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承晩 대통령과 한국불교

    -李대통령 없었으면 조계종 존재할 수 없었다-

     이법철/스님

    작금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은 언제, 어떤 인연으로 출범할 수 있었을까? 
    1911년 조선총독부는 불교를 장악 이용하기 위해 寺刹令(사찰령)을 제정하고, 남북한에 31本山(본산:本寺(본사) 제도를 조직하여 본사주지는 총독부에서 승인했고, 본사의 산하 末寺(말사)인 1,384의 주지는 도지사가 승인해야만 주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본사와 말사의 주지는 일제의 帶妻佛敎(대처불교)를 지향해야만 우선권을 주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주지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결혼을 하고, 둘째, 돈을 마련하여 총독부 관계자나 도청의 관계자에게 아부와 추파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셋째, 무조건 일제의 강요와 지침에 복종해야 했었다.

     불교정화는 왜 일어났나?

     신라, 고려, 이조로 계승되는 이 땅의 전통불교는 부처님의 계율을 엄수하여 결혼하지 않는 독신승, 즉 비구승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총독부의 농간으로 대처승은 장려되고, 비구승은 씨가 마르듯이 보였다.

     한용운은 오늘날 독립유공자요, 시인으로 유명한 승려이다. 백담사에서는 한용운을 聖師(성사)처럼 추앙하고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한용운이 저술한 佛敎維新論(불교유신론)에 보면, 놀랍게도 한용운은 통감, 즉 總督府令(총독부령)으로 전 조선 승려들을 취처(娶妻)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건백서를 제출했다. 조선총독의 권력으로 전 조선 승려를 강제로라도 자기처럼 취처케 해달라는 건백서를 올리는 한용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해 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의 수기에 의하면, 한용운은 두 명의 부인과 자녀를 둔 소위 대처승이었다. 한용운은 1892년 14살 되던 해에 첫 번째 년상의 아내를 맞아 한보국을 낳았다. 둘째 부인은 1933년에 결혼했으며, 이름은 '유숙원'이라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한보국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두 어머니와 셋이서 법상을 대했는데, 아버지가 수저에 밥을 담으면, 두 어머님이 쇠고기 장조림에 김치 등 반찬을 서로 수저에 얹으려고 경쟁하듯 했었다.” 언제나 세 분은 “화기애애 했다”고 했다. 한보국은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유숙원은 1934년에 한용운의 딸 ‘한영숙’을 낳는다. 한용운을 예로 들었지만, 당시 조선의 승려들은 거의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여 대처승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는 독신승 비구승은 있었다. 그러나 비구승은 7000여명이 넘는 대처승에 비하면 기십명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였고, 대처승들에 밀려 겨우 근근히 연명하듯 숨죽이며 은둔속에 살고 있다시피 했다. 그 때 비구불교를 부활시키는 기적같은 도움을 준 분이 등장했으니 李承晩 대통령이다. 李대통령은 마치 비구불교를 부활시키는 護法王(호법왕)처럼 등장하여 8차에 걸쳐 諭示(유시)를 발표하여 비구불교의 부활을 위해 불교정화의 불씨를 요원의 들판에 뿌리듯 도와주었다.

     李대통령, 왜 불교계에 8차나 유시를 발표했을까?

     李대통령이 비구불교의 중흥을 위해 사상 유례없이 도운 것은 그 배경에 어머니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모친은 불교신자였다. 그의 모친은 북한산 고지대에 자리한 文殊寺(문수사)의 부처님께 기도한 끝에 꿈속에서 용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을 회임했다는 전설이 있다. 李대통령의 兒名(아명)은 承龍(승룡)이었다. 훗날 李대통령이 되어서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문수사를 자주 찾았다. 문수사에 오르는 新作路(신작로)를 열어 주었다. 그는 문수사에 올라 자신이 쓴 붓글씨로 ‘문수암’이라는 편액을 써 걸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문수사를 찾은 것은 1958년 82세 때이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충만한 추억이 작용한 것이다.

