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硏究 
      
     A4지 10장으로 정리해 보니  
     박원순의 사람들(6)
     
    金成昱    
      
     1.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선거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한 韓明淑(한명숙) 前국무총리의 言動(언동)에서는 대한민국 正統性(정통성)에 대한 인식을 찾기 어렵다. 반미·친북적 주장은 ‘正統’에 대한 오도된 인식이 만들어 낸 필연적 소산이다. 韓씨는 공직에 있을 때는 물론 공직을 물러난 뒤에도 대한민국을 헐뜯고 북한정권을 감싸며 동맹국을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내 왔다.
     

  •  韓씨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6·2서울시장 선거 후보로 나서서 비난의 초점을 북한이 아니라 정부에 집중해왔다.
     
     이명박 정부가 ▲“10년 민주정부가 구축한 평화를 부정하고 있다(···)부정할 뿐 아니라 전쟁불사라는 전쟁 먹구름을 몰고 오고 있다”거나 ▲“46명의 꽃다운 청춘을 차가운 바다에 수장시키고(···)선거방해로 꽃다운 청춘의 목숨을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韓씨의 이 같은 주장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69억5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대북지원을 하고도 99년 연평1해전, 2002년 연평2해전, 2006년 10월9일 핵실험 등 북한의 도발이 끝없이 계속돼 왔다는 사실(fact)을 부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도발의 주체인 북한을 감싸는 反인륜적 발언들이다. 그녀의 발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김대중 대통령이 저기 누워서 지금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지난 정부는 한쪽으로는 평화를 구축하고 한쪽으로는 안보를 튼튼히 했다(…)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전쟁의 먹구름이 우리 앞에 다가오니까 그 때가 얼마나 좋았으며 그 평화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됐다(…)그 평화가 그립다.(2010년 5월25일, 6.2지방선거 명동 선거유세)”
     
     “저는(서울시장 후보) 이 관권 선거를 한쪽으로는 막아내고 국민과 함께 전쟁의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는 데 안전을 지켜내는 데 최선을 다 하는 그러한 데 노력을 하겠습니다.(2010년 5월26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정부가 지난 10년 민주정부가 구축한 평화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다(…)부정할 뿐 아니라 전쟁불사라는 전쟁 먹구름을 몰고 오고 있다(…)이 정부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경제 무능에 평화까지 짓밟고 있다(…)주가는 오르고 환율이 급등하면서 민생이 파국으로 몰아치고 있다.(2010년 5월26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야5당, 시민사회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국회의’)”
     
     “이 정부 2년 반 동안 이렇게 전쟁 먹구름이 우리 앞에 돌아오도록 전쟁 위협을 몰고 갈 수 있나(…)46명의 꽃다운 청춘을 차가운 바다에 수장시키고 치욕의 패전을 자랑인양 당당하게 말하면서 선거를 관권선거로, 선거방해로 꽃다운 청춘의 목숨을 이용하고 있다.(2010년 5월29일, 6.2지방선거 광화문 선거유세)”
     
     2.
     韓씨는 북한이 핵보유 선언(2005년 2월10일)을 하자 ▲“북한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싸며 ▲“미국에게 對北체제보장과 경제 지원을 요청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듬해 북한이 핵실험(2006년 10월9일)을 하자 ▲“핵을 가지고 어느 나라를 전시적인 도발을 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의 제재와 일관된 금융압박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며 북한을 옹호했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이 남한의 지원을 받은 뒤 핵무기를 만들었음에도 오히려 ▲“김대중 前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통해 넓혀 오신 남북 간 화해협력의 큰 길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무장 앞에서 主敵을 감싸고 同盟(동맹)을 욕하며 主敵을 돕자는 주장들이다.
     
     “北은 北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에 북핵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보지 않는다(…)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이 동시 제안이라든지 對北체제보장과 경제지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안을 내놓도록 우리가 요청한다든지 제안을 강력하게 정부가 해야 한다(2005년 6월2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지금 현재 시점에서는 북은 핵실험을 함으로써 핵보유국이라는 국제적인 지위를 획득을 해서 국제사회에서의 협상력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핵을 가지고 어느 나라를 전시적인 도발을 하려고, 그런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2006년 10월11일, 국회 북핵실험 관련 긴급현안질문)”
     
     “(북한의 핵실험은) 북한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보지만 어느 한 나라를 (책임이 있다고) 지명하기는 어렵다(…)미국의 제재와 일관된 금융압박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2006년 10월11일, 국회 본회의 긴급현안질의)”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평화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김대중 前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통해 넓혀 오신 남북 간 화해협력의 큰 길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진다.(2006년 11월2일, 김대중 도서관 전시실 개관식 축사)”
     
     3.
     韓씨의 ‘김정일 감싸기’는 거짓인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작 문제를 제기하자, 2006년 2월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미국은 6자회담의 성사 이후 모처럼 마련된 평화정착의 기운에 증거 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僞幣(위폐) 제작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韓美정보당국조차 “북한이 지폐를 제조하는 곳에서 100달러 위조지폐인 슈퍼노트를 생산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다.
     
