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진보-짝퉁 보수-정신이상자-배부른 돼지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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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진보와 짝퉁보수

     

    YS 정부 때부터 우리 정치는 진보-보수 구분틀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전세계의 살만한 나라 중에 이 구분틀을 널리 사용하는 사회는 우리 밖에 없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진보-보수 구분틀이 아니라, 리버럴-보수 구분틀을 사용한다.

    진보-보수 구분틀은 착각이다. 진보는 가짜이고, 보수는 짝퉁이기 때문에.

    진보라고? 역사가 어디를 향해 진보(progress)하는데? 누가 그것을 장담하는데? 그 장담을 누가 믿는데?

    보수라고?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해 온 사회에서 보수(conserve)할 게 무엇이 있길래? 보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오래된 가치와 제도를 지키면서(보수하면서) 살고 있는지?

     

    차라리 반동이라 불러라


    진보(progressive)는 처음부터 마르크스-레닌 전체주의자들의 개념이었다. 진보는 항상 ‘인류 역사’를 떠벌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이야기하고, 삶이 아니라 (추상화된, 신격화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버르장머리이다.

    그들은 ‘나’--1인칭단수(the first person singular)를 “문법적 허구”(grammatical fiction)라고 불렀다. ‘나’는 문법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일 뿐,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현실적 존재는 ‘인류의 역사’ 뿐이라는 것. 그 역사가 사회주의를 향해 ‘진보’한다는 것.

    그래서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반동’(reactionary)이다. 역사 진보의 법칙에 대해 ‘반작용’하는 것—이것이 반동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상대방을 ‘반동’이라 불러야 한다. 네 글자--‘반동분자’(reactionary element)라고 부르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좀 겁난다고? 겁날 것 없다. 진보가 좋아 죽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반동’이라 부르면 된다. 이왕이면 ‘반동분자 xx!’라고 불러주면 더 좋겠다.

    1970년대 후반 베트남 보트피플의 물결이 유럽과 미국을 덮친 이후에 ‘진보’(progressive)란 단어는 유럽의 주류 정치 평론에서 사라졌다. 유럽에서 급진 좌파가 몰락했기 때문에. 또한 서유럽 ‘진보’의 천국이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마저 공산당이 스스로를 해체했기 때문에.

  •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직후, 즉 YS 때에 운동권은 족보도 없는 구분틀인 ‘진보-보수’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천박한 제도권 언론은 날름 이 구분틀을 받아 먹었다.

    왜 그랬을까?

    ‘보수’가 되는 것이 우리 사회 상류층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윤리, 이념, 가치, 원칙이 비어 있는 공허하고 탐욕스런 존재들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 상류층의 로망은 바로 “유서 깊은 보수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꺼내놓은 진보-보수라는 해괴망측한 구분틀을 냉큼 받아들였던 것이다!

    50년대 최고의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스크림은 무슨 아이스크림! 양키 놈 x대강이나 빨아!”

    그를 흉내 내면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된다.

    “보수는 무슨 보수! 영국 놈……”


     

    대한민국은 개혁 리버럴이 만들었다


    영국의 역사 사상가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기원 8세기에서 4세기까지 약 4백 년 동안) 아테네의 정치인들은 일련의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사회혁명을 예방하여 막아냈다 Athenian statesmen averted a social revolution by successfully carrying through an economic and political revolution…”

    이 말을 바꾸면 이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 동안 일련의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식 적화를 막고,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번영한 국가가 되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개혁 외발 자전거를 타야 한다. 그 길 밖에는 없다. 대한민국 사람은 태생적으로, 과거/전통 지향적인 보수가 아니라 개혁 리버럴들이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꼽는다고? 자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신 세계는 개혁 리버럴이다. (사사오입 개헌 이전의) 이승만과 (유신 이전의) 박정희는, 당시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리버럴이었고 개혁가였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바탕한 단독정부 수립에, 박정희는 세계시장 체제를 겨냥한 수출공업화에 민족의 운명을 걸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는 엄청난 모험이고 도박이었다. 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노선을 밝혔는데 이는 사실상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행보였다. 그가 현실정치(real politics)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 같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게다. 그는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잠재된 가능성(latent possibility)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개혁이고 리버럴이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 초의 후진국 공업화 이론은 죄다 ‘수입대체’(import substitute) 뿐이었다. 당시의 세계시장이란, GATT에 의해 커버되는 북미, 일본, 서유럽 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글로벌 시장, 글로벌 문명은 훨씬 나중에 발전된 체제이다.

    지금의 글로벌 문명(global civilization)은 1991년 소련 해체에서 1994년 WTO 체제의 출범을 거쳐 1995년 인터넷의 상업화—이 해에, 그 동안 인터넷 망을 운영해 오던 미국의 국가과학재단망(NSFNET)이 해체되고 영리 목적의 인터넷 통신서비스가 탄생하게 되었다—를 통해 시작됐다.

    박정희가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을 확립했던 1960년대 초반에는 ‘세계시장 체제’(글로벌 문명)이 이런 속도(speed), 이런 규모(scale), 이런 순도(purity)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 했다. 박정희가 60년대 초에 세계시장 체제의 앞날을 내다보았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수출공업화 전략이, 세계시장 체제의 발전과 100% 궁합이 맞아 떨어진 전략이었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는 개혁이고 리버럴이다.



  • 이승만과 박정희의 국가발전전략은 보수적인 정치지도자들이었다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전략들이었다. 
    거대한 도박이었다.
    개혁 리버럴 정신을 실현한 국가발전전략이 성공해서 지금 대한민국의 기틀이 잡혔다.


     

    운동의 에너지 역시 개혁 리버럴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이끄는 ‘위로부터의 개혁’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특히 4.19 이후 민주주의, 즉 정치 개혁을 향한 거대한 각성과 움직임이 있었다. 편의상 이 움직임을 ‘운동’이라고 부르자. 이승만과 박정희가 ‘국가발전전략’에 관한 개혁 리버럴을 대표한다면 운동은 ‘시민사회의 태동’에 관한 개혁 리버럴을 상징한다.

