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2011년 12월8일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진주만 공습을 정확히 예언, 미국과 세계를 놀라게 한 책이 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1941년 영어로 출간한 <Japan Inside Out>이다. 이책을 번역, 요약판을 낸 저술가 박성현씨의 해설을 옮겨 싣는다. 원문은 http://www.duduri.net 참조.


  • 우남(雩南) 이승만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를 존경하든 혐오하든 그 캐릭터의 에너지와 행적은 매혹적이다. 필자는 20세기 전세계의 정치인 중에 우남만큼 그 행적과 성취가 기이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과거를 망각하고 싶어한다. 대한민국은 참담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나라였고,  우남은  그  시대의  한계와  업보를  몽땅  걸머져야  했던  인물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불안하고 못살고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건국 60년이 지난 지금에는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다. 우남에 대해 “고약한 늙은 독재자”쯤으로 치부하고 싶어하는 심리의 바닥에는, 대한민국이 탄생 때부터 고귀하고 강력했던 민족 국가였다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깔려 있을 게다.
    이는 착각이다. 모든 고귀하고 강한 것은 천하고 미약한 것에서 나온다.

    우리의 뿌리를 알고 싶다면 우남이라는 노인이 일흔 네 살의 나이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1948년 앞 뒤의 시대적 한계와 업보를 조금은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남은 1954년 불교 정화 정책을 시작한다.
    일제는 매우 치밀하고 악랄한 종교 정책을 폈었다. 천황주의(Mikadoism)는 일본 열도, 일본 국민, 일본의 지배자가 모두 신 (神)이 만든  특별한  존재라는  강력한  전체주의적  신정일치(神政一致, theocracy) 믿음  체계였다. 따라서 기독교든 불교든 모두 이 천황주의 믿음 안의 한 부분으로 관리 받았다.
    일본의 목사들은 공공연하게 천황주의를 설교했다. 유럽이나 미국과 깊은 연관이 있는 기독교가 이 정도로 왜곡되는 상황인 만큼, 불교는 더 참혹한 상태에 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한국 조계종의 뿌리를 뽑고 우리 불교계를, 처자식을 두고 사찰을 세습하는 대처승들이 주도하는 왜색(倭色) 불교로 변질시켰다.
    그 결과, 1950년대 초 전국의 조계종 승려는 채 1백 명도 남지 않았다. 해인사 등 거대 사찰조차 왜색 불교를 전파하는 대처승 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절이  <패밀리 비즈니스>가 되었던 것이다.

    우남은 사찰이  일본의 한반도  재진입을 위한 문화적,  종교적 전초  기지가  될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그는 “대한민국 불교의 뿌리는 화엄사상에 바탕한 조계종에 있다”라는 믿음 아래, 조계종 비구승의 숫자를 급격히 늘리는 한편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절에서 대처승과 그 일 가붙이들을 몰아냈다. 이것이 ‘불교 정화’이다. 왜색 불교를 전파하는 대처승 일가붙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사찰을 접수하는 과정은, 요즘 일에 비교하자면,  건물  철거  때에  투입되는  용역회사  직원들의  업무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급격히 충원된 비구승 중에는 거친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난처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밖에 없다.
    거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스님으로 만들어  절을 접수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해인사를 비롯한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왜색 불교를 전파하는 대처승들의 패밀리 비즈니스로 남겨 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백 명도 안 되는 조계종 비구승을 바탕으로 전국 사찰을 몽땅 접수했던 상황은, 우남이 감당해야 되었던 시대적 한계와 업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사람과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아야 했던 것—이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불교 정화는 우남의 기상천외한 정책의 한 예일 뿐이었다.

