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 死後(사후) 베리아 제거 작전 연구 
      
    趙甲濟   
     
     1953년 3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죽었을 때 형식상 후계자는 말렌코프 수상 겸 제1비서였으나 實權(실권)은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잡았다. 베리아는 스탈린의 숙청을 지휘하여 수백 만 명을 죽이고 수용소에 보낸 惡魔(악마)였다. 베리아는 스탈린이 죽자 때가 왔다고 기뻐했다.
     
      그는 그토록 숭배하던 스탈린을 공공연하게 욕하면서 동료 정치국원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베리아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를 포섭, 세 사람이 소련 공산당을 지도하자고 유혹했다. 말렌코프는 사무적인 인물이었으나 흐루시초프는 正義感(정의감)과 용기의 소유자였으며 권력투쟁의 비결을 아는 사람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먼저 말렌코프를 포섭, 베리아를 제거해야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베리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비밀경찰과 경호병력을 장악한 그를 두려워했다. 흐루시초프는 그 전에 이미 불가닌을 포섭한 상태였다. 흐루시초프가 주도하여 다른 정치국원 포섭공작이 진행되었다. 도청을 염려한 흐루시초프는 음모를 신속하게 진행해야 찬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흐루시초프는, 한편으론 정치국 위원들에게 베리아가 고립되어 있음을 보여줘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는 정치국 회의 때 여러 번 베리아의 제의를 정면에서 반박하였고, 그때마다 다른 정치국원들이 동조하였다.
     
      베리아를 두려워하던 모든 정치국원들이 흐루시초프와 말렌코프의 설득에 넘어갔다. 문제는 체포작전이었다. 말렌코프는 軍 장성들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크레믈린 경호는 베리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軍 장성들만이 무기를 들고 크레믈린 宮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확대 정치국회의가 열렸다. 말렌코프가 사회를 보았다. 흐루시초프가 옆자리에 앉은 베리아를 反黨(반당)분자로 모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베리아는 흐루시초프의 팔을 잡곤 "니키타, 뭘하는 거야?"라고 했다. 흐루시초프는 "들으면 알 거야"라고 뿌리친 뒤 연설을 계속했다. 그는 베리아가 간첩일 가능성이 있으며 스탈린이 죽은 뒤 여러 가지로 反黨행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흐루시초프는 "이런 그가 공산주의자일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베리아를 규탄하는 발언들을 쏟아놓았다.
     
      흐루시초프는 그를 모든 公職(공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할 것을 제안하였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찬동하였다. 말렌코프는 책상 위의 단추를 눌렀다. 軍 장성들이 권총을 꺼내 들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말렌코프는 "수상의 자격으로 베리아를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2차 대전의 영웅인 주코프 元帥(원수)가 권총을 겨누며 "손 들어!"라고 소리쳤다.
     
      베리아가 옆에 둔 가방에 손을 대는 것을 흐루시초프가 막았다. 나중에 가방을 열어보니 총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
     
      베리아가 체포된 것은 스탈린이 죽은 지 석 달 뒤였다. 베리아와 그 부하들은 재판에서 死刑(사형)선고를 받은 뒤 처형되었다. 베리아 제거 工作(공작)을 주도한 흐루시초프는 곧 제1서기 및 수상으로 올라가더니 1956년 2월 제20차 全黨(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여 국제공산주의 세계를 뒤흔들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毛澤東(모택동)의 死後(사후), 문화혁명을 주도하였던 4인방은 한 달 안에 제거되었다. 스탈린의 死後(사후) 석 달 안에 베리아는 제거되었다. 둘 다 군부(軍部)가 체포조 역할을 하였다. 神格化(신격화)된 두목이 사라지면 반드시 권력(權力)투쟁이 일어난다는 게 공산주의 체제의 한 법칙이다. 김정은은 몇 달(또는 몇년)을 버틸까? 문제는 북한판 등소평(鄧小平)과 흐루시초프가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