    4.19 이후 80년대 초중반까지 약 4반세기 동안 운동의 근본 페이소스(pathos)는 무엇이었던가? 개혁 리버럴 정신에 대한 호소 아니었던가? 그것이 김수영, 김지하, 김민기의 정신세계 아닌가?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종북이 운동권을 장악하면서 운동권에는 전체주의 패거리 근성, 떼근성이 뿌리박았다. “진실에 대한 존중” “개인실존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떼에 유리한 것을 ‘진실’이라 부르는 습관”“떼에 대한 존중”이 자리잡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개혁 리버럴 정신에서 이탈함으로써 스스로 오욕의 길로 들어섰듯이, 운동 역시 개혁 리버럴 정신을 포기함으로써 종북의 길로 타락했던 것이다.



  • 4.19 이후 대한민국 운동의 역사는 ‘종북이 개혁 리버럴의 운동에너지를 장악해 간 역사’였다. 이 장악은, 1991년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란 글을 쓴 이유로 운동권에서 매장되었던 사건에 의해 일단 완성된다. 종북이 완벽히 승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1991년 이후 운동권은 종북의 주도권 아래 존재해 왔다. 1962년의 인혁당, 1968년의 통혁당, 1979년의 남민전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종북의 흐름이 1990년대에 들어서 결정적 승리를 굳혔던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평양을 옹호, 변호하는 데에 급급한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진보의 핵심에는 종북—평양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집단—이 들어 있다. 진보의 앙꼬는 종북이 되고 말았다.

    아, 그러나 종북의 뿌리—평양이 붕괴해 가고 있다. 이제 ‘시민사회 형성에 관한’ 개혁 리버럴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 발전에 관한 개혁 리버럴’ 에너지를 부추기고 강화하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통일 한반도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갖출 수 있다.


     

    강철서신과 잠수정

     

    통합진보당의 핵심에는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다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건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이었던 이석기이다. 그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2번을 맡았다.

    우리 사회의 종북 인맥은 인혁당-통혁당-남민전으로 이어지는 60~70년대의 종북—나는 이를 ‘구세대 종북’이라고 부른다—이 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386 종북'이 있다.

    구세대 종북의 핵심은 통혁당이다. 그 보스(boss)인 김종태는 직접 북한으로 넘어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간 큰 사나이’였다. 구세대 종북 3대 사건 중에, 북한으로부터 ‘지하당’ 자격을 인정받은 유일한 조직이 통혁당이다. 통혁당에 대해 주목할 점은, 1955년에서 1956년에 걸쳐 김일성이 남노당 계열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에, 최초로 김일성체제에 충성을 맹세한 남측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북으로 넘어간 선배들을 개죽음시킨 체제를 상전으로 모시는, 정신적 마조키스트 전통을 세운 것이 바로 통혁당이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신영복과, 한명숙 민통당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이 대표적인 통혁당 관련자들이다.

    386 종북은 1985년에 김영환이 물고를 텄다. 김영환은 이 해에 ‘강철서신’이라는 팜플렛을 썼다. 이 팜플렛은 “1955년에 김일성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서 죽은 박헌영은 정말 미국의 간첩이었을까?”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 “간첩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김일성체제를 상전으로 받들어 모실 ‘마음의 자세’를 준비시키는 문건이었다.

    김영환은 1991년에 강화도에서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후 미화 40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서 민혁당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는 줄곧 ‘수령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수령의 행동과 말은 절대적 진리이다라는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오다가 1997년에 스스로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한다.

    이때 해체에 반대한 인물들이 독자적으로 간첩과 접선해서 북한과의 연결선을 확보하고 지하당을 재건한다. 이것이 재건민혁당이다. 이 인물들이 바로 하영옥, 이석기 같은 사람들이다. 요즘 신문 지상에 떠들썩한 ‘경기동부연합’은, 재건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회가 활용한 대중 공개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신이상자와 배부른 돼지들

     

    재건민혁당 관련자들처럼 진한 종북주의자들이 이제 정당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고 국회의원 뱃지를 달려고 하고 있다.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이들은 불과 10여년 전까지 간첩과 접선하는 지하당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들이 매우 초조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핵심 종북활동가들이 공개적인 정당활동에 나서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운다는 말인가? 종북 운동 자체의 이익으로만 따지자면, 지하운동가-반지하운동가-(노동조합 등) 대중조직 운동가-정당활동가-정치인 등 5개 층위로 역할이 분담되어야 한다. 그런데 2011년 말부터 거의 모든 핵심 종북활동가들이 정당활동에 나서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초조한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원인은 평양에 있다. 북한이 붕괴해 가고 있다는 것을 핵심 종북활동가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제도권 안의 자리매김’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당의 당료든 혹은 국회의원이든, 제도권 안에서 한자리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 덕분에 대한민국 정치가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둘째, 도대체 우리 사회 주류(主流)는 얼마나 무원칙하고 무능하길래, 종북활동가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되었단 말인가? 세계 7, 8위의 무역대국이고,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고도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 society)임에도 불구하고, 거덜난 전체주의 체제를 추종하는 정신이상자들이 정치권의 전면에 나서서 정치를 뒤흔드는 상황 아닌가! 종북을 탓하기에 앞서서 주류 제도권(mainstream establishment) 내부를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주류 제도권은 윤리, 가치, 이념이 실종된 무골충, 무척추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자기 자신의 원칙과 기준을 정립하지 못 한 배부른 돼지들 아닌가?

    종북에 취한 정신이상자들 과, 아무런 윤리, 원칙, 가치도 없이 기득권에 취한 배부른 돼지들이 주물럭거리는 정치 문화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무엇인가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태양이 머리 위 천정(天頂)에 떠서 사물의 그림자를 걷어버리고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순간—위대한 정오(正午)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 우리 건강한 시민들은, 정신이상자들에게는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배부른 돼지들에게는 울타리가 튼튼히 정비된 돼지우리를 제공할 것이다.

