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적/다시 보는 박원순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 
      송호창·조광희·이인영·우상호·김기식

    金成昱   

     
     1.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시장의 캠프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좌편향 일색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이들 중엔 북한의 “對南공작원”으로 判示(판시)된 在獨학자 송두율 비호에 앞장서 온 이들도 있었다.
     
     당시 박원순 캠프의 대변인 송호창 변호사는 2003년 9월22일 송두율 입국 당시 宋씨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변호인단에 들어갔다. 宋변호사는 송두율 석방을 촉구하는 소위 대책위원회 運營委員(운영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이 대책위원회는 2003년 11월28일 성명을 통해서 “재판과는 별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송두율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統一(통일)을 위한 진지한 노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검찰이 구시대적인 국가보안법의 형식논리만으로 宋교수를 구속기소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宋교수에 대한 범죄혐의가 전혀 사실과 다르거나 처벌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은 물론이고(···)검찰과 국정원 관계자의 중대한 범죄행위인 피의사실 공표죄에 대해 고발하고, 포승 수갑 등 위법한 계구사용에 대해서도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2.
     박원순 캠프의 특보였던 조광희 변호사는 2004년 3월11일 ‘송두율 교수의 무죄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 원로·인사’라는 성명을 통해서 송두율의 석방을 촉구했었다.
     
     당시 성명은 “우리는 송두율 교수를 법정에 세우도록 한 국가보안법은 탈냉전 시대이자 남북 화해협력의 시대인 오늘의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구시대 악법으로서 조속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송두율 교수의 경우에는 설령 국가보안법에 따르더라도 무죄 석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송두율 옹호는 박원순 시장 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朴시장은 2003년 8월7일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범국민추진위)에 강정구 前동국대 교수, 오종렬․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범국민추진위는 송두율을 비롯해 곽동의·이수자(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등 해외 親北인사를 ‘해외 민주인사’로 부르며 이들의 귀국을 추진했었다.
     
     3.
     송두율은 2003년 9월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해외인사 초청행사 일환으로 37년 만에 한국에 왔지만, 독일에서의 反국가 활동을 이유로 검찰에 구속됐었다. 宋씨는 북한 조선로동당 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고위직 공작원 여부가 논란이 됐었다.
     
     宋씨는 2004년 3월 1심에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가입, 특수탈출 및 회합통신 위반 등 혐의로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2004년 7월 항소심은 宋씨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증명하기 어렵다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풀어줬지만 宋씨가 “북한의 조선로동당에 入黨(입당)해 對南공작을 했고,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목적수행을 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4.
     송두율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통영의 딸들-신숙자·오혜원·오규원 사건> 관련, 오길남 박사의 入北(입북)을 권유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오길남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85년 8월 당시 송두율은 70년대 초 독일 유학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온 吳박사가 경제난과 아내의 병으로 어렵게 생활하자 “기댈 곳은 북한밖에 없다”며 오길남 가족의 入北을 권유했다. 吳박사는 그의 저서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및 최근 다시 출판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이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적었다.
     
     “송두율의 入北(입북) 권유 이후 재독작곡가 윤이상은 이제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라는 편지를 써 보냈고, 거듭 ‘고생하지 말고 북한으로 가시오. 거기 가면 오박사는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을 이룰 수가 있소’고 권했다”
     
     吳박사는 1985년 12월 송두율을 비롯한 윤이상, 김종한 등에 의해 북한공작원을 소개받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갔고 이후 1986년 11월 평양의 칠보산연락소에서 ‘한민전’ 對南흑색선전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5.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 와서 처참한 현실은 물론 송두율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吳박사는 평양 칠보산연락소 이창균 고문 등 對南사업본부 고위 인사들로부터 “송두율이 70년대 초반부터 1년에 북한을 1~2차례씩 왕래해 온 북한의 비밀노동당원이었음을 확인했다”며 “북한방문은 평소 유럽 외딴 곳으로 휴가를 간다는 외양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吳박사는 “86년 2월 평양 용성구역 남조선혁명박물관에 갔을 때 1975년 송두율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직접 만들었던 ‘유신독재 타도하여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프래카드가 유리관에 전시돼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吳박사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北에서 확인한 송두율의 실체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을 철저하게 은닉해 온 송두율에게 깊은 증오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양에 있었다. 나는 그가 가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반정부활동을 한다고 모두 북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반정부인사를 탄압하는 구실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던 내게 송두율은 충격이었다”
     
     6.
     송두율의 첫 북한 방문시기로 언론이 보도한 1991년 당시 宋씨는 소위 고위직인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묘향산초대소’에서 김일성의 접견을 받고 그로부터 ‘언감자국수’를 접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노동신문 1면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됐다. 북한전문가들에 따르면 ‘언 감자국수’는 김일성 항일 혁명당시 고난의 상징으로서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로 알려져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조총련계 학자들은 물론 김일성과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독실한 주체사상 신봉자들의 조문이 거절당했을 때도 외국에 있는 학자 중 오직 송두율만 장례식에 초청받았다.
     