     李대통령이 불교정화의 유시를 내리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설에는 이런 얘기가 전해온다. 어느날 미국 고위 정치인과 이익홍 내무장관, 갈홍기 공보실장, 최헌걸 경기도 지사를 대동하여 정릉 경국사를 방문했다. 李대통령은 경국사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사찰에서 아기의 기저귀를 빨고 있는 젊은 여인을 보고, 빨랫줄에 널린 여자의 내복, 아기의 기저귀들이 걸려 잇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승려들이 대처승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보고를 받았다.

     李대통령이 경국사 법당에 들어서니 법당안에 긴 柱聯(주련) 대형글씨에 일본을 의미하는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 ‘천황폐하수만세(天皇陛下壽萬歲)라는 글씨를 목도하고 격노했다. 안내하는 주지에게 “왜 저 글씨를 걸어놓고 있느냐”고 묻자 주지는 태연스레 “왜정 때 그렇게 써 놓은 것”이라고 대답하자 ‘광복 10년이 되도록 그대로 있다니!’ 라고 독백한 李대통령은 일제불교의 잔재에 개탄하면서 승려들의 애국심에 회의를 느꼈다.

     또 李대통령이 충남 관촉사에 갔을 때 주지가 장발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고 양복 위에 장삼을 걸치고 맞이했는데, 그 모양을 보고 승려의 위장된 듯한 모습에 개탄했다. 李대통령은 그 주지에게 처자가 있는 “대처승이냐” 고 묻자 주지는 아내가 두 명이라 태연히 답했다 한다.

     이 밖에도 민정 시찰차 李대통령은 몇몇 사찰을 방문했으나, 대처승이 주지로 있는 사찰에서 많은 실망감을 가졌다. 심사숙고한 李대통령은 어느 날 비서들에게 일제불교의 잔재인 “대처불교가 아닌 전통 비구불교의 진짜 수행자들이 있느냐”고 하문했다. 李대통령이 비구승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비구승들이 마침내 李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에 초빙되었다.

     그 때, 李대통령은 비구승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왜색불교를 물리치고 전통불교인 비구불교를 회복하겠다는 소신과 정책을 공약했다. 1954년 5월 21일 李대통령은 1차 諭示를 공식 발표했으니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각지 명산에 있는 사찰은 독신 승이 모여 수도하는 도량으로 세속의 처자 살림을 하지 않는 것이 고유한 전통인데, 왜정 하에서 한국 승려들도 왜색승을 본받아 사원 안에서 대처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이 나라의 명산대찰이 세속화하여 외국 관광객이 오더라도 보여줄 것이 없으므로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물러가서 살게 하고, 절에는 독신승이 살도록 하여야 되겠다.”

     대한민국을 호국하는 불교되어야

     대처승들에게는 철천벽력과 같은 李대통령의 유시가 8차에 걸쳐 전국 사찰에 퍼져 나갔다. 심산유곡에서 초라하게 은둔하여 수행하던 비구승들은 李대통령의 유시에 고무되어 상경하기 시작했다.

     李대통령이 진정 바라는 불교는 무엇이었나? 저 신라 원광법사가 조국 신라를 호국하여 花郞五戒(화랑오계)를 작성하여 신라의 장병들을 정신무장시켜 삼국통일의 주역을 만들듯이, 또, 서산, 사명대사와 승병들의 호국정신이 임진난 때 조선을 호국했듯이, 李대통령은 자신이 건국한 대한민국을 호국불교 사상으로 호국하고, 보위하여 대한민국을 만세에 전하고, 번영시키는 데 앞장 서라는 뜻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농지개혁을 하고 있었다. 사찰의 많은 농지가 몰수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李대통령은 추상같이 농지개혁을 하면서도 사찰의 농지는 “불전의 공양과 비구승들의 공양”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유시로써 “사찰의 농지는 사찰로 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李대통령은 첫째, 전통사찰은 비구승에게 수행하면서 호국하도록 돌려주었고, 둘째, 사찰의 농지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수용하지 않고, 오늘날 까지 불전공양과 수도승들의 공양에 이바지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 진정 李대통령처럼 불교를 살게 한 정치지도자가 또 있을까?