     

    보수주의는 예외적 성공이다

     

    보수주의 정치사상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너무 찬란하고 너무 유서 깊고 너무 고귀한 역사적 배경, 역사적 토양 위에서만 자라는 희귀 생명종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중에서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뿌리박은 나라는 영국과 미국, 두 나라 밖에 없다는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뿌리박으려면 그 정치문화가 엄청나게 성숙해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 버크(E. Burke)는 다음과 같은 유세 연설을 하고도 브리스톨(Bristol)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대리인(delegate)으로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representative)로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 저는 서슴없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할 것입니다.”

  • 만약 우리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위와 같은 말을 했다가는 ‘잘난 척하는 해당(害黨) 행위자’로 찍혀서 제명되기 십상이다. 버크 정신의 힘, 정확히 표현하면 200년 전 영국 정신의 힘은, 당시 눈 앞에 전개되고 있던 프랑스 혁명에서 20세기에 등장할 전체주의의 냄새를 맡아낼 정도로 성숙했다.

    버크의 다음과 같은 연설은 인류가 (그의 시대로부터 120년 후에) 전체주의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버크는 ‘신들린 예언자’(The Divine Prophet)이라고 평해진다.


     

    “지금 부수고 만들겠다는 것이 벽돌 쪼가리나 통나무를 그 재료로 삼은 것입니까? 사람이 재료가 된 것 아닙니까? [자의식이 있는 존재](sentient being)에 대해, 그의 상태, 여건, 습관을 갑작스레 바꿀 것을 강제하게 되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아, 그러나 지금 파리의 국회의원들 사이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함과, 어떤 모진 짓이라도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한 자격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의지, 희망, 필요, 자유, 노력,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정치체제에서는 개체성(individuality)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힘’을 위해 존재한다. 모든 것은 ‘힘’의 사용을 위해 희생된다. 이러한 국가는 그 체제 원리, 슬로건, 정신, 운영 등 모든 측면에 있어 선군(先軍) 원칙−군사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는 원칙−이 지배한다. 이런 국가의 목적은 지배와 정복이다. 세뇌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총칼에 의해 사람들의 몸을 지배한다.”

    도대체 버크는 이 같은 깨달음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의 정신은 그의 시대로부터 6백여 년 전인 대헌장(Magna Carta)까지 쉽게 거슬러 오른다. 6백 년 세월에 걸친, 당당하고 자랑스럽고 고귀한 전통이 바로 버크의 정치사상—영미 보수주의—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링컨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링컨은 미국 공화당을 만든 핵심 멤버 중의 한 명이고, 공화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이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을 중시한다”라는 미국 보수주의 전통을 확립시킨 사람이다.

    링컨 시대의 최대의 쟁점은 새로 개척되는 변경주(準州, territory)에서 노예제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슈였다. 이에 대해 링컨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과 행적이, “가능하면 노예제도를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증거를 통해 밝혔다.

    노예제를 변경주로 확대하지 않는 것,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미국의 공화주의 가치(republican value—다수결로 흔들거나 도전해서는 안 되는 가치)라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 또한 그는, 남부가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참혹하기 짝이 없는, 무려 60만 명이 죽어나간 4년간에 걸친 내전을 굿굿하게 치러냄으로써, “이 공화주의 가치에 대한 도전은 단호하게 응징한다”는 전통을 세웠다.  링컨의 이 같은 리더십은 미국의 정신이 어느 수준까지 성숙해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뿌리는 짧게는 미국독립혁명 시절, 길게는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민자 사회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다져진 유럽 사상을,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구현했던 것이다.

    미국의 여류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로빈슨(M. Robinson)이 쓴, 퓰리처 상을 수상한 소설 ‘길리앗’(Gilead, 성경 표기로는 ‘길르앗’)은 남북전쟁에 종군하는 시골 목사를 그리고 있다. 이 초라한 시골 목사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혀서 신학을 공부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목사, 성경, 신학에 국한된 일이었을까? 사상, 예술, 문학, 역사에 있어서도 이 같은 기풍—지중해와 유럽의 유산을 성실하게 소화 흡수하는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북아메리카의 이민자 사회는, 링컨이 나오기 전까지 무려 3백 50년에 걸쳐,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서 다져진 가장 고귀한 사상, 예술, 문학, 역사를 녹여냈던 것이다.  이렇듯 영미 보수주의는 최상의 전통과 토양에서 자라난 가장 예외적이며 가장 고귀한 정치사상이다.


     

    정치사상은 미덕에 관한 스토리이다

     

    정치사상은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에서 나온다. 도덕철학은, 미덕(virtue)에 관한 입맛(taste)이며 가치평가(evaluation of values)이다. 니체(F. Nietzsche)의 철학에서도 명확히 나타나듯이, 살아있는 맹렬한 도덕철학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미덕 체계, 즉 정치사상을 만들어낸다. 정치사상은, 도덕철학에서 만들어지는, ‘미덕에 관한 스토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미 보수주의라 불리는 정치사상은 어떤 종류의 도덕철학에서 나왔을까?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 “영미 보수주의가 어떤 종류의 미덕을 “입맛에 맞는다” 혹은 “가치 있다”고 보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살펴보자.영미 보수주의는 첫째, ‘예로부터 다져져서 내려온 제도를 중시하는 태도’를 미덕으로 보았다. 그러한 미덕을  ‘입맛에 맞는다’ 혹은 ‘가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전해져 내려온 제도에 관한 존중’(philosophy of prescription)이라고 부른다.

    또한 영미 보수주의는 예로부터 다져져서 내려온 가치를 “입맛에 맞는다” 혹은 “가치 있다”고 본다. 이를 ‘전해져 내려온 가치에 관한 존중’(presumptive virtues)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개의 미덕이 바로 영미 보수주의의 내용이다.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영미 보수주의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미덕이 바로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내용이다.


     

    정신의 귀족

     

    사람들은 흔히, 보수주의를 영국과 미국이라는 토양과 분리해 내서,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태도로서 고스란히 수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이 빚어낸 우스꽝스런 희비극이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심미주의자이고 스타일리스트였다. 그가 쓴 글들을 보면 참으로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가장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혔겠는가?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임을 깊게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일본 전통 제도—천황제도를 찬양했으며, 일본 전통 미덕—사무라이 정신에 집착했다.

