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무대의 지휘자' 정명훈 이어 韓人두 번째...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지휘
  • 대중은 천재에게 열광한다. 예술계에서는 특히나 그래왔다. 어느 예술가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창조를 이뤄냈을 때는 더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그랬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신동(神童)으로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으나 대중을 미치게 사로잡는 대(大) 음악가가 있다. 시대를 초월해 일어나는 일이다. 인고(忍苦)의 작업 끝에 나온 작품은 ‘보통사람’의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그도 평범하지는 않았던 게다. 음악에 '미친 사람'이었다. 신동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은 비범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평범했다. 평범하다 못해 신의 형벌 같은 가혹한 고통속에 헤맬 때도 있었다.

    그 고통도 전인미답의 창조 행위만은 막을 수 없었다. 대중은 그런 그를 음악의 성인(樂聖)이라 불렀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다. 모차르트에 가려 천재라는 칭호는 듣지 못했지만 고지식할 정도로 일관된 베토벤의 선율은 인간의 영혼을 울렸다. 나아가 대중을 미치게 했다.

    음악에 관한한 한없이 콧대 높은게 독일인들이다. 그들이 가장 위대한 자국 음악가로 베토벤을 꼽는 이유도 그 역시 똑같이 음악에 미쳐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이 베토벤의 음악으로 독일을 미치게 한다.”

  •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지휘자로 나서는 마에스트로 박성준 씨가 지난 8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 양호상 기자
    ▲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지휘자로 나서는 마에스트로 박성준 씨가 지난 8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 양호상 기자

    베토벤의 이 고집스러운 색깔을 가늘고 긴 막대기 하나에 담아내려는 한국인이 있다. 그것도 베토벤의 후손 독일인을 상대로 말이다.

    지난 2004년 베토벤을 배우러 독일로 향한지 7년 만에 베를린 필하모닉 (메인)홀에 지휘자로 서게 된 마에스트로 박성준씨(45)가 그 주인공이다.

    박성준은 2012년 1월 2일 저녁 8시 꿈의 무대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서 지휘봉을 든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이다. 그와 수차례 선율을 조율했던 베를린 신포니에타와 함께 한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의 오랜 전통. 베토벤의 후손들(독일인)이 새해 첫 음악회에서 그것도 베토벤의 가장 어렵고 난해한 음악을 한국 지휘자에게 맡긴 셈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음악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다. 동양인에게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오지의 땅이기도 하다. 이 곳 포디움(지휘자가 올라가는 단)에 선 한국인 지휘자는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유일하다. 이제 내년 1월 2일이면 박성준의 이름도 함께 기록된다.

    야구로 치면 ‘월드시리즈’ 쯤 되고 산악인들의 ‘히말라야’와 비슷한 곳이다.

    국내 음악계에서 아직 생소한 이름의 박성준이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 선다는 것은 유럽 클래식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사례다.

    √ 편안한 표정 속의 카리스마로 청중을 설득한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의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만났던 박성준의 이미지는 정반대였다. 그리 크지 않은 몸집에 안경을 끼고 환한 웃음을 짓는, 마냥 편한 모습이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 서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지휘자로는 언뜻 보이지 않는다.

    “지휘자의 권위요? 그건 포디움에 올랐을 때면 충분합니다. 평소에는 오케스트라 구성원들과 많이 웃고 친밀하게 이끌면서 신뢰감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연주를 이끌면서 드러내는 음악적 표현력, 그게 지휘자의 카리스마죠.”

    지휘자의 자세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박성준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80대 한 오케스트라 단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大)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경력을 지닌 이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는 오케스트라 최고참임에도 항상 가장 먼저 연습장에 나타난단다.

