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세력 척결방법? "항상 공세적-주동적으로 혼란에 빠트려야"
  • "처음 만나서부터 실망이 컸습니다. 김일성은 무식했습니다. 주체사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남조선에 ‘주체혁명’을 완성해달라는 주문뿐이었습니다."

    80년대 대학가에 주사파를 만든 ‘강철서신’의 주인공 김영환(49) 씨는 "김일성과 김정일이야말로 가장 반주체사상적인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1991년 5월 16일 깊은 밤 12시, 강화도 산속의 접선장소는 쌍묘(부부 무덤).'

    북한 공작원을 만나 바닷가로 빠지자 북한군 2명이 그를 잠수정으로 이끌었다. 잠수정을 타고 강화도를 떠나 해주에 도착한 뒤, 헬리콥터와 기차를 타고 묘향산까지 갔다.

    그가 강화도에서 북한 간첩이 주선한 잠수정을 타고 가서 묘향산 ‘별궁’에 머무는 김일성을 만난 것은 1991년 5월24일이다. 김일성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김 동무만 믿소. 주사파 1천만명쯤 만드시오.”

    오찬을 포함 3시간 반쯤 이어진 대화에서 얻은 것은 ‘환멸’이었고 잃은 것은 ‘남조선 혁명의 꿈’이었다. 김일성이 도와주면 성공할 줄 믿었지만, 북한에 기대할 것은 많지 않았다. 한껏 부푼 꿈이 깨진 것이다. 결정적 ‘절망’은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의 대남공작 실세들과의 만남이었다.

    "동유럽이 무너지고 소련마저 붕괴된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는 다르다고, 주체사상이 있으니 해낼 수 있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주체의 나라’ 현실에 직면하자 그런 ‘신념’이 뿌리채 흔들렸던 겁니다."

    "꽉 막힌 절벽 같았습니다. 전술가요 학자란 사람들이 도대체 대화의 자유조차 없는 겁니다. 그네들은 주체사상 전문가인 줄 알았는데 토론도 못하고 자율권도 없었습니다."

    김영환은 결심했다.

    ‘그렇다. 내가 해내겠다. 너희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다 해보이겠다.’

    수 많은 공작원들이 수십년간 암약했어도 못했던 일을 불과 몇 년만에 이뤄낸 대학생 김영환은 북한의 ‘열사-영웅’이었다. 그는 이미 남한 전국 대학가에 열혈 주사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했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했으며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창당 준비를 완료한 다음 김일성의 부름에 응한 터였다.

    북한 공작금 40만달러를 바탕으로 민혁당을 출범시켰다. 하영옥, 이석기, 이상규, 이의엽, 정모, 박모...등과 함께였다.

  • △ 국가정보원은 1999년 9월 9일 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친 민혁당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수사당국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는 1998년 12월 18일 여수 돌산도 앞바다에서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 속 문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우리 해군은 당시 수심 140미터에 침몰한 반잠수정을 인양하기 위해 심해구조대(SSU) 대원들을 동원해 ‘포화잠수’까지 시도하며 인양했다.

    인양한 반잠수정 속에서는 북한 대외연락부(現225국. 간첩단 '왕재산 사건'도 연루) 소속 간첩이 ‘민혁당’을 지도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이때 공안당국은 반잠수정에서 찾은 전화번호 수첩 등을 추적해 사살된 간첩의 이름은 ‘진운방’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공안당국은 이후 자료 검증을 통해 ‘민혁당’ 연루자인 김영환 씨, 조유식 前 ‘말’지 기자, 하영옥 씨, 심재춘 씨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김경환 ‘말’지 기자와 달아난 박 모 변호사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했다.

    이때 박 변호사와 함께 달아난 사람이 바로 이석기 의원이었다.

    수사기관에 쫓긴 김영환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 귀국, 국정원 조사를 받고 마침내 과거를 청산한다.

    그는 국정원이 공개한 ‘전향서’에서 이렇게 썼다.

    “젓가락처럼 앙상해진 팔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북한 어린이를 보면,
    사소한 잘못에도 몽둥이로 사정없이 얻어맞는 북한 주민들을 보면,

    사실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가닥 용기를 내어 잘못을 용서해주길 빌며 북한 동포 앞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1999.10.4)

    그가 저술한 주체사상 교본 <강철서신> 때문에 인생을 망친 후배들과 국민들에게도 사과한다는 김영환은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주체사상 국가의 꿈’에는 한치의 변화도 없다고 한다.