     故황장엽 선생은 2001년 당시 ‘송두율 명예훼손손해배상답변서’를 통해 “김일성장례부문 담당비서였던 자신에게 오직 송두율의 초청을 지시했으며 송두율은 ‘김철수’의 가명으로 김일성 장의위원회 위원으로 등록돼있었다”고 밝혔다. 宋씨의 94년 평양방문사실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기고한 ‘金주석이 떠난 북한방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7.
     박원순 캠프에서 활동했던 조광희 변호사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언론위원장 출신으로서 ▲2003년 4월8일 소위 ‘양심수와 정치수배전면해제를 촉구하는 사회원로·각계인사 기자회견’ 등에 참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해왔다.
     
     송호창 변호사 역시 ▲2002년 7월19일 ‘10기 한총련 의장 석방,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합법화를 위한 민주사회단체 지도자 1000인 선언’ ,▲ 2007년 10월17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결의하는 각계 원로, 대표 인사’ 성명 등에서 같은 주장을 펴왔다.
     
     宋변호사가 2002년 7월19일 참가한 성명은 한총련을 가리켜 “민주주의, 국민 생존, 민족 자주를 위해 분투하는 사회의 소금, 시대의 양심”으로 격찬하며 “민주와 통일을 향한 젊은이들의 노력은 온 국민의 지향과 더불어 온전히 보장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총련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을 설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해 온(대법원 판결. 2004도 3212)” 단체이다. 한총련 의장은 김정일 찬양구호인 “결사옹위”를 혈서로 써 지니고 다니다 입건된 바 있고(대법원 판결. 2003도 604), 북한이 미사일 발사에 나서자 “선군정치가 전쟁의 참화를 막는다(2006년 7월20일)”는 성명을 냈었다. 김정일 전위대 역할을 자처해 온 단체이다.
     
     8.
     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캠프의 얼굴마담 중 한 명은 朴후보와 참여연대를 함께 이끌어 온 김기식 혁신과 통합 공동대표였다. 그는 사무처장 자격으로 참여연대를 이끌었고 박원순 캠프에 조광희 변호사, 최재천 前의원과 함께 특보 역할을 맡았었다.
     
     金공동대표는 올 1월25일 인터넷 티스토리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서울대 인류학과 재학 중 두 차례 구속된 적이 있다. 2학년 때인 1986년 11월 ‘구학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 첫 번째였다.(···)캠퍼스로 돌아온 지 6개월 후, 이번에는 1987년 6월 항쟁 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두 번째로 구속됐다.》
     
     金공동대표가 활동한 구국학생연맹(구학연)은 잘 알려진 서울대 내 김일성주의(소위 主思派)조직이다. 사법부는 99노122 판결 등을 통해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등은 민족해방(NL)계열 主思派 학생운동권 지하조직”이라 하여 구학연 등이 主思派, 즉 김일성주의 조직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구학연은 86년 3월29일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全대회를 열고 출범했다. 구학연은 결성취지문에서 북한정권의 對南혁명노선인 NLPDR(民族解放人民民主主義)을 강령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원흉으로 美帝(미제)와 그 傀儡(괴뢰)정권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美帝의 신식민지 파쇼통치의 매판적 반동집단 타도” 등 내용을 채택했다.
     
     김두희 법무부장관은 1994년 8월29일 국회 법사위에 나와 현안보고를 통해 ‘主思派의 실상과 대책’을 공개했다. 이 문건은 “主思派의 뿌리는 86년 결성된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으로 파악된다.(···)85년 10월부터 서울법대, 서울공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구국의 소리방송’에서 보내는 ‘정치사상강좌’·‘정치철학강좌’ 등을 집중적으로 듣고 북한의 對南혁명노선인 民族解放人民民主主義혁명론(NLPDR)을 학습하면서 主思派의 실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80년대 또 다른 主思派 조직인 反美청년회 출신의 姜吉模(강길모) 프리존뉴스 대표는 2006년 9월20일 프레스센터 세미나에서 “학생운동을 정리하며 主思派 핵심 활동가들이 가장 애써 키운 친구가 김기식(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다. 참여연대는 주사파 조직이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말아먹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참여연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증언했다.
     
     9.
     박원순 캠프의 상임 선대본부장 이인영 前의원 및 대변인을 맡고 있는 우상호 前의원은 전국대학생연합회(全大協) 제1기 출신이다.
     
     87년 결성된 대학생 조직인 全大協은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했다. 그러나 全大協 역시 主思派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조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全大協 수사결과를 담고 있는 ▲‘主思派에 장악된 全大協의 실체 수사결과’, ▲‘全大協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 ▲‘全大協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全大協의 조직실체’ 등 복수의 공안문건들은 “全大協은 항상 金日成과 한민전(북한의 對南선전매체)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며 主思派의 全大協 장악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全大協 내부의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례도 적고 있다. 예컨대 한◯◯라는 全大協 간부의 자술서 등에 따르면, “1991년 4월 하순 경희대 총학생회실에서 全大協 조통위 정책실장 손◯◯ 주재로 개최된 정책주체전국회의(全大協 정책실원 5명과 全大協 각 地區 조통위 실무자 11명 참석) 후 참석자 전원이 ‘金日成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金日成 수령님 만세’ 삼창 후 회의를 종료”하는 등 全大協 간부들이 회의·집회·시위·MT 후 金日成에 대한 충성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때 외었던 또 다른 결의문·맹세문 내용은 이렇다.
     