    1968년 파리 데모 이후 일본에서 급진 좌파의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하자, 1970년 11월 25일에 그는 4명의 동료와 함께 자위대 동부사령부 산하 토쿄 기지에 들어가서 배를 그었다. 할복을 하면 옆의 동료가 목을 치게 되어 있다. 능숙한 사무라이는 할복자의 목을 한 칼에 베되, 목젖 거죽을 남겨서, 잘린 머리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가슴 앞에서 대롱대롱거릴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런데 그만 미시마 유키오의 동료가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목을 대여섯 번이나 찍었지만 베지를 못 했다. 미시마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다른 동료가 나서서 그 목을 대신 쳤다.  참으로 그로테스크하고 끔직한 희비극 피바다였다.

  • (버크가 사자후를 토했던 1800년을 기준으로) 영국의 6백 년 세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진입했던 186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3백 50년 세월 동안 다져진 것과 같은 빛나는 전통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면,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를 본받겠다고 설칠 일이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과거를 본받는 것’을 숭배했지만, 그 과거의 컨텐츠 자체가 별로 숭고하지 못 하다는 점은 깨닫지 못 했던 것이다.

    보수주의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과거가 숭고하고 고귀한 전통을 가진 땅, 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가 곧바로 현재에 적용될 수 있는 땅에서만 뿌리박을 수 있다. 그들에게 과거가 얼마나 ‘빛나는’ 것이었는지, 그 예를 들어 보자. 1688년에 있었던, 의회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닦았던 명예혁명은 전혀 ‘명예’스럽지 않다. 그러나 명예보다 더 찬란하다. ‘빛나는 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이 본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 전통이나 오래 된 것이라면 마구 물려받는 태도가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아 보수하는 것이 명예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주의 자체를 수입할 처지가 못 된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민족주의에 도취된 사람이 아니라면! 수백 년 전의 우리 선조의 제도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물려받아 오늘에 재생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런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툭툭 털고 “보수여, 안녕!”을 외치면 될까? 아니다. 영미 보수주의가 그토록 예외적이고 고귀한 것이라면, 보수주의 정치사상 그 자체가 아니라, 보수주의를 성립시켰던 정신 세계를 본받으면 될 일 아닌가?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우리의 척박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맞지 않는다면 보수주의를 만들어낸 정신세계 자체를 통째로 소화하면 될 것 아닌가?

    우리에게 보수주의는 정치사상이 아니다. 보수주의를 만들어낸 특정 도덕철학으로 이끌어 주는 화두가 되어야 한다. 이 특정 도덕철학은 ‘정신의 귀족’을 만들어내는 도덕철학이다.

    우리에게 보수주의는 정치사상이 아니라, 특정 도덕철학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의 여행 코스가 되어야 한다.

    생뚱맞게 왠 귀족? 귀족이 되지 않으려면 단 하나의 선택--성도착 돼지가 되어 강간살인을 예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귀족이 되는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성도착 돼지(pervert hog)가 될래, 아니면 정신의 귀족(the nobiility of mind)이 될래? --이것이 오늘 한국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이슈이다.

    보수주의는 ‘정신이 귀족인 사람’이, 영국과 미국이라는 매우 예외적으로 풍요로운 토양에서 만들어낸 정치철학이다. 우리에게는 그 토양이 없기 때문에 보수주의 정치사상을 흉내 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의 귀족’이 될 수는 있다. 우리에게 보수는 정치사상(주의, -ism)이 아니라, ‘정신의 귀족’에 이르기 위한 화두인 것이다. 일단 그 도덕철학에 도달한 후에, ‘정신의 귀족성’이란 영역에 도달한 후에, 우리에게 맞는 정치사상을 도출해 내야 한다.

    이렇게 도출한 정치사상은 (우리의 토양이 영미와 다르기 때문에) 보수주의가 아니다. 이 과정이 바로  ‘화두로서의 보수주의’가 해내는 역할이다. 일찍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폭군만 과거를 이용하고 버리는 게 아니야.
    폭도는 더 황당하지.
    그래서 나는 과거가 더 불쌍해.
    폭도들은 기껏해야 자기 할아버지 시대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하거든.
    할아버지 시대에서 시간 끝! 더 이상 과거란 없음!

    과거는 모두 버림받아.
    폭도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시간은 얕은 물에 처박혀 익사하게 돼.
    폭도의 시간은 할아버지 시대에 끝나니까.

    그래! 형제들!
    새로운 귀족 집단이 필요한 거야!
    폭도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
    폭군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
    새 율법 서판에 새 율법을 이렇게 써 넣기 위해서.
    “고귀하게 되어라!”

    귀족 집단이 생겨나려면,
    고귀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돼.
    고귀한 사람들이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돼야 돼.
    내가 전에 우화로 이야기한 적 있지?
    “하나뿐인 신이 아니라,
    이렇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게 바로 [신다움]이잖아!”
    귀족도 마찬가지야.
    많은 사람이 귀족이 될 때 [귀족다움]이 존재할 수 있지.

     아! 형제들!
    나는 자네들을 새로운 귀족이 되는 길로 이끌어 귀족에 봉(封)하는 거야!
    자네들은 미래의 씨를 뿌리고 미래를 낳고 미래를 키워야 돼.

     

    장사치는 황금을 주고 귀족 신분을 사지.
    하지만 내가 봉한 귀족은 돈으로는 살 수 없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전부 싸구려뿐.

    어떤 집안, 어떤 핏줄 출신인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를 귀족으로서 자네의 명예로 삼아야 돼!
    현재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네 의지와 발걸음을 귀족으로서 자네의 명예로 삼아야 돼!

    자네가 귀족이 된 것은 임금을 섬기기 때문이 아니야.
    임금은 무슨 개뿔!
    자네가 귀족이 된 것은 기존 가치의 수호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야!
    기존 가치는 무슨 개뿔!

    자네 집안이 궁정에서 처신을 잘했기 때문도 아니지.
    자네가 궁정이라 불리는 얕디얕은 웅덩이에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플라밍고처럼 오랫동안 서 있는 법을 배웠기 때문도 아니지.