    다만 ‘남한 변혁’이 ‘북한 변혁’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의 주체 운운은 수령독재를 위장한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내가 구상해온 진정한 주체사상, 황장엽 선생이 못한 것을 내가 완성해보이고 싶습니다.”

    ‘종북 운동권의 원조’격인 김영환은 그 학자풍 외모처럼 사상가로 변신한 것인가.

    “북한 민주화! 자신 있습니다. 수령세습독재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인민혁명 가능성요? 그것보다 북한에 돌발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장악, 민주화로 환골탈태시킬 핵심 세력이 중요하죠. 나는 낙관적으로 봅니다.”

    '행동하는 사상가' 김영환은 그래서 중국에 드나들다가 붙잡혀서 모진 전기고문까지 당했다.

    그가 그리는 북한의 미래는 무엇인가? 청춘을 바치고 평생을 바쳐 이루겠다는 김영환의 주체사상은 무엇인가?

    김영환 씨와의 인터뷰는 목동의 한 카페에서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기자는 '강철같이 차가운 성격에 침침하고 무시무시한 암흑계의 보스'같은 느낌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그렇지 않았다.

    '강철'은 커녕 깡마른 몸에 얌전한 선비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주체사상'이 뭔지 모르는 기자로서는 '황장영 주체사상'을 발전시키겠다는 그가 전향한게 맞는지 확인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전원책 자유경제원 원장의 이른바 '종북감별법(?)'을 통해서다. '김일성 개XX'라고 해보라고 부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제가 중국에 있을때 어떤 중국어 욕을 한국말로 뭐라고 하느냐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저는 끝까지 답할 수 없다고 했어요. 평생 욕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가 공개적으로 북한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95년도부터다. 완곡하게 시작해 점차 비판의 강도가 세졌다. 98년에 그는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아예 김일성-김정일을 대놓고 비판한다. 최근 북한은 김영환 씨를 '추악한 변절자'라며 '처단 대상자'로 지목했다.

    북한민주화운동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아직도 북한에 대한 애정이 뜨겁냐"고 묻자 "그런 애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고 있다"고 했다.

    김영환 씨는 "주사파 중에 주체사상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했다.

    인터뷰는 뉴데일리 인보길 대표가 진행했다.

  • <인보길> 오래전부터 만나보고 싶었습니다(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 그때 묻고 싶었던 것부터 묻겠습니다.

    <김영환> 하하. 저같은 사람을 왜 보고싶어 하셨습니까.


    <인보길> 80년대 <강철 서신>의 공로로 북한 김일성이 불렀나요?

    <김영환> 89년 7월에 공작원을 만났을 때 제가 가고 싶다고 했죠. 윤택림이란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잠수정을 타고 온 것 같았습니다.


    <인보길> 북한으로 가기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영환> 공작원이 연락방식을 지정해줬습니다. 북한에서는 라디오 암호전문을 통해서 했고, 제가 연락을 보낼 땐 일반 무전기를 통해서 했습니다. (※ 대남암호방송에서 윤택림이 말한 메시지가 나온 뒤 김영환은 그가 정말 간첩이란 것을 확인하고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제가 처음 공작원을 만났을 때 (김일성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전달했어요. 북에선 얘기가 없다가 91년 2월 쯤 저한테 한번 들어오라고 얘기를 했고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까 날짜와 장소를 지정해줬습니다.

    공작원과의 접선장소를 지정해줬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강화도 야산 중턱정도에 묘가 나란히 있는 쌍묘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밤 12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북한 전투원 2명이 그 장소로 와서 만났고 바닷가로 이동을 했어요. 넓은 갯벌을 통해서 잠수정으로 이동했고 황해도 해주로 갔습니다. 해주에서는 헬리콥터를 타고 평양으로 갔죠.

    <인보길> 김일성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죠? 저도 만나보고 싶었었는데...(웃음)

    <김영환> 묘향산으로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고 묘향산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어요. 12시부터는 점심 식사를 하면서 1시 30분까지 또 이야기를 했습니다. 총 3시간 30분정도 얘기했죠.

    구체적으로 주문한 것은 없고, 남조선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주사파를 1천만 명을 만들자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회(남한)는 (북한에) 넘어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보길> 북한 학자들과 토론도 하고, 회의도 하고 교육도 받고 그랬다던데. 무슨 그림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하자는?

    <김영환> 내가 볼 때 그 사람들이 무슨 그림을 그릴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한국 정세에 대한 감각도 많이 떨어지고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일단 형식적인 것은 얘기하는데 실속이 없었죠.