     《위대한 수령님 金日成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金正日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 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하겠습니다(출처: 全大協을 장악한 主思派 지하조직 중 하나인 자민통이 1990년 8월 중순 한탄강 소재 민박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에 출마할 88학번 6명(한◯◯, 최◯◯, 천◯◯, 강◯◯, 김◯◯, 박◯◯)과의 MT에서 金日成에 대한 충성 맹세 강령·규약 中)》
     
     10.
     全大協의 김일성 추종은 전향 主思派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숱하게 제기돼 왔다. 主思派에서 전향한 洪晋杓(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지도부는 主思派가 장악했다. ‘主思派는 극소수 학생만이 추종했던 이념’이라는 全大協 출신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며 2004년 10월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主思派는 1980년대 중반 이후 全大協,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을 읽고 한민전을 청취하며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主思派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역시 전향한 지식인인 ‘시대정신’ 편집위원 崔弘在(최홍재)씨는 ‘잃어버린 세대 386’이라는 논문에서 “4.19세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화 자체가 목적이념인 반면 386에게 민주화는 사회주의나 북한의 통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며 이렇게 밝혔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경과하며 主思派NL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표적인 사회운동도 이런 입장을 지니게 된다.(…)主思派는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全大協(1987년)과 한총련(1993년)을 조직하게 되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全大協 連帶(연대)사업국장 출신으로 主思派에서 전향한 李東湖(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사무국장은 “全大協이 북한의 主體思想을 추종했으며, 한민전의 투쟁방침을 따랐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主體思想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그룹은 1987년 반미청년회·조국통일그룹·관악자주파 등을 결성했고, 이 과정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全大協을 건설했다. 대중조직인 全大協은 합법조직을 지향, 사상이나 투쟁노선을 대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全大協은 主體思想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됐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 등 곳곳에서 主體思想과 투쟁노선이 나타나 있다》
     
     姜吉模 프리존뉴스 대표는 “全大協은 主思派에 장악됐던 것이 아니라 主思派가 만든 것이 全大協이며, 主思派가 아닌 全大協 간부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며 2006년 12월 월간조선 등을 통해 현재 박원순 캠프의 우상호 상임선대본부장을 主思派 출신으로 거명했다.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던 반미청년회 등이 1987년 만들었던 것이 全大協이다. 현재는 노무현 정권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조직에서 교양됐다. 全大協 출신 열린당 의원 우상호·오영식씨, 청와대 제1부속실장 문용욱씨, 前제2부속실장 이은희씨, 前청와대 대변인 김만수씨, 前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여택수씨 등.(…)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찬양했다》
     
     11.
     이인영·우상호氏는 2007년 이른바 간첩·빨치산 추모제 추모위원으로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었다. 한국진보연대는 2007년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인영·우상호 등 22명의 국회의원이 추모위원으로 기록됐었다.
     
     당시 분향소·전시물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烈士(열사)”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추모대상에는 남파 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했었다.
     
     이인영·우상호氏는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의 전면에 섰었다. ▲2004년 8월4일 열린당 내에서 ‘국보법 폐지를 위한 입법추진위원회’에 참가했고, ▲2004년 12월23일 국회본청 내 2층 계단에서 ‘국보법 연내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대표·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에 나섰다. ▲2007년 5월31일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 지정촉구결의안에 참가했다. 이 案은 “6·15 남북공동선언은 통일의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소중한 합의”라며 “6월15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자”고 결의했다.
     
     특히 전대협1기 의장 출신인 이인영氏는 ▲2004년 9월2일 소위 “美國의 북한인권법 제정에 항의하는 국회의원 서한”에 참여했고, ▲2005년 7월14일 소위 “美日의 북한인권 문제제기 규탄 결의안”에 참여했으며, ▲2006년 10월13일 북한 핵실험 후 “포용정책 지속”을 주장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박원순 캠프에 참여한 이들의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칼럼 몇 토막을 소개한다. 아래는 이인영氏가 국회의원 재직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다.
     
     《자주의 나라, 아 그리운 나라.(…)평소에 온건하다고 생각했던 장로님과 목사님께서 기도 도중 ‘저 오만한 미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시옵고~’ 느닷없이 울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어쩔 수 없어 두 손을 꼭 잡고 부르르 떨었습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리던 자주의 나라였습니까? 아니 얼마나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던 자존의 선언이었겠습니까? (2002년 12월9일 칼럼 中)》
     
     《사학법 개정은 자기 확신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신념행위였습니다. 그것은 改革(개혁)과 守舊(수구)의 칼날 같은 대척점에서 망설임 없는 확고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를 훼절하거나 물러서서 방치한다면 우리 가슴에 자기 부정의 독버섯이 싹트게 됩니다.(…)지난 해 사학법은 우리에게 改革과 守舊의 건곤일척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2006년 4월20일 칼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