    1953년에 맺은 한미방위조약이야말로 우남이 이룬 필생의 업적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고립주의(isolationism) 전통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한미방위조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양자간의  방위조약을 맺은 나라는  미국의  전통적 근거지였던 필리핀 밖에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미국과 양자 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영국, 일본, 필리핀 밖에 없다. 그나마 영국과 일본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에 맺어졌 을 뿐 아니라, 영국은 미국의 핵 기술을 제공하기 위한 조약이고, 일본은 재무장 금지와 맞물려 있는 조약이다.
  •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을 맺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대해 우남은 반공포로를 석방시킴으로써 “조약을 맺지 않으면 휴전을 못 하게 하겠다”는 강력한 ‘협박’ 메세지를 미국에 보냈던 것이다 . 포로문제는  휴전  협상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아젠다  중의  하나였다.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 협상의 판을 깨버리겠다는 뜻이다.

    휴전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미군과 아무 상의도 없이 3 만명이 넘는 포로를 덜컥 석방한 일은 상식적인 국제외교 관점에서 보면 ‘깡패’ 같은 일이었다. 대충 휴전협정을 마무리 짓고 빨리 철군하기만 원했던 미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뺨을 때린 행위나 다름 없었다.
  • 또한 1952년 1월에 평화선(지금의 경제수역)을 발표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일본 및 중국( 당시 중공)과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킨 것은 아슬아슬한 치킨-게임(chicken game)이었다.
    심지어 우남은 강력한 우방이었던 대만(당시의 중국) 정부의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교들을 한국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주권 강화 정책은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골칫거리로 생각되었고 미(美) 국무성 일각에서는 우남을 실각시키기 위한 쿠데타 계획까지 검토 되었다.
    그래서 우남 연구자들은 “우남을 평생 괴롭힌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미(美) 국무성이었다”라고 말한다 .

    그러나 우남의 진면목은 해방 이후에 펼쳐진 그의 일련의 정책 보다는 해방 전의 활동에서 더욱 더 잘 보인다. 그는 몇 가지 진기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구한말의 개화독립 운동에 있어 가장 나이 어리면서도 가장 인기 높은 청년 연설가였다.
    불과 스물 두세 살 때의 일이었다.

    둘째, 1898년에 체포되어 손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수가 되었다.
    개화운동 최연소 사형수였다고 추정된다. 6년 이상 옥고를 치르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에야 석방되었다. 이씨 조선은 나라가 다 망한 상태가 된 후에야 개화파 청년 운동가 우남을 석방시켜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사로  보내려  했던  것이다.  우남은  이  때  손이  상해서  평생 타자(typewriter)를 치는데 고생했다.
  • 셋째, 곤장 100 대를 맞고 살아 남았다. 곤장은 50 대가 넘으면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100 대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 곤장 100대는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패는 것이나 다름 없다. 고종은 1904년 우남을 석방하면서 곤장 100대를 때린 후에 석방토록 했다. 상식적으로는 죽어야 되었다. 그러나 고종의 비밀 명령 때문이었는지 진짜로 곤장을 치지 않고 시늉만 내었다. 이것이 만약 고종 의 명령 때문이었다면 고종의 소심하고 용렬한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혹시라도 신하 중에 우남의 석방에 대해 항의하는 인간이 있을까, 그런 명령을 내렸을 게다.

    넷째, 한국인 최초의 아이비리그 박사이다. 우남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하버드에서 석사를 , 프린스턴에서 철학 박사를 했다.
  • 다섯째,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일 뿐 아니라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독립운동을 할 때에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Syngman Rhee, First Pr 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Exile)이라는 명함을 사용했다. 한 마디로 우남의 독보적 입지는 이미 3.1 운동 전후에 확립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열강 사이의 갈등과 전쟁이 표면화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가는 애꿎은 백성과 일선 독립운동가들만 죽어나간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20년 동안 꾸준히, 미국의 정치, 언론, 학계 인사들에게 ‘아침 고요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한국민의 존재를 알리고 한반도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의 독립운동에는 ‘외교 노선’이라는 치욕적인 이름이 붙었다. 우남은 그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 열강의 속성과 국제정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세계인’이었다.

    일곱째, 우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이다. 1925년에 공산주의 운동가들과 무장투쟁 노선의 운동가들이 우남을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 여덟째, 그는 한국인으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미국 베스트셀러를 쓴 사람이다.
    ‘Japan InsideOut’(일본을 벗기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으로 미국을 사로잡기 꼭 70년 전에, 예순 일곱 살의 처량한 망명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사상으로 미국을 평정했다.