    내 경우에는 전략과 전술에 대해 거의 일임을 했습니다. 아마 나와 다른 사람과는 많이 다르겠죠. 일단 나는 지위나 위상이 달랐습니다.


    <인보길> 자기 부하들보다 월등히 나았을테니 그럴만도 하죠. 공작원들이 못한 것을 대학생이 4~5년 동안 다 했고 몇십배 더 성공했죠. 훈장 같은 것도 받았겠네요.

    <김영환> 김일성이 공작원을 통해 (주체사상 전파를) 시도했었지만 다 실패했었죠. 하지만 저는 어린 나이에 해치웠지 않습니까(웃음). 북한 갔을 때 받은 것은 아니고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훈장을 하나 줬다고 전문을 받았습니다.


    <인보길> 그때 청년운동가 김영환이 그렸던 국가모델은 어떤 모델이었나?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김영환> 글쎄요. 모델이라는 것은…. 그냥 이상국가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역할에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국가였습니다.

    그 당시에 중점을 뒀던 것은 권위주의적인 그런 요소를 깨야한다는 것이었어요.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깨야하고, 재벌이라든지 그런 특권층의 특권을 없애야하고. 그리고 사회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이 잠재력을 끌어내서 그 사람들이 주인의식이나 자주의식을 일깨워야한다는….

    우리식 표현으로 의식화 방법을 통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 <인보길> 그런 식의 국민의식화란 것이 자칫 개인을 무시한 전체주의적 방법이란 생각을 안했나요?

    <김영환> 그 당시 저희들은 뭐 나치즘이라든지 스탈린주의라든지 전체주의에 대해서 물론 비판적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지않을 자신이 있었죠. 물론 현실적으로 하다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젊고 패기가 넘쳤기 때문에….


    <인보길> 대미관계. 대중관계. 대외관계는 어떤 국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었나요? 한미관계는?

    <김영환> 그 당시엔 소련이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미국, 일본, 중국, 소련과 대등한 관계가 돼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미동맹은 미국에 대한 종속적인 그런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반대했었죠.


    <인보길> 북한에 가서 이런저런 모순을 직접 보고나서 변화되는 경험, 즉 한쪽 이념에 포로됐던 청년이 진실에 눈을 뜨면서 겪는 정신세계의 변화, 그 과정은 극적인 인간드라마니까 본인 말로 듣고 싶습니다.

    <김영환> 내 사상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입니다.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세계관이 많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식 계획경제-국유제 등에 회의감을 갖게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나를 지키기 위해 의지한게 주체사상이었습니다.

    80년대에는 북한사회를 동경했었지만 89년 이후에는 동경보다는 주체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가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었었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김일성은) 제대로 모르고. 전문가들도 전혀 발언을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고 뭔가 토론을 하면 주고받는 맛이 있어야하는데 벽에 부딪혀서 메아리만 들려오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실망을 했습니다. 북한에 가기 전에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데 김일성이나 북한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완전히 그런 기대를 접어버렸습니다.


    <인보길> 딱 한번 만나보고 기대를 접다니요?

    <김영환> 한번에 기대를 접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생각이 다른거라면. 그런데 사람이 기본적으로 논의할 자세나 능력이 안되면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어떤 얘기가 장애물 때문에 잘 진행이 안됐다거나 그런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논의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인보길> 북한 주체사상은 무엇입니까?

    <김영환> 북한이 만든 주체사상은 철학적인 뼈대는 있지만 그 구체적인 정치철학이라든지 어떤 전략전술이라든지 정치이론, 국가건설이론. 국가발전이론 등은 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북한에서 얘기하는 주체사상은 3개를 합친 것입니다. 김일성의 민족공산주의입니다.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민족주의 언어로 코팅을 해놓은 것이 하나고.

    그 다음에 주체철학, 그런데 황장엽 선생이 만든 것은 철학적인 것은 있는데 정치이론 사회발전론 등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한 부분이 수령론인데 김정일이 선전부 시켜서 만든 것 같습니다. 물론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수령에 충성하라는 것 뿐이니까요. 실제로 읽어봐도 별 내용이 없습니다.


    <인보길> 수령론이란게 세습왕조를 합리화시키고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선전론이죠. 