     

    오랫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것!
    궁정의 알랑쇠들한테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지.
    그래서 궁정의 알랑쇠들은 죽은 후에 얻게 될 기쁨 중에
    [앉아도 된다고 허락 받은 상태]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믿지!

    자네가 귀족이 된 것은
    성령이 자네 조상을
    [약속된 나라]로 데려갔기 때문도 아니지.
    아무튼 나는 그 [약속된 나라]에 대해 찬양하지 않아.
    그 나라에서 자라는 나무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나쁜 나무,
    십자가라고 불리는 나무이기 때문이야.
    그 나라엔 찬양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

     

    성령이 기사(騎士)들을 이끌면
    항상 머리가 꼬인 놈과 성미가 비틀린 놈이 제일 앞장서서 설쳐!
    아, 물론 염소와 거위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함께 가고 있지.

    아! 형제들! 자네들, 새로운 귀족의 귀족다움의 근본은
    뒤를 보지 않고 앞을 보는 것에 있어!
    자네들, 새로운 귀족 집단은 세상의 모든 나라로부터 따돌림 당할 거야.
    자네들은 모국도 없고 조국도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자네들은 먼 미래에 등장할 우리 아이들의 나라를 사랑하게 될 거야.
    [우리 아이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을 귀족다움의 근본으로 삼도록!
    [우리 아이들의 나라]는 머나먼 바다 건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에 세워져.
    자네들이 타고 갈 배가 그 머나먼 여행을 견디어 내기를! 제발!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56:77~56:90, 박성현 번역)


  • 자생초: 자유, 생명, 촛불


    보수주의 정치사상을 만들어낸 도덕철학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버크와 링컨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을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에 대해 이름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뒤늦게 이곳 한국에서, 이를 ‘자생초 정신’자유, 생명, 촛불 정신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

    자유는 개인실존의 존엄성을 뜻한다. 개인실존은 우주, 세계와 분리된 ‘나’를 느끼는 상태이다. 이 ‘나’가 인간조건(human condition)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전체주의 인간심리를 고발한 세계적 명작 ‘Darkness at Noon’(‘정오의 어둠’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가 절판된 바 있음)에서, 스탈린 숙청으로 사형수가 된 ‘혁명원로 볼셰비키’ 루바쇼프(Rubashov)는 처형을 몇 시간 앞두고 개인실존을 깨닫는다. 작품은 이렇게 그린다.

    그는 벽을 두들겨서 옆방 죄수에게 한 단어로 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2번 그리고 4번. 영문 알파벳 25자를 다섯 글자씩 다섯 줄로 배열한 문자표. 2행의 4번째 문자. ‘I’(나)….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마음먹고 ‘I’를 두들긴 적 없었다. 아마 무의식 중에서라도 한번도 두들긴 적 없었을 것이다….루바쇼프는 생각했다.

    “인류의 고통을 없애는 거대한 사회혁명—사회적 수술을 집행한다고? 그런 수술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추상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면 아마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1인칭 단수에 적용된다면? 2번-4번 두들김이 뜻하는 ‘나’에 대해 적용된다면? 뼈, 살, 피, 피부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에 대해 적용된다면? 혁명은 우스꽝스런 짓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 자유는 인간이 사회의 부속품, 혹은 전체주의 체제의 좀비(zombie)가 아니라, 개인실존으로서 자기자신을 느끼고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래서 자유가 소중하다. 버크와 링컨의 정신세계를 살피다 보면 인간을 개인실존으로 파악하고, 바로 그 때문에 ‘자유’를 소중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생명.


    생명은 흐름이다. 버크는 ‘영구사회계약론’(Contract of eternal society)을 주장한다. 즉 사회계약은 당대의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까마득한 선조에서 까마득한 후손에 이르기까지 맞닿아 있는 계약이라고 말한다. 요즘 고고인류학의 개념을 빌자면,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현생 인류의 어머니’(mitochondrial Eve)에서 출발해서 인류 최후의 생존자에까지 이어지는 계약이란 이야기이다.

    또한 생명은 진실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진실은 생명이 생존하고 번영하는 조건을 조명해주는 지식과 정보이다. 진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이익, 관점, 이해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머리의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진실에 대한 용기’(courage for truth)를 가져야 한다.

    남북전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그 참상과 희생이 너무나 끔직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극심한 회의와 의심에 시달렸다. “과연 이토록 참혹한 전쟁을 치러낼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남부가 독립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던 편이 낫지 않았을까?”—이같은 자기 회의가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링컨은 이런 회의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에 당당히 맞섰다. 끊임없이 진실을 의심하면서도 진실을 확신하는 상태—이것이 바로 링컨의 정신세계였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시길!” (May God be with us!) 이에 대해 링컨이 이렇게 되받아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를!”(May we be with God!) 링컨의 말은 얼핏 보면 회의와 의심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이 끔직한 전쟁을 일으켜서 치러내고 있는 우리 북부가 과연 진실의 편, 생명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본 사람의 원숙한 정신을 보여 준다. 


    셋째 촛불.


    촛불은 각성이며 자아이다. 그래서 교회와 사찰에 촛불을 켠다. 정치 행동에 있어서는 광우병 패닉(panic) 발작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상태’(vigilance)를 상징한다. ‘각성된 자아가 생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킴이 역할을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무엇이 각성이며 자아인가? 개인실존으로서, 자기 자신의 불이익,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것—이 길만이 ‘자아됨’(becoming oneself)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촛불은 바로 자아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버크는 이 상태를 ‘기사도’(chivalry)라고 불렀다. 약자와 생명을 옹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자긍심과 명예로 삼는 용감한 태도를 뜻한다. 프랑스 혁명의 광기를 지켜보면서 버크는 이렇게 개탄했다. 

    “유럽의 영광은 끝났다. 기사도의 정신은 이제 완전히 파괴되었다!”