     李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와 의지에 따라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비구승들은 불교정화를 위해 일제히 궐기했다. 당시 기십명에 지나지 읺던 비구승들은 2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전국 본사와 주요 말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은 7000여명에 이르렀다. 비구승이 대처승을 정화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았다. 그것을 환히 통찰한 李대통령은 불교정화에 軍警(군경)까지 동원해주었다.

     예컨대 합천 해인사는 몇 안되는 비구승들을 군인들이 도와주어 비구승들이 해인사를 접수하게 해주었다. 비구승들이 해인사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李대통령은 해인사로 달려가 치하하고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을 호국하라”는 연설을 했다. 그 날, 李대통령은 해인사는 불교의 영원한 수도장이 되라는 뜻에서 ‘海印大道場(해인대도량)’이라는 대형 휘호를 써 내걸게 했다. 지금 해인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계단위에 解脫門(해탈문)이 있다. 해탈문 안쪽에 李대통령의 그 글씨가 걸려 있다.

     李대통령의 불교정화 의지는 전국 법당안에 ‘황군무운장구, 천황폐하 수만세’의 글귀와 사상을 일소해버렸다. 이번에는 비구승들이 조석 예불 때, 축원에 대한민국을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 대한민국을 위해 순국한 전몰장병들의 왕생극락을 위하고, “대한민국 만만세”의 축원이 전국 법당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승만과 김대중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의 결연한 의지에 따라 불교정화는 성공했다. 비구승들은 1962년 12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단체등록을 하였다.

     李承晩 대통령과 天壤之差(천양지차)로 대비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있다. 98년, 통도사 출신 월하 종정이 제2 불교정화를 실천하려고 할 때, 당시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은 98년 12월 23일 새벽 3시 30분경 사상 유례없이 전경 50개 중대를 대형 포크레인 2대를 앞세우고, 조계종 충무원에 투입하여 군사작전하듯 대형 포크레인으로 총무원을 때려 부수고 난입하여 점령하게 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만만세”를 축원하든 대한불교 조계종은 친북, 종북 승려들로 만원사태가 되듯이 돌변해버렸다.

     조선총독부의 권력으로 조성된 일제불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불교로 되돌려 놓았는데,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권력으로 좌파 불교로 돌변시켜 버린 것이다. 부지기수의 승려들의 입에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승만을 규탄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좌파 승려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승만이 불교정화를 시작한 것은 첫째, 불교를 이용하여 독재를 강화 하자는 것이요, 둘째, 비구, 대처와의 분쟁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불교를 망치고, 기독교를 돕기 위한 음흉한 술책이라고 규탄하는 것이다.

     불교정화의 총수인 고승은 암살당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광복기념회관같은 ‘불교정화기념회관’을 조계사 경내지에서 헐어 쓰레기 장에 내다 버렸다. 승려생활을 하다가 좌파 정치를 하려고 환속한 사람이 있다면, “애국승려”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기념식을 해대는 한국불교가 되었다. 법당안에서 일제의 ‘황군무운장구, 천황폐하 수만세’는 이제 “선군정치만세, 김일성 영생불멸 주체사상 만세”로 바뀌는 듯한 세상이 되었다.

     끝으로, 중국불교는 모든 사찰을 국유화 했다. 북한불교도 중국처럼 모든 전통사찰은 국유화 했다. 만약 좌파 승려들의 염원대로 북한이 한반도를 통일한다면, 모든 사찰은 국유화 되고, 승려들은 인민재판에 회부되고, 불경 보다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암송하면서 죽어가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국의 비구승들이여, 이승만 대통령의 공덕과 피흘려 불교정화를 성취한 선배 비구승들의 공덕을 망각하지 말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민국 수호에 앞장 서주기 바란다. ◇

     李法徹(bubchul@hotmail.com/중앙불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