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웃음'을 그릴수 없었던 북한 천재화가

    장진성 기자 /뉴포커스 대표

    '윤종호 사건'이라면 미술대학은 물론 북한 문화계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한 화가의 기막힌 운명보다 거기에 얽혀있는 북한 체제에 대한 풍자 때문에 더 잊혀 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윤종호는 조선미술대학 교원을 지낸 화가였다. 실력을 인정받아 만수대 창작사로 배치 받은 윤종호는 김일성 부자 초상화만 전문으로 그리는 '1호미술가'로 승진하게 되었다. 1호미술가는 북한 최고 실력의 화가들에게만 부여되는 일종의 명예칭호이다.

    윤종호는 1호 미술가들 중 가장 최연소 나이의 화가였다. 그런 젊음의 의욕 때문인지 윤종호는 김부자 형상 유화를 자기만의 개성으로 창작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즉 북한체제가 요구하는 천편일률식의 수령 신격화형상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창조를 말이다. 그동안 북한의 수령형상 그림들에 등장하는 김 씨 일가의 모습들은 무조건 웃는 얼굴들뿐 이었다. 미술은 직관성의 예술이기 때문에 수령이 웃어야 온 나라가 웃고, 설사 나라가 어려워도 수령의 현명한 영도를 믿고 낙관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黨) 선전선동의 유일지도체제 요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종호 화가는 “위대한 수령”, 그 이전에 “위대한 인간”을 보여줘야 감동의 깊이가 더 생긴다며 주민들의 일상과 가까운 구체적인 감정표현의 수령 얼굴을 그려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완성한 그림이, 반찬이라고는 고작 된장뿐인 어느 농민의 도시락을 들여다 보며 할 말을 잃은 김일성의 수심 깊은 얼굴이었다. 당 선전선동부는 수령의 슬픈 얼굴을 북한 최초로 그린 윤종호 화가를 염세주의, 비관주의로 몰아 공개비판 후 만수대창작사 1호 미술가라는 직함에서 해임시켰다. 또한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하여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황해북도 미술 창작사 화가로 배치 받은 윤종호는 북한 화가의 최고 명예인 1호미술가 직함을 잃은 상실과 아픔으로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실력은 이미 북한 내에서는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윤종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인들의 꾸준한 설득과 주변의 도움으로 윤종호는 마침내 다시 붓을 들게 되었는데 황해북도 미술창작사 화가로 활동하면서부터 윤종호는 의외로 활기를 되찾았다. 오직 김 씨 일가의 얼굴만, 그것도 웃는 수령의 얼굴만 그려야 했던 윤종호의 붓이 마침내 수령신격화의 틀에서 해방되어 북한 모든 주민들로 대상 범위가 넓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종호는 수령은 반드시 웃어야 하지만, 일반 주민 형상에서는 그나마 자유의 선택이 허용될 것이란 조심스런 기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수령 형상에서는 엄청난 불법이었던 일상의 모습들을 주민들의 얼굴에서 실현해보기로 했다. 하여 “사회주의 낙원”에서 행복을 누리는 외형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고민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심리적 인간 형상을 시도하였다. 어느덧 황해북도 미술창작사 차원에서 윤종호 그림 평가회를 진행하게 됐다.

    윤종호는 남한에 대해 복수심에 불타는 전연 지역의 군인 형상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딛고 억세게 일어서는 사회주의 투사들의 전형들을 선보였다. 그런데 국가검열과 황해북도 미술창작사 내부 심사 결과 윤종호의 그림들은 사회주의를 왜곡한 수정주의 및 비관주의로 판정됐고, 또 다시 군중총회 비판대상이 되었다.

    군중총회에서 황해북도 미술창작사 당위원회는 김정일의 주체미술론이 밝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수령과 당에 충실한 사회주의 전형을 창조하라는 것인데 윤종호는 거꾸로 일상의 감정에 충실한 사실주의적 사회주의 전형들을 만들려 했다며, 이는 문학 지상주의를 내세워 사회주의를 붕괴로 이어간 구 소련 수정주의 문화인들의 행태라고 비판했다.

    결국 문제의 그림들은 주체미술론의 원칙을 위반한 증거물들로 회수 소각됐고, 윤종호는 조선미술가동맹 회원 자격은 물론 다시는 합법적 전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 사실 화가에게 그림을 못 그리도록 법으로까지 제한하는 것은 자살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국가 1호미술가에서 해임되어 지방으로 추방된 것도 억울한데, 조선미술가동맹 회원마저 박탈당하고 그림까지 못 그리게 된 천재미술가의 비극은 주변의 지인들과 동료 화가들을 한없이 슬프게 했다.

  • 그러나 얼마 후 윤종호는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시 새로운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수령도 안 되고, 일반 주민들도 그릴 수 없게 되니 그가 아예 동물표정의 화가로 명성을 떨친다는 소문이었다. 마침 고난의 행군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북한 체제의 틀에 구속 받지 않는 윤종호 화가의 동물 그림들은 고가로 팔렸나갔다.

    북한에선 집안에 호랑이 그림을 붙이면 악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낭설이 있는데 그래선지 윤종호 그림들 중 호랑이 그림이 많았다. 또한 고양이의 다양한 표정들을 담아낸 그림들도 인기여서 중국 상인들의 주문까지 이어져 윤종호는 과거 1호미술가 시절의 월급에 비할 수 없는 상당한 외화를 벌게 됐다.

    그러자 미술품들과 공예품들을 팔아 외화벌이를 하는 만수대창작사가 다시 윤종호에게 재입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당신의 천부적인 재능은 인물이 아니라 동물그림이었으니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윤종호는 한때 자기를 냉정하게 쫓아냈던 만수대창작사 간부들과 직원들에게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했다. 윤종호 화가의 동물 그림들은 북한의 재력가들과 간부들이 갖고 싶은 부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그렇게 윤종호의 개인 성공 스토리가 북한 화가들 속에서 절정에 이를 무렵, 뜻밖에도 그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종호가 술좌석에서 “국가 지도자의 미소를 그릴 때보다 동네 개 눈깔 그리니깐 수입이 더 좋다”고 발언한 것이 화근이 됐던 것이다.

    윤종호와 그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북한 간부들이 경쟁적으로 사들였던 윤종호 친필이 들어간 동물그림들에 대한 단속조치도 이어졌다.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인간의 얼굴을 마음대로 그릴 자유도 없어 동물표정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윤종호. 이것이 바로 북한 정권이 선전하는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 사회이다.

    [탈북자신문 뉴포커스=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