     韓씨는 미국의 김정일 비판에 대해서도 적대적 반응을 보여 왔다. 콘돌리자 라이스 美국무장관이 2005년 6월 북한을 “暴政(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고 말하자 같은 달 21일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모처럼 조성된 6자회담 재개의 긍정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韓美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튿날에도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6자회담 복귀 자세를 갖춘 북한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자, 韓美정상 간 합의정신에도 반하는 것”이라며 “국내적으로도 장관급회담 북한 대표단이 들어올 때 보수단체가 자극적 플래카드를 붙이고 시위를 했는데, 우리 국민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하는 보수단체를 “예의 없다”고 비난했다.
     
     韓씨는 2005년 7월4일에도 “지금 미국은 북측에서 요구하는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을 중단하라는데 대한 답변이 확실히 없는데, 미국은 전 세계 초강대국답게 6자회담 7월 중 개최를 위해 확실한 답변을 해줬으면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4.
     韓씨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 입장을 고수해온 인물이다. 그는 ▲“국보법은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역사를 바로 이끌고자 하는 양심세력을 무참히 잘라냈다(2004년 9월6일)”며 2004년 10월 국보법 폐지안 공동 발의에 나섰고, ▲2006년 3월24일 총리 지명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국보법 폐지 당론에 찬성하는 데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韓씨는 ▲2005년 7월21일 일본 토쿄에서 열린 ‘6·15선언 발표 5주년 기념 남북해외합동강연회’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문화돼 상징성으로 남아 있다”며 “올해 보안법 문제가 수면 위로 뜨면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주장했다.
     
     또 “통일문제는 민족 내부문제이자 국제문제라서 민족공조와 국제공조 모두 필요하지만 그래도 기본은 민족공조”라며 “일본에서도 민단과 조총련이 함께 만나 서로 양보를 해서 내부 문제가 있다면 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5.
     한명숙씨는 과거 공안사건에 연루된 전력이 많다. 韓씨는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朴聖焌(박성준)씨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당시 박성준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韓씨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비)합법, 폭력·非(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共産政權(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 주범 김질락의 自認”>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武裝工作船(무장공작선)은 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승탁·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遺稿(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월북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강인덕 前 통일부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로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씨의 남편 박성준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申榮福(신영복)에게 포섭된 ‘黨(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한명숙 및 朴○○, 金○○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 小組責(소조책)과 小組(소조)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黨員(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黨員(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소조)를 이룬다. 小組(소조)와 細胞(세포)는 지하당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소조)와 細胞(세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 小組責(소조책)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地下黨(지하당)에 입당한 黨員(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韓씨 등 小組(소조)를 “통혁당 당원”으로, 박성준씨와 같은 黨 小組責(소조책)을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박성준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당시 韓씨의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은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地下黨(지하당)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앞의 수기 中 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반제)·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中央黨(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같은 수기는 기록하고 있다.
     
     김질락은 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도 “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평양에 김종태 거리, 北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구)분대·區(구)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에게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韓씨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박성준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었다.
     
     6.
     韓씨는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았다. 그는 당시 이우재·장상환·황한식·신인령·김세균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 목소리 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판결문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속개하기에 앞서 그 집에 있던 라디오를 조작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함께 들은 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스웨덴의 탁아소 등 어린이 복지시설이 잘 돼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잘 돼 있는 곳은 以北(이북)이라고 하더라’는 요지의 말을 하여 反국가단체인 북괴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 또는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했다》
     
     판결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명숙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니 읽어 보라」면서 ‘조선여성독본’ 복사판을 제공하였다》
     
     韓씨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과 관련해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이 조치는 통혁당 사건과는 무관하다.
     
