에 달하던 駐韓美軍은 1956년 7만5000명, 1959년 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원조경제와 駐韓美軍 부대의 주둔에 따른 파급경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駐韓美軍의 급속한 감축은 한국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1950년대 말의 상황이었다. 戰後(전후) 복구 경제와 원조경제는 한계에 도달했고, 대한민국이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에서 4·19가 시작된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1956년 申翼熙(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急逝(급서)한 데 이어, 1960년 趙炳玉(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사망하면서 새로운 체제에 대한 희망이 좌절당한 데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건국 이후 체계적으로 민주주의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1955년 무렵부터 강한 감수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不義(불의)한 체제에 대한 조직적 반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舊세대는 물러가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舊세대에 대한 新세대의 도전이었다. 
   
      *4·19는 「근대화 혁명」의 1단계
  
   4·19 혁명은 단순히 잘못된 「부정선거」를 정상적인 「공정선거」로 바꿔 달라거나, 「자유당 정부」를 「민주당 정부」로, 「李承晩 대통령」을 「申翼熙 또는 趙炳玉 대통령」으로 바꾸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어떻게 하면 잘사는 나라를 만들 것이냐」에 대한 代案(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舊韓末(구한말)부터 나라를 이끌던 84세의 老대통령에게 기대하기보다는 일단 현존 질서를 부정하고 나서 代案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하는 사회의 무능과 국민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발전에 대한 욕구가 좌절된 집단적 반발이 곧 4·19였던 것이다.
   4·19 이후 치러진 參議院(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31석, 자유당이 4석, 무소속이 20석을 차지했다. 民議院(민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175석, 자유당이 2석, 무소속이 49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光復(광복) 직후 토착 지주세력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국민주당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들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舊세력」·「舊체제」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근대화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4·19를 일으켰던 「新세대」 대학생들 또한 「근대화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근대화 혁명」을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 주체의 등장이 필요했다.
   4·19는 그 자체로는 「혁명」이 아니다. 4·19 주도세력이 국가를 담당할 수 없었고, 4·19가 자유당과 李承晩 체제의 해체와 민주당의 출범 이외에는 한국사회를 직접적으로 바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4·19가 출범시킨 민주당 정부는 민주당 자신은 물론이고 국민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가 「혁명」인 이유는 바로 5·16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4·19는 李承晩 정권으로 상징되는 舊체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고, 민주당은 舊체제의 연속임이 확인되었기에 5·16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19는 「근대화 혁명」의 제1단계였던 것이다. 
      
   *서울大 총학생회, 『4·19와 5·16은 동일한 목표 갖는다』
      
   만약 5·16이 4·19를 부정하는 것이었다면 4·19를 주도했던 세력들이 5·16을 부정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4·19 세력은 5·16을 긍정했다. 그들은 자유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를 한편으로 보고, 4·19 세력과 5·16 세력을 한편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5·16 직후 서울大 총학생회는 『4·19와 5·16은 동일한 목표를 갖는다』면서 『5·16은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환영했다. 고려大 총학생회는 1962년 4·19 제2주년 학생선언문에서 『4월 혁명과 5월 혁명은 조국재건이라는 근본이념에서부터 혁명과업 완수의 도상에서 일치되어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金炳翼(김병익) 「문학과 지성」 고문은 4·19와 5·16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5·16은 근대적 경제체제를 개발하려고 했던 것이며, 4·19와는 「2인3각」적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나 자유의 物的(물적) 토대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경제적 근대화와 정신적 근대화, 이 두 가지 화두가 1960년대 한국을 2인3각으로 이끌어 온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尹潽善 대통령은 5·16이 발생하자 『올 것이 왔다』고 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함축적인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4·19로 李承晩 정권을 무너뜨렸던 학생과 시민들이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5·16이 일어났을 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군인들의 총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지식인·정치인·학생 할 것 없이 5·16을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하고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左派的(좌파적) 역사인식에 입각한 인사들은 4·19를 5·16과 분리시키는 데 역점을 두어 왔다. 左派的 역사인식은 대부분 4·19를 李承晩 정부의 惡(악)에 대한 善(선)의 확립이며, 그것이 또 다른 惡인 5·16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은 4·19와 5·16의 의미와 성격에 대한 의도적 사실관계의 외면과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5·16은 4·19의 뒤를 이은 2단계 근대화 혁명이었다.
  
   *『4·19와 5·16은 保守세력에 대한 반항』
  
   1961년 5월16일, 군부 쿠데타를 기점으로 전환을 맞은 朴正熙 시대에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요구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된 질서체제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적 자부심을 느낄 만큼 번영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염원의 반영이었다.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에서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라며 4·19와 5·16의 연속적 성격을 표명했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며 軍이 주도한 5·16은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5·16을 「민족의 혁명적 복부수술」이라고 했다.
   민족주의를 연구해 온 차기벽 교수는 『4·19와 5·16은 보수세력에 대한 반항이며, 민족주의의 再등장』이라고 4·19와 5·16의 연속적 성격을 명확히 했다. 張俊河(장준하)가 주도한 잡지 「思想界(사상계)」도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었다.
   5·16 혁명 직후에 나온 「思想界」(6월호) 권두언은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그 결과로 사치·퇴폐·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이를 틈 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 혼란의 조성을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4·19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했다.
   나아가 「思想界」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전망과 예언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정확하게 적중했다.
  
   *4·19와 5·16은 2단계 연속혁명
  
   한국 현대사에서 4·19와 5·16은 연속적인 것이다. 4·19가 5·16을 낳은 것이다. 4·19는 자유당을 극복하고자 했고, 5·16은 민주당을 극복하고자 했다. 李承晩의 자유당과 張勉의 민주당에 맞서 4·19와 5·16은 함께 代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5·16은 시작부터 4·19 세력의 환영을 받았고, 4·19를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4·19 정신을 헌법에 명기한 것은 민주당의 제2공화국이 아닌 朴正熙 군사정부가 주도한 제3공화국 헌법에서였다.
   5·16은 질서와 번영의 측면에서 의의가 있지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넘어선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정립과정이기도 하다. 「早期(조기) 성숙된 민주주의」만으로는 국민의 삶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共有(공유)된 인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代案 모색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 4·19이었고 5·16이었던 것이다.
   안정과 질서 속에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자는 국민적 염원이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4·19와 5·16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와 5·16은 2단계 연속혁명이며, 세계사적 모델로 정착될 만한 성공 혁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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