    링컨은 처음에는 “변경주로 노예제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정책을 옹호했지만, 남북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나서는 ‘분리독립을 선언했던 남부주’(적성 지역)의 노예를 해방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헌법을 수정해서 모든 지역에서 노예를 해방시켰다. (노예주 중에 미주리, 켄터키, 메릴랜드, 델라웨어는 북부 편을 들었었다. 전쟁 중의 ‘적성지역 노예해방령’은 이 4개 지역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링컨은 암살되기 직전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인 아동에 대한 보통교육’과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추진했다. 이는 사회 전체를 충격에 몰아 넣은 개혁조치였다. 이 개혁드라이브는 링컨의 강력하고 원숙한 ‘자아됨’—촛불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불이익, 불편함을 뛰어넘어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태도만이,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흑인 남성 투표권 이슈가 링컨의 암살을 가져왔다고 추정된다. 링컨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생물학적 자살이었다. 그러나 링컨이 ‘순교’한 덕에 그의 죽음으로부터 5년이 지난 1870년에 흑인남성투표권이 실현되었다. 백인 여성의 투표권보다 꼭 반세기 앞선 일이었다.

  • 영미 보수주의 안에 개혁코드가 내장되어 있는 것은 보수주의가 자생초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버크의 경우, 생전에는 ‘보수주의’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그는 개혁의 화신이었다. 왕권을 축소하고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했다. 보스정치를 뛰어넘어 정당정치를 실현했다. 인도의 식민지지배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에 평생을 바쳤다. 미국 독립전쟁 전에, 북아메리카에 대해 획기적인 자치권 부여와 세금 면제를 주장했다. 링컨의 개혁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영미 보수주의 안에 이 같은 강력한 개혁코드가 내장되었던 것은 보수주의의 뿌리가 ‘기득권의 옹호’가 아니라, 자생초 정신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덕철학에서 미덕, 즉 정치사상이 나온다

     

    자생초는 보수주의 정치사상이라 불릴 수 없다. 정치사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관점이요 도덕철학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자생초는 보수주의를 만들어냈다.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덕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을 만들어낼까? 어떤 미덕, 어떤 정치사상을 만들어낼까?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고 번영을 이루게 해 온 두 개의 국가발전전략자유민주주의세계시장체제의 적극활용(인류적 차원의 분업-교환 체제 발전 경향의 적극활용)—이 도전 받고 있는 이 한심한 상황은, 우리의 미덕이 미약하고 타락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영국을 위협했을 때 영국의 자생초 정신은 두 개의 미덕(예부터 전해 오는 제도에 대한 존중, 예부터 전해오는 가치에 대한 존중), 즉 보수주의를 만들어냈다.  (휘트니 엔진에 의해 목화노예농장이 사상 최대의 번영을 누리는 상황 때문에) 남부 노예주(州)의 교만이 극에 달했을 때 미국의 자생초 정신은 링컨 공화주의(미국의 보수주의의 완성판)를 만들어냈다.

  • 붕괴해 가고 있는 평양 수령전체주의와 연결된 종북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두 가지 근본원리를 조롱하고 약화시키고 있는 위기에서 우리의 자생초 정신은 어떤 미덕을 만들어낼 것인가? 무엇을 ‘미덕’이라 부르고 숭상하는 기풍을 만들어낼까?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자생초 정신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살펴 보자.



    부족한 자생초 정신, 강력한 경제 펀더멘탈


    고백하자. 우리에게 자생초 정신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런 정신의 힘이 존재했다면, 수령전체주의와 연결된 정신이상자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농단하는 어이없는 일은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개인실존의 생존조건 이 아니라, ‘향유하는 즐거운 방종’으로 타락했으며, 생명‘진실의 길을 따라 벋어가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연민의 대상쯤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촛불‘각성된 자아’의 상징이 아니라 “청산가리가 미국 쇠고기보다 안전하다”는 엉터리 소리에 속아서 떼를 이루어 울부짖는 패닉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운이 좋다. 정확히 말하면 땀을 제대로, 아주 많이 흘려놓았다. 그래서 도시무역국가가 아닌 나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시장 체제와 합일체(合一體)를 이룬 상태에 도달했다. 일본이나 독일조차 우리와 비교하면, 세계시장 체제와의 결합 정도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 한참 뒤떨어진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008년 세계 금융공황에서 대한민국 경제가 보여준 성공적 적응 케이스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논문의 소재가 되고도 남는다. 금융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한국은 세계시장 체제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상황은, “세계시장 체제와 밀접하게 결합한 경제체제가, 자기 내부의 건전성과 역동성을 강력한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다면,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오히려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새로운 진실을 보여 주었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연구 테마이다.

    세계시장 체제는,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1991년~1995년 사이의 세 가지 거대한 변화—소련 붕괴, WTO 체제의 출범, 상업적 인터넷 통신의 시작—에 의해 ‘글로벌 문명’이라 불러야 마땅한 상태로 진입했다.

    약 80년 전만해도, 토인비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을 다섯 개로 나누었다.

    서구문명, 그리스-러시아 문명, 이슬람 문명, 극동 문명, 힌두 문명. 지금 우리는 이 모든 문명들이 녹아서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변환되어 가고 있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만약 토인비가 지금 세상에 대해 글을 쓴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글로벌 문명—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최대 행운은, 자생초 정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도, 글로벌 문명에 있어 가장 유망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그 덕에 우리의 머리는 덜 깨어 있지만, 우리의 몸은 매 순간 세계시장 체제에서 땀 흘려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자생초 정신이 각성된다면, 바로 이 ‘몸이 흘리는 땀’ 덕분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의 생존방식/번영방식이 우리의 정신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신의 힘이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몸이 정신의 각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상태—우리는 이 상태에 접어든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 간다. 글로벌 문명이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는 내내 이 상태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자생초라 불리는 ‘정신의 귀족’의 미덕: 

    직업윤리와 대중소통


    지금 사회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특징은 앞서 밝힌 바 있는 ‘글로벌 문명’(인류적 차원의 분업-교환-소통 체계의 급격한 발전)이다.

    둘째 특징은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 society)이다. 이는 경영학을 만든 사회사상가 드러커(P. Drucker)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정립한 개념이다. “전문지식노동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지식노동이 노동의 일반적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세상은 위의 두 가지로 특징지워진다. 따라서 자생초 정신에서 도출되는 미덕 역시 위 두 가지 특징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이 미덕은 둘이다. 하나는 직업윤리(professional ethics). 다른 하나는 대중소통이다.