     韓씨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고문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해왔다. 2006년 3월24일 당시 총리로 지명된 韓 前총리가 국무조정실 홈페이지에 올린 ‘한 총리 지명자의 삶 ④ 고문과 절망’이라는 글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때의 두려움으로 손이 떨린다. 나는 정말, 정말, 정말 그 모멸의 순간이 영원히 내 기억에 지워져 고문이라는 범죄를 알기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만 싶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하나님께 나를 고문했던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고문의 기억은 여전히 내 상념의 어두운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숨어 있다.(···)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毆打(구타)를 당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귓전에 울려오는 욍욍거림 속에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아스라하게만 들려왔다.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잃었고 차라리 그 순간이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아! 나는 패배했다. 나의 믿음과 나의 각성과 나의 정의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의 믿음은 얼마만큼 우습고 허약한 것인가?》
     
     2006년 4월17일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당시 한명숙 후보자는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당시 고문한 당사자들을 근래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개인의 미움이 아니라 민주화과정에서 당한 것”이라며 “이미 다 용서했으며 과거의 일을 되살리지 않고 미래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7.
     2011년 6월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대한 韓씨의 고문 조작 주장을 뒤집는 전직 정보부 수사관의 증언록이 나왔다. ‘남산, 더 비하인드 스토리(시사문화사 刊)’라는 제목의 전직 중앙정보부 對共수사국 수사관으로 근무했던 이기동氏의 회고록이다. 李씨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 당시 판결문에 판시됐듯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고 적었다. 또 고문 논란과 관련, 韓씨의 피해 주장에 대해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필자인 이기동氏는 1979년 2월 당시 수사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수석간사 이우재(前마사회 회장), 신인령(前이대총장), 한명숙(前총리) 등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농민·근로자·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이라는 사회주의 이론 강의를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한 것으로 보고 용공혐의로 이들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한명숙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이우재·신인령 등과 합류했고 그들 간사 3인은 그곳 숙소 등에서 학원 수강생들에게 사회주의 이념교육 방향 등에 대한 철저한 토론을 통해 결속했다.”고 적었다.
     
     이기동씨는 고문 조작 논란도 다루고 있다. 필자가 전하는 법정의 모습은 이랬다.
     
     《드디어 내가 담당했던 피고 한명숙의 차례. 그녀는 진술 도중 갑자기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포승으로 묶인 두 손을 좌우로 흔들며 재판부를 향해 말했다. “제가 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고문당한 저의 좌측 어깨를 좀 봐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재판장이 그녀에게 “어깨를 어떻게 고문당했다는 말이오?”라고 묻자 그녀는 나를 향해 “저기 검사 밑에 앉아 있는 내 담당 수사관(필자인 이기동)이 담뱃불로 내 왼쪽 어깨를 지져 상처가 있으니 한 번 보십시오”라고 하지 않는가?(···)
     
     그로부터 20분 후 서울대학교병원 외과 과장 심 박사가 도착했고 심 박사는 법정에서 그녀, 한명숙의 요구대로 어깨를 들추고 현미경 비슷한 것으로 상처를 살피고 어깨를 방청석을 향해 보이며 “여러분 보이세요? 이 조그마한 흉터가 최근에 담뱃불로 지진 상처 같습니까?” 하고는 다시 재판장을 향해 “이 흉터는 이 사람이 3~4세 때 종기가 생겨 난 흉터자국으로 보입니다. 이상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고문이라니! 그것도 내가 담뱃불로 지졌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이 글을 읽는 분이 나에게 ‘그때 그녀를 고문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 한 차례도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했거나 또 어떤 심한 언동이나 다른 방법의 고문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하늘이 나에게 벼락을 내릴 거다’라고 답하겠다. 만약 그녀가 당시 거짓말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신이여 그녀에게 천벌을 내려주옵소서 하고 빌겠다.(···)》
     
     필자는 “오늘날 시대가 좋아(?) 대한민국에서 국무총리로까지 출세한 그녀는 꼭 그때의 ‘담뱃불 고문’ 주장이 허위임을 만천하에 밝히고(어떤 방법으로든 이 사회에 정정당당하게) 필자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라며 韓씨의 사과를 촉구했다.
     
     필자는 또 “상호 변호인단을 구성, 확인하고 그 당시 지하 심문실을 완벽하게 녹화한 필름이 있을 것이니 국정원에 요청하여 사회정의 구현 차원에서 국회 청문회를 열어 심문실의 全 과정을 만천하에 공개토록 하자”며 이른바 “좌파·좌익의 허위 고문 주장에 대응키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