    우남의 책 ‘일본을 벗기다’는 일본의 도발에 의해 미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예언했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일본이 태평양 건너 편에서  무슨  짓을  하든  미국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식의  평화주의,  고립주의(isolationism)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생전 들어 본적도 없는  땅, ‘코리아’에서 온  예순 일곱 살의 늙은이가 이런 미국 사람의 귀청에 대고 “정신 차려! 너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쟤들이 전쟁을 일으켜! 지금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은 곧 지구 전체의 전쟁이 될 수 밖에 없어!”라고 큰 소리로, 최초로, 제대로 외쳤던 것이다.

  • 중국에 대한 소설 ‘대지’를 쓴 미국 작가 펄 벅(Pearl Buck)은 진주만 공습 전에 ‘일본을 벗 기다’를 읽고나서,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라고 평했다. 펄 벅은 30 년 이상 중국에서 생활했고, 아시아 전체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소설가였다.

    이 책이 출간된  후 6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우남의  예언대로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다.
    펄 벅의 말대로 무서운 진실이 눈 앞에 드러난 것이다. 미국 내의 평화주의자들은 모두 할 말을 잃게 되었고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 대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 1939년  9월  1일  이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진행되어  오던  제2차  세계대전이,  결국  미국이 참여한 진정한 글로벌 전쟁이 된다는 우남의 예언이 고스란히 실현되었던 것이다.

    우남이 ‘일본을 벗기다’라는 책을 준비한 것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다음이라고 추정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 동맹은 이로부터 1 년이 지나야 맺어졌지만 우남은 이미 전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추축국 동맹의 <전체주의 진영> 사이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챕터는 첫 문장은 이렇다.
    “민주주의
  • 원칙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개인주의자들이다. 정부의 권력은 그 시민으로 부터 나오며 국가의 기초는 바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남이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만든 용어이다. 파시즘은 민족을 신성한 존재라고 선전하며 민족의 차원, 즉 전체의 차원에서 개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신성한 민족 국가 공동체’를 ‘전체’라고 불렀다. 무쏠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민족국가 안에 있다 . 민족국가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국가에 대한 반대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착각 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정치학계에서 ‘전체주의’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독일의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에 관한 연구를 내놓은 무렵이다.
    우남의 책은, 최소한 영어로 쓰인 책 중에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전체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의 심리에서는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7 천만의 작은 전신(戰神)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전신(戰神)이라고 믿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직후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지식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어디에서 온 인간이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코리아’란 곳이 어디야?”

    이 책은 냉혹한 열강들의 국제정치 무대에 한국의 존재와,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알렸다.
    1941년 12월 7일(현지 시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순간, 이 책은 한국의 독립을 확정지웠던 것이다.

  •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우리가 감히 예상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일찍,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인들의 팽창을 꺾고 일본 영토 안으로 그들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 우리 한반도는 전 세계의 자유국가들과 나란히 설 것이다. 그 때 우리 한반도는 또다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서 세계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평화주의적 풍조에 대하여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전체주의자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간첩의 행동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우남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통렬하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그토록 평화를 사랑한다면, 히틀러의 베를린, 미카도 의 토쿄, 무쏠리니의 로마에 가서 평화를 설교하라. 전쟁은 이곳 미국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20년 전만해도 외국인을 부를 때에는 항상 비하해서  불렀다 .
    양놈,코쟁이,  되놈,  로스깨,  쪽발이,  깜둥이,  흰둥이…심지어는  우남의  부인에  대해서도  ‘호주댁 ’이라고 불렀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출신 실무 외교관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와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같은 나라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를 비아냥 거리며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최소한 프란체스카에 대해서만큼은 아니다. 2010년 8월 ‘프란체스카 영부인’으로 구글링 해 보면 약 12,000 개의 결과가 나온다. ‘프란체스카 흡혈귀’로 구글 링 해보면 그 열 배인 약 120,000 개의 결과가 나온다. 2005년에 방영된, MBC의 흡혈귀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덕분이다.  이제  한국  사람들은  프란체스카와  흡혈귀를  함께  묶어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리 ‘호주댁’이라는 옛날 비아냥이 훨씬 더 낫다.

