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운명

김효선 | 최종편집 2012.06.25 14:44:26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말로(末路)

  김효선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사무총장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지 사흘만인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서울 거리는 인민군, 내무서원과 자위대원들, 그리고 남로당원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7월 4일, 서울시 인민위원회(현 서울시청건물) 2층에 마련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울지도부 사무실에는 김응기·이주상·방학세·김창주·김춘삼 등이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실무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노동당 군사위원회의 결정이란 남한에 있는 요인들의 연행·체포 작전으로, 작전 명령은 일명 ‘모시기 공작’이며, 이 공작의 집행위원들은 김일성의 특별지시까지 받았던 것이다.
노동당 군사위원회가 ‘모시기 공작’을 결정하게 된 배경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미처 남쪽으로 피난하지 못한 주요 정치인·종교인·경제인·문화인·기술자·관리·군인들을 찾아내서 포섭하는 데 있다. 군사위원회는 포섭대상을 다섯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다.
첫째 부류는 북한 정권의 수립에 참여한 남한의 정당과 단체로 1949년 6월 25일 남북한의 좌익 성향의 단체로 결성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조국전선)에 가담한 정당과 단체에 속했던 잔류 인사. 둘째 부류는 남한의 행정부와 국회, 정당, 사회단체에 잠복해서 활동하던 북한의 프락치와 이에 동조한 자. 셋째 부류는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한 정당·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 즉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자 및 개인. 넷째 부류는 자수 또는 자발적으로 협력해 오는 자. 다섯째는 연행 또는 체포해야 할 인사들이었다.
방학세는 ‘모시기 공작’의 작전조직을 정보 수집·확인 그룹, 모시기 그룹, 연행·체포 그룹, 감찰 그룹, 심사 그룹, 보장 그룹 등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했고, 김춘삼은 대상들의 소재 확인이 가장 중요하다며 ‘남로당원과 성시백 조직선의 관계자’ 가운데서 반동적인 정당·단체, 관공서, 경찰 등에 들어가 공작했던 동무들의 협조를 얻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이 날 회의에서 ‘모시기 공작’을 위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 공작 그룹 지휘부는 정부국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의 3층에 둔다
• 합동대 지휘부는 성남호텔(현 광교 부근)로 정한다.
• 당 조직에서 협조 인원을 보장받는 문제는 이주상이 책임지고, ‘모시기 공작’의 전반적   지휘는 방학세가 맡는다.
•작전순서는 사전에 정보를 수집·확인해 소재를 파악한 뒤, 정보를 종합·평가하고, 이에 따라 모시기, 연행, 자수 또는 체포 등을 대상에 따라 구체적으로 결정하며, 대상자들을 일단 성남호텔로 집결시켜 개별심사를 실시하고 나서 자기 집에 연금하든지, 아니면 정해진 장소에 따로 또는 단체로 연금하거나 구속·감금한다.[이태호 저 / 신경완 증언(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압록강변의 겨울」16p.]

이렇게 결의한 이들은 드디어 작전을 개시하였다. 7월 5일, 방학세가 머물던 종로에 있는 건물 2층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권태양, 안우생, 김용관, 임백, 김기환, 홍기무, 이찬영, 김약수, 공기찬, 김병환, 권태희, 박흥문, 조성국, 노일환, 황윤호, 이문원 등으로 노동당 중앙당 서울 지도부 이주상이 보낸 것이다. 이주상이 보낸 사람들은 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민족자주연맹·국민당·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과 국회를 비롯한 통치기관에서 남로당 또는 북로당의 성시백 조직의 프락치로 공작했던 사람들로, 요인들에 대한 정보와 소재 등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 40여 명의 남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의 수뇌부나 친지 등 낯이 익은 인물 가운데 거처를 알고 있거나, 수소문해서 알 수 있거나 정부를 수집할 수 있는 대상자들의 간략한 인적 사항을 기록해 방학세에게 넘겨줬다. 명단을 넘겨받은 방학세는 극비리에 작전을 짜서 이튿날인 7월 6일, 30개 전문 공작조, 수백 명의 전문 정보요원과 협조자들, 그리고 각 내무서원 들에 의해 ‘모시기 공작’은 시작됐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권태양은 정보요원 2명과 함께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자주연맹계 인사들의 소재를, 안재홍과 관계가 깊은 권태희와 2명의 정보요원은 안재홍을 비롯한 국민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조소앙의 비서였던 김흥곤과 정보요원들은 조소앙과 사회당 및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최태규, 신성균, 배중혁, 이구수 등은 형무소에서 탈출해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자진 또는 권유에 따라 출두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요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에 협조했다. 이들은 참여파 잔류 인사들로, 이들 대부분은 서울이 점령되자 자진 또는 권유에 의해 자기 계통의 조직을 찾아나서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에 등록한 자들이로 납북인사들과 함께 북으로 갔다.

북으로 간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약수 1964년 1월 10일 사망,
노일환 국회 반민족행위처벌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검찰부 검찰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박윤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강욱중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김병회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1987년 10월 사망.
황윤호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최태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신성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1967년 5월 8일 사망.
배중혁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이구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권태양 김규식 비서,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역임
황윤호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이문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그러나 종북좌익세력들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청산작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국회프락치사건을 터트려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키고, 경찰의 특위 산하 특경대 습격으로 반민특위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와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해괴한 것은 두산백과사전에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투옥 중이던 관련 의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출옥하여 사라졌다고 기술해 놓았다. 출옥하여 사라진 것과 월북 혹은 납북 ㅡ 이들의 행적으로 본다면 납북이라는 용어가 합당한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월북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ㅡ 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모르지 않을 자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거나 혹은 이미 사망한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내에서 발간되는 백과사전에는 출옥하여 사라졌다고 기술해 놓았다. 무엇인가 감추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소위 대한민국 최고의 백과사전에 거짓을 기술해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백과사전마저도 이렇듯 왜곡이 심한 터에 초·중고교와 대학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튼 자진 합류자들인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과 납북인사들은 1951년 9월 10일, 평양 교외인 대동군 시족면 성문리와 철봉리로 이동했다.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를 비롯한 임정요인과 관련자들은 철봉리에 거처가 마련됐고,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과 전직 국회의원들은 성문리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과 철봉리, 장수원 등으로 분산하여 거처가 정해졌다.
이렇게 납북인사들은 여러 부락에 흩어져 기거했고,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은 대개 이렇게 흩어져 있는 납북인사들의 집집마다 한 사람씩 끼어 있었다. 북한 정보국 요원들은 수시로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같이 기거하고 있는 납북인사들의 동태를 물었다. 이에 대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서 국회에서 큰 활동을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 오면 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라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남북인사들의 동태를 밀고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고 하니 그들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동 저서 116-117p.]
그러나 지금도 종북좌익세력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이승만의 음모라고 선동하며, 건국대통령과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며 폄훼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은 이 땅의 청소년들은 왜곡된 사실을 오히려 진실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일부 몰지각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들마저도 종북좌익세력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진정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맞는가?
당신들은 선열(先烈)들이 무엇 때문에 꽃다운 청춘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했는지 아는가? 당신들의 오만이 진정한 독립투쟁가들의 후손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며, 자주독립국 건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종북좌익세력들과 부화뇌동하는 경거망동을 삼가며,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당신들이 누리는 자유는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바탕 위에,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영도(領導) 아래 소련의 팽창 야욕을 분쇄한 반탁·반공운동과 한국민족 역사상 최초의 5·10 총선거 과정에서 2,08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목숨 바쳐 피 흘린 제단 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경거망동을 삼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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