    첫째, 직업윤리.

    IMF 때에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란 말이 널리 쓰였다. 회계사, 변호사, 전문경영인이 거짓말하고 데이터를 속이고 도둑질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도덕이 무슨 도덕인가?”라는 말을 묻지 않았다.

    이 도덕이 바로 직업윤리(professional ethics)이다. 19세기 후반 최고의 사회사상가 뒤르깽(E. Durkheim)이 정립한 개념이다. 뒤르깽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의) 서유럽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작동 원리가 바로 ‘직업윤리’라고 말했다. 뒤르깽이 이 같은 지적을 한 지 이미 엄청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세상은 글로벌 문명 속의 고도 지식기반사회가 되었다. 지식노동자가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식노동자의 범죄가 무엇인가? 바로 직업윤리를 어기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직업윤리의 타락이다.

    회계사가 회계데이터를 조작하고, 여검사가 벤츠를 뇌물로 받고 몸을 팔고, 의사가 의료윤리를 어기고 MRI를 빼내고, 의사 및 보건검역학자들이 광우병 패닉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고, 현직 부장판사가 중국공산당 식 사법주권(judicial sovereignty)을 떠들 때 법학자들이 이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전문경영자가 자신이 봉직하고 있는 회사 M&A에 개입해서 천문학적 뒷돈을 챙기고, 원자력 발전소 운영 엔지니어가 거짓 보고서를 작성하고, 교사는 공교육의 붕괴에 대해 무관심한 채 자신의 철밥통만 챙기고….

    대한민국의 직업윤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위협하는 루머, 거짓의 99%는 사회 각부문의 전문지식인들이, 자신의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를 가지고 나서면 해결될 일들이다. 종북주의자라 불리는 정신이상자들이 대한민국 시스템을 조롱하고 헐뜯으며 온갖 교만을 떨고 있는 지금 상황의 뿌리에는 바로, 전문지식층의 직업윤리가 깊게 타락해있다는 심각한 원인이 존재한다.


    둘째, 대중소통에 대한 열정.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결핍증상은, 제도권 전문지식층이 대중소통에 대해 아무런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른바 온건한 보수 혹은 제도권 성향 전문지식인 중에 대중소통에 온 정렬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갈릴레오가 죽을 뻔 했던 이유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지동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제작 노하우를 공개했으며,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Dialogo)을 라틴어가 아니라 시정잡배의 언어인 현대 이탈리아어로 써서 발표했다. 한마디로 무지렁이 시정잡내들에게까지, "망원경을 만들어 당시 눈으로 하늘을 봐. 당신이 쓰고 있는 시정잡배의 언어로 쓰인 내 책을 읽어 봐. 그리고 당시의 머리로 생각해봐. 교회와 사회지배계급이 얼마나 황당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통감해 봐!"라고 부르짖은 셈이다.  “대중과 진실을 공유하겠다”라는 관점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문 위키피디아와 같은 혁명적인 지식공유운동의 아이콘이 바로 갈릴레오가 되었다.

    드러커는, 대중소통에 대한 열정이 없는 지식인의 행태를 ‘국가배반행위’(treason)라고 불렀다. 전문 지식층은, 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지식을 쉽고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글을 쓴 다음에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읽어보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 물론 일본의 가정부 아주머니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유려한 필체로 한자를 쓰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나날이 고도화되어 가고 있는 글로벌 문명 속의 지식기반사회. 지식노동자는 그러한 문명, 그러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장 숫자가 많은 구성원들이다. 그 중에서도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전문지식인들이 직업윤리를 갖추고, 진실을 대중에게 소통하려는 열정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전문지식층의 직업윤리가 타락한 사회, 대중소통에 대한 열정이 턱없이 부족한 채 오직 ‘전문가의 용어’(jargon)만 사용해서 자기들끼리만 쑥덕거리는 사회, 공교육이 붕괴한 사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은 자녀를 모두 해외에 빼돌린 채 ‘붕괴한 공교육’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사회—이런 사회에 대해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이것이 바로 자생초 정신의 각성이다. 이런 사회는 학벌이 짧고 집안 재산이 부족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너는 이 글로벌 문명에서, 영원토록 3류 부품으로 살아야 하는 신세야. 너무 열 받지 마.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이 상태의 심각성을 직시하는 것—이것이 바로 직업윤리대중소통이라는 두 가지 미덕의 출발점이다. 정신의 귀족이라면, 즉 자생초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심각한 상황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직시야말로 바로 자생초 정신의 각성이다. 좌, 우, 진보, 보수, 정의, 민족—이런 용어들은 이 두 개의 근본 미덕 앞에서는, 케케묵은 피상적 정치 수사(rhetoric)에 지나지 않는다.


     

    미덕은 사회발전원리와 맞물린다


    직업윤리와 대중소통은 “생명이 번영하는 조건을 무엇으로 보는가?”라는 관점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 관점에서만 직업윤리와 대중소통이 성립할 수 있다. 생명이 번영하는 조건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직시하는 태도를 ‘진실되다’(truthful)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전문지식층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진실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로 ‘직업윤리’이며, 그들이 일반 대중에게 진실을 열심히 알리는 것이 바로 ‘대중소통’이다.

    ‘생명이 번영하는 조건’을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가발전전략’이라고 부른다. 상당한 시일을 두고 국가발전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할 전략으로 확립되면, ‘사회발전원리’로 승화된다. 이 같은 사회발전원리가, 링컨이 주장한 공화주의 가치(republican value)이다. 감히 다수결을 통해, 머릿수를 내세워 흔들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한 국가의 근본 가치이다. 공화주의 가치에 대한 도전은 “내전을 하자”는 이야기이다.

    남부의 노예주(州)들은, 변경주로 노예제를 확대할 것을 목표로 “노예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주(州)마다 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라는 자못 그럴 듯한 주장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그들은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다. 이런 주장이었다.

    “주권은 인민에 있다. 노예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주(州)마다 투표를 통해 결정하자!”