  •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깊게 영혼으로부터 이해하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우남의 최대의 행복은 프란체스카라는 아내를 얻었던 것일 게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남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타자를 치지 못 했다. ‘일본을 벗기다’의 원고는 프란체스카가 정리했는데 원고 내용이 계속 바뀌는 바람에 손톱이 다 짓물렀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우남은 인세를 받아 평생 처음으로 돈 같은 돈을 만져보게 되었다.
    그 때까지 프란체스카에게 아무 변변한 선물도 하지 못 했던 예순 일곱 살의 늙은 남편은 인세의 일부를 떼어,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모두 시들은 아내에게 주면서 “사고  싶은  것을  사시오.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  했소”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때깔이 나는 코트를 샀고, 이 옷은 지금도 이화장에 걸려 있다.
  • 1965년 7월 우남이 하와이에서 숨지자 대한민국은 국장, 국민장, 가족장을 둘러싼 장례 문제로 발칵 뒤집혔다. 정치적 부담을 두려워한 박정희는 국장을 포기했고, 장례는 결국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말이 가족장이었지 수 십만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우남의 운구에 참여해서 슬픔을 함께 했다.
    우리 선배 세대들은 우남의 공적과 과오에 대해 깊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장조차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 한 박정희였지만 그의 조사는 당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우남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국무총리 정일권이 대독한 조사를 요즘 우리 말로 바꾸면 이렇다.

    “당신은 일흔 살이나 된 노구를 이끌고 광복된 조선 땅에 돌아 오셔서, 좌우 이념 갈등과 미국-소련 사이의 알력을 극복하고 새 나라를 세우셨습니다.……당신이 이루신 무수한 업적 중에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격을  전세계에  알린  쾌거  중의  쾌거로서, (독도를  포함하는)평화선을 선포하고 반공 포로를 석방한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정권 말기에 간신배 기붕 일당을 잘못 기용하시어 실각하셨지만 이는 당신 평생의 공적을 가릴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당신은 조국을 위한 어린양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대통령을  맡고 있는 제가 불민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조국에서 임종토록 하지 못 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 직접 만든 군대의 젊은이들이 묻힌, 당신이 만든 묘역인 국립묘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길지를 골라 이제 당신을 땅에 묻습니다….공산 침략을 무찌르다 숨진 국군 장병들의 혼령을 거느린 막강한 호국신(護國神)이 되어 이 땅을 지켜 주소서…..”

    우남의  원문(영어)  문체는, 1940년대에  영어로  출간된,  국제정치에  관한  서적이라고는  믿어지지않을 만큼 간결하고 호흡이 빠르다. 진지하게 말하는 듯 하다가 통렬한 아이러니를 사용한다.
    이책은 유럽 중심의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이 참여한 글로벌 전쟁으로 번진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우남의 영혼 밑바닥에서 나온 글이다.

    열강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의 결과 일본이 망하고, 그 패망에 독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어온 우남의 평생의 비전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영어 교과서에, 간결하고 전율스런 문체로 쓰인 부분들이 조금이라도 포함되는 날을 꿈꾼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The title “Emperor” for their ruler is a misnomer. The Japanese do not call him emperor,
    but Tenno(천황), the Heavenly King. Every time they mention this word Tenno, they bow
    their heads or doff their hats.

    (일본의 지배자에 관한) ‘황제’라는 칭호는 오칭이다. 일본인들은 그를 ‘황제’가 아니라 ‘텐노(천황)’라고  부른다.  ‘하늘의  황제’.  일상  생활에서  말을  하다가도  ‘텐노’라는  단어가  나올 때에는 머리를 조아리거나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에는) 모자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숙인다.

  • 박성현 저술가.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는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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