    <김영환> 어거지로 이렇게 합쳐서 만들어놓은게 주체사상인데 김일성 민족공산주의나 수령론은 알맹이가 없고 주체사상 알멩이는 주체철학입니다. 주체철학은 철학적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정치이론으로 구체화돼있지 않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아니죠. 정치이론이 없으니까 단순히 철학적인 명제만 있는 것이죠.

    이데올로기가 돼 있지 않다는 장점은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편향성을 만들지 않게 한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처럼 강하고 엄청난 매력을 가지고 사람들에 머릿속에 주입을 해서 사상이나 문화나 모든 일상생활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런 역할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단점은 이데올로기가 한 사람의 신념으로서 그 사람의 모든 사회생활의 기준이 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해서 주체철학이란 것은 그런게 없으니까 어떤 가이드라인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좌파에 가면 좌파에 활용, 우파에 가면 우파에 활용될 수 있는 그냥 철학이론입니다. 지루하고 뭔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보길> 그런데 왜 지금까지 젊은들이 거기에 끌려가는지?

    <김영환> 제가 볼땐 주체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 주사파중에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잘 압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주사파에 물어보면 주체철학이 무엇인지 앵무새처럼 10분? 1시간? 정도 답변을 할텐데요.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잘 모릅니다. 탈북자들에 물어봐도 외워서 답하지 뭔뜻인지 물어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 <인보길> 북한 주민들이 암송하는 차원을 넘지 못한다고 하면 주체사상으로 인해 북한에 충성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영환> 그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주체철학이라기보다는 스탈린주의입니다. 스스로는 의식을 못하겠지만 굉장히 종교화된 스탈린주의때문이죠. 교주는 김일성일테고  제가 작년에 예측하기로는 김정은으로 바뀌면 동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현재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하여간 뭐 굉장히 종교화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갑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이 안 통합니다.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요.

     

    <인보길> 황장엽 주체사상을 포용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북한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뜨겁죠?

    <김영환> 그럼요. 그런 애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고 있죠. 황장엽 선생의 주체사상은 평소에 고민하고 연구하던 철학을 다듬어서 만든 것입니다. 황장엽 선생은 반외세민족주의와 상관없이 주체사상을 만드셨습니다. 주체란 민족주체 개념보다는 개인주체. 인간 개개인. 그래서 물론 집단이나 그런 개념도 있고 그렇지만 개개인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헤겔이 살아있을 때 우파에 많이 활용됐었고, 나중엔 좌파에 많이 활용됐죠. 주체사상같은 경우도 초기엔 좌파에 많이 활용됐지만, 나중엔 우파에 활용될 게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게 자주라는 개념이고 그 개념은 자본주의사회의 자율이란 개념과는 약간 다르지만 일맥상통합니다.


    <인보길> 개인주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김영환> 주체사상에서는 개인주체와 집단주체 두 가지를 모두 중시합니다. 그러니까 집단주체만 강조하면 전체주의로 빠지고 개인주체만 강조하면 지나치게 이기주의로 빠지니까 이 2개를 동등하게 가자는 것이죠.


    <인보길> 북한국가연호가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올해 주체 101년이죠? 그런 집단과 전쟁 중인 국가에서 이런 주체사상을 포용할 수 있어야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한다면 오해받을 소지가 너무 강한데요? 더구나 글로벌시대에...

    <김영환> 저는 황장엽 선생의 주체사상은 가지고 있고 북한적인 주체사상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북한과 사상전쟁을 하려면 세게 맞붙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사상을 활용하는데 지금 우리가 북한주도의 것을 우리쪽으로 갖고오면 북한은 껍데기만 남는 것이죠. 빼앗아 오자는 것입니다. 사상-정치 전쟁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동적으로 싸우게 되면 밀립니다. 항상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효과가 큽니다.


    <인보길> 황장엽의 주체철학은 허울만 좋았지 각론이 없다면서요.

    <김영환> 각론이 없지만 그 각론을 제가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들겠단 말만 하고 이론 활동을 해야하는데,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보니까 이론활동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웃음).


    <인보길> 우리 2030세대에 대한 이념교육은? 어떻게 시도해봤는지?

    <김영환> 여러차례 접근했습니다. 그들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것은 현재 4050세대의 주사파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념이 약하고 굉장히 감성적이죠.


    <인보길>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92년도에 민혁당을 만들었습니다.

    <김영환> 창당 준비위원회는 북한 가기 전에 만들었습니다. 1991년 2월 ‘민혁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92년 3월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인보길> 강령이나 목표는 무엇이었죠?