    얼마나 당당한 듯 들리는 주장인가! 링컨은 이 주장에 대해 싸웠던 것이다. 링컨은 이런 내용의 주장을 했다.

    “노예제를 확대하지 않는 것, 인간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확대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이 결정했던, 미국의 공화주의 가치이다”

    이 공화주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인민주권’을 내세운 남부의 분리독립—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남부의 분리독립을 ‘반란, 내전’으로 규정하고 진짜 초대형 내전을 일으켜서 박살냈다. 남부 노예주(州)들이 의기양양하게 분리독립을 선언했을 때, 그리하여 어설픈 내전 상태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북부가 설마 그토록 지독하고 참혹하고 집요한 전쟁(내전)으로 확대시켜 남부를 정벌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했다.

    사회발전원리로 승화된 국가발전전략은 공화주의 가치(republican value)가 된다. 이때 공화주의는 루소(J. J. Rousseau)와 자코뱅(Jacobin)이 만들어낸 전체주의적 공화주의가 아니다. 링컨의 공화주의이다. 다수결, 머릿수를 내세워서 도전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근본 가치를 뜻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두 개의 국가발전전략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래서 ‘국가발전전략’은 이제 ‘사회발전원리’(principle)가 되어야 마땅한 상태가 되었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글로벌 문명(세계시장 체제)의 적극 활용(인류 차원의 분업-교환-소통 체계의 적극 활용)이다.

    이 두 사회발전원리는 사회적 차원에서 표현된 자생초 정신에 다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은 개인실존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방종을 향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개인실존의 존엄성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는 상태’—우리는 이를 ‘자유’라 부른다. 개인실존은 운명을 만날 때 그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운명을 당당하게 껴안는 상태. 그리하여 스스로에 대해 “나는 운명이다!”(I am destiny!)라고 확신하는 상태가 개인실존의 완성점(consummation)이다. 바로 이 까닭에 “자유는 필연의 또다른 모습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글로벌 문명을 적극 활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까닭은, 그것이 생명, 특히 한반도 사람들의 생명이 벋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통일 한반도는, 세계를 누비는 역동적 인간들의 발진 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5천년 동안 무지막지한 블랙홀의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왔던 ‘대륙의 폭력성’(continental violence)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중국의 동화(同化) 중력은 지중해 그리스-로마에 비해 수백 배, 수천 배에 달했다. 반면 중국 문화에는, 그리스-로마 헬레니즘에 깔려있는 개방적 보편적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바로 이 피비린내 나는 블랙홀 증력(bloody black-hole gravity)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오늘 우리에게 물려준 문화유전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제 통일 한반도를, 세계를 누비는 역동적 인간을 위한 발진 기지로 만듦으로써 5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고귀한 시도를 완성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증명해 낸 두 가지 사회발전원리는 이렇듯 자생초 정신과 직결되어 있다. 이 까닭에 자생초 정신에서 나온 두 개의 미덕—직업윤리와 대중소통에 대해서는,  바로 이 사회발전원리를 기준으로 윤리성(ethicality)과 소통성(communicativeness)을 가늠해야 한다. 직업윤리대중소통이라는 미덕의 사회 정치적 기준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강화, 글로벌 문명의 적극활용이 되는 것이다.


     

    촛불은 내려가며 탄다

     

    욕망, 시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종종 자기 자신의 이익, 입장, 관점을 뛰어넘어 진실과 생명을 옹호한다. ‘머리의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과 ‘진실에 대한 용기’(courage for truth)는 때로 그를 세상과 정면 충돌시켜서 ‘비극적 운명’으로 완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 자신인 존재’—나다운 존재—자아(becoming oneself)—로 단련되어 간다.

    이것이 자생초—정신의 귀족이 이해하는 ‘삶’이다. 정신의 귀족인 사람에게는, 이같은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행태이다. 이런 삶에 대해 정신의 귀족은 이렇게 말한다. (니체의 말이다)

    “그게 인생이었어? 좋았어! 한 번 더!”

    촛불은 자아됨, 나다움, 각성의 상징이다. 촛불은 위로 타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가며 탄다. 욕망, 이해관계, 시비가 사납게 날뛰며 충돌하는 먼지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며 탄다.

    촛불은 그래서 “생명의 도도하고 짙은 강물—갠지스나 메콩 강 같은 탁류—을, 깊은 사랑으로 응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촛불은 이 태도, 즉 ‘지킴이’(vigilance)의 상징이다.

    자생초 정신이 만들어낸 두 개의 미덕, 직업윤리대중소통촛불정신이 될 때 완성된다. 촛불 정신이란 무엇인가? 세상 속으로 튀어 들어가서 세상과 엮이는 삶(engagement)을 지향하는 정신이다.   ‘engagement’는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겨루기, 싸움, 전투를 뜻하기도 하고 혼약을 뜻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엮임’을 뜻하는 것이다. 정신의 귀족이 감행하는 ‘내려가기’(untergang, going-under)를 뜻한다.

    욕망, 이해관계, 시비가 사납게 날뛰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 편견,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것—이것이 바로 ‘아래로 타는 촛불’의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귀족이다. 이것이 바로 버크와 링컨을 만들어낸 토양이다. 이것이 바로 영미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희귀한 정치사상을 만들어낸 도덕철학이다. 

    우리는 보수주의라는, 따라 입을 길 없는 무거운 갑옷을 탐낼 필요가 없다. 우리 선배 세대가 증명해낸 사회발전원리—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 문명의 활용—를 옹호/강화하는 직업윤리와 대중소통으로 충분하다. 이 두 개의 한없이 경쾌한 듯 보이는, 한없이 기능적으로 보이는 미덕으로 충분하다.

    이 미덕은 촛불이 될 때 완성된다. 욕망, 이해관계, 시비가 사납게 날뛰며 충돌하는 먼지구덩이 (시인들은 이를 ‘도도히 흐르는 생명의 강’이라고 불렀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 편견,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존재—‘나다운 존재’, 즉 ‘자아다운 자아’가 될 때 자생초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미덕(정치사상)이 완성된다.


  •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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