    <김영환> 민혁당 강령은 간단하게 3조로 돼 있습니다. 제1조는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한다’, 제2조는 '민족자주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민족통일을 추구한다', 제3조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나는 완전히 자주화된 사회를 건설한다'입니다.


    <인보길> 같이 창당한 사람들이?

    <김영환> 관악산(암호명) 1호는 김영환, 관악산 2호는 하영옥, 관악산 3호는 박ㅇㅇ 변호사입니다. 민혁당 당원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100명이었습니다. 당원은 아니지만 지하당원은 400명었죠. 행동파는 3천 여명 정도였습니다.

  • <인보길> 이석기는? (※ 이석기 의원은 민혁당 사건과의 관계를 일체 부인하고있다.)

    <김영환> 민혁당 경기남동부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이후 수도권위원회 위원장으로 바뀌었죠. 임무가 바뀐 것은 아니고 이름만 바뀌었습니다. 수도권위원회라는게 서울-경기 지역의 노동운동을 관리하는 역할입니다. 주로 관리하는 것은 경기동남부지역이었습니다. 저하고 나이가 같습니다.

    통진당 사무총장 장원섭, 통진당 정책위의장 이의엽, 통진당 이상규 의원. 그리고 통진당 김미희 의원은 그 당시까지 가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통진당 김제남 의원은 그 당시엔 못봤고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당시엔 민혁당은 아니었고 나중에 들어갔겠죠. 김재연이 경기동부출신이고. 이정희는 어쨌든 그 지하조직에 어떤 식으로든 가입을 했겠죠.


    <인보길> 1998년인가 중국에 있덩중 모씨의 중개로 국정원에 출두해서 조사를 성실히 받다가 갑자기 돌변했던 이유는?  '말'지에 국정원이 간첩 조작한다고 역공하는 인터뷰를 했죠? 

    <김영환> 처음 조사받을 땐 절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 대해 기소를 하지 않는다고 전제조건을 해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막판에 국정원에서 13명을 구속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보러 진술서를 써달라고 했죠. '처음 시작할 때 단 한사람도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길래 약속을 깨버렸습니다.


    <인보길> 민혁당 동지들을 구명하기 위해서?

    <김영환> 그럴꺼면 이름을 왜 다 밝혔겠습니까. 핵심간부 중 절반정도가 사상을 전향한 사람들이라 구속하겠다는게 말이 안됐습니다. 그때 추진하고 있던 사람들을 사상전향시키는 작업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죠.


    <인보길> 민혁당을 해체할 때 거부 세력이 많았읍니까?

    <김영환> 사실 거부한 것은 하영옥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만날 수 없었어요. 점조직이었으니까. 다른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석기도 핵심간부였지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의엽도 그랬고. 그러니까 사실 제 주장을 거부한 것은 하영옥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전해듣지 못했습니다.


    <인보길> 그 지하당 민혁당이 합법적 정당으로 변신한게 민주노동당입니까?

    <김영환> 민주노동당은 여러정파들이 합쳐졌지만 민혁당 출신 위주로 운영됐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지하 민혁당이 지금도 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있을 가능성은 있겠지만요.


    <인보길> 지금 종북세력이 공용어가 될 정도로 지상화 되었는데  몸통은 통전부인가요? 어떻게 엮여지는 겁니까?

    <김영환> 공식적 접촉은 통전부고. 지하당을 접촉하는 것은 대외연락부고. 부서가 좀 다릅니다. 옛날에 7~8개 였는데 최근에 통합됐습니다. 자기들이 잘 모르니까 (남한 조직이나 단체들을) 컨 트롤을 잘 못합니다.


    <인보길> 2000년에 쓰신 글을 보면, 김대중 전대통령이 평양 가서 김정일과 회담하고 돌아온 뒤 김영환씨  는 그 남북회담을 매우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영환> 제가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투 트랙정책. 정부에선 대북유화책. 민간차원에선 대북붕괴 추진하고. 정부에선 몰래 민간단체를 지원하는. 그런 것이 북한체제를 빨리 붕괴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 북한체제를 붕괴시켜야한다는, 95년도부터는 대북강경론자가 되었습니다.


    <인보길> 그동안 북한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내재적 접근론같은 말씀을 해왔던데요. 북한민주화운동의 방법론은 무엇입니까?

    <김영환> 북한민주화운동 뿐만이 아니라 통일을 위해서 북한 주민의 정서라든지 문화라든지 북한 주민의 어떤 자존심이라든지 그런 것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자는 그런 뜻입니다.


    <인보길> 대체 무슨 활동을 어떻게 해서 중국과 북한이 합동으로 고문까지 했는지?

    <김영환> 북한민주화운동의 목표는 어쨌든 북한에 자유민주정부수립하여 시민들이 자기들의 사유재산을 갖고 직업을 선택하고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죠. 방법은 여러지입니다. 시민들의 봉기가 있을 수도 있고….

    북한에서 시민혁명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단 하나의 과정을 거쳐 가능하진 않겠지만. 그런게 여러차례의 과정을 거쳐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 때문에 말은 못하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면 잠재력은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인보길> 그 계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김영환> 어떤 계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죠. 엄청난 일을 한 사람도 폭발적 계기를 만들진 못합니다. 다만 계기가 생겼을 때 시민들을 조직하고 장악하고 그런 것은 가능하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 민주화세력을 조직화해서 준비해두는 것이죠. 붕괴의 흐름이 생기면 거기서 민주화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그런 것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인보길> 북한에 조직들이 조금이라도 생겨나고 있나요? 이번에 그것 때문에 가셨나요? '김일성 동상파괴 미수사건'은 무엇인가요? 탈북자 전영철은 북한의 공작에 의한 것입니까?

    <김영환> 글쎄요...그걸 제가 확인해드릴 순 없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테러 문제나 전영철은 잘 모르겠습니다.


  • <인보길> 2005년도에 "조기통일은 위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영환> 북한 주민들의 경우에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도록 해야합니다. 남한사람들은 어렵게 복지체제를 갖게 됐는데 그런 자주적 의식이나 자립의식이나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식이 없으면 안됩니다.

    미국의 하와이 원주민이나 알래스카 원주민들을 보면 스스로 힘으로 뭘하려는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계속 주니까요. 그런 식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보길> 자립경제를 훈련시킨뒤 통일하자는 의미라면 남북 연방제? 동서독은 갑자기 통일 됐는데.

    <김영환> 정치적으로도 훈련이 대단히 많이 돼야합니다. 북한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된 이후에 한 20년정도 훈련시켜서 통일국가 체제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북연방제란 의미라기보다는 북한민주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죠. 독일 같은 경우야 사회발전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던 곳이고.


    <인보길> 한국사회에서 종북세력이건 친북세력이건 좌익들은 대한민국 세력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걸핏하면 극우로 몰아부쳐요. 그런 공격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론이 없을까요?

    <김영환> 전쟁이나 전투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공세적이어야하고 주동적이어야 합니다.

    특히 극좌 주사파들 같은 경우 최대약점은 경직돼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잖아요. 이석기-김재연 사태 같은 경우에도 새로운 환경에 변화하지 못해 고립되는 상황에서 옵니다. 그런 환경을 주동적으로 계속 만들어주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항상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이석기-김재연 사태 같은 경우도 우파에서 준비했다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자멸하는 바람에 고립이 됐습니다. 그 사람들의 최대 약점인 경직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줘서 스스로 자멸하는 그런 길을 가도록 몰고가는 것이죠.


    <인보길> 그걸 누가해야 할까요? 주사파의 원조이자 최고 권위자인 김영환 씨가 나선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주사파들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국회에도 들어가시고.

    <김영환> 정부에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우파단체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여러 가지 세력도 있는 것인데. 저도 할 수 있지만 제가 나서면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라서 함정에 빠지지 않겠죠. 제가 뒤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저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굉장히 강해서 저에 대해 마음을 닫아 걸고 있기 때문에 제가 나서도 그 사람들이 바뀌진 않을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은 특별히 없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역할로 충분히 괜찮다고 봅니다.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인보길> 김정은 체제가 개혁-개방으로 갈 가능성은? 최근 쇼를 많이하고 있는데요.

    <김영환>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다고 보지만 현재 북한체제는 상당히 구조적인 모순이 심화돼 있어서 쉽게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과연 그것을 뚝심있게 밀고 나갈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내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면 후퇴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봅니다.


    <인보길>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영환> 그때 당시엔 흉악한 독재자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하지만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물론 집권과정에서 생긴 문제와 인권탄압에 대한 잘못은 비판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경제적인 발전이나 평화적인 정권교체란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해야겠죠.


    <인보길> 많이 당했을텐데 평가가 후한 것 아닌가?

    <김영환> 개인적으로 당한 것은 당한 것이고, 객관적인 평가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웃음).


  • 인터뷰어 = 인보길 본사 대표
    글 = 김태민 기자
    사진 = 양호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