    “지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휘봉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해서는 오케스트라도 단원도 청중도 아무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지휘자로 나서는 마에스트로 박성준 씨가 지난 8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 양호상 기자
    ▲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지휘자로 나서는 마에스트로 박성준 씨가 지난 8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 양호상 기자

    √ 베토벤에 미친 한국인…독일 후손들에 인정받다

    알고보니 영화 '남남북녀', '비무장지대' 등을 연출한 영화계 원로 박상호 감독의 아들이라고 했다. 예술계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라디오에서 들은 클래식 선율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소니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클래식 방송을 즐겨 듣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휘자 입문(入門)의 단초였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음악을 늦게 시작했지만 유럽 클래식계에서의 두각은 빨랐다.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향한 박성준은 89년 빈 국립음대 교수 ‘칼 외스터라이허’의 개인제자로 본격적인 지휘자 수업에 들어갔다.

    그의 마지막 제자였던 박성준은 91년 ‘빈 국제마스터클래스’에서 50여명의 코스참가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지휘자 3명중 한명으로 선정된다. 이를 계기로 박성준은 ‘프로 아르테 오케스트라 비엔나’를 지휘하며 마에스트로로 데뷔하는 기회를 잡았다.

    이후 폴란드와 불가리아, 체코 등지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박성준은 2004년 라이프찌히 국제 지휘자 코스에서 콜린 매터스 영국 왕립 음악원 교수에 의해 최고 지휘자로 선정됐다.

    소위 메이저 반열에 오른 셈이다. 덕분에 박성준은 그해 2004년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의 송년음악회를 지휘(라이프찌히 캄머 필하모닉)할 수 있었다.

    독일 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이후 그는 2005년 베를린 콘체르트 하우스 크리스마스 음악회 (헨델 메시아/베를린 신포니에타), 2006년 베를린 필하모닉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음악회(모짜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대관식 미사/베를린 신포니에타) 등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서서히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결국 2012년 그가 꿈꾸던 베를린 필하모닉 메인 홀에 서게 됐다.

    그 노정에는 당연히 어려움도 컸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것도 동양인이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적은 편견과 무시였다.

    “‘미치면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음악에 미쳐 있는 시간이었죠. 그것만이 주변의 눈초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 마에스트로 박성준은 이번에 지휘하게 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천국과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변증법적 논리가 아닌 종교적 해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음악 해석 방식이다. ⓒ 양호상 기자
    ▲ 마에스트로 박성준은 이번에 지휘하게 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천국과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변증법적 논리가 아닌 종교적 해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음악 해석 방식이다. ⓒ 양호상 기자

    √ 80분 연주로 베를린을 매료시킨다

    박성준이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서 지휘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참 해석하기 어려운 곡으로 유명하다.

    80분에 이르는 웅장하고 장대한 곡으로 마지막 4악장에 인류 화합을 호소하는 합창이 등장한다. 교향곡에 사람 목소리를 넣는다는 것을 베토벤 이전에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4명으로 구성된 솔로이스트와 남녀로 구성된 합창단, 교향악단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된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만의 독창적인 창조 세계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다보니 한 치의 실수도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결코 어떠한 음악적 가미를 할 수 없는 곡입니다. 한국적 정서는 물론 독일적 정서도 첨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베토벤이 귀가 완전히 멀고 난 뒤 작곡한 교향곡이죠. 그토록 좌절한 베토벤이 시련을 준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사상을 노래하고 싶어요.”

    그는 9번 교향곡을 마치 천국에서 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스스로도 변증법적 논리가 아닌 종교적 해석으로 접근하고 싶다고 했다. 천국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데 음악도 그러하고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9번 교향곡이라는 해석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죠. 기악과 성악의 그리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그리고 인간과 신과의 '화해'로 승화시키는 것이 목표이자 꿈입니다.”

    내년 1월2일,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그렇게 지휘하고 싶다는 것이다.

    √ 카라얀 같은 베를린 상임지휘자가 꿈

    사실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 서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중요한 경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표는 클래식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휘자다.

    구체적으로는 베를린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음악감독이다. 그 과정에서 '클래식 한국'을 알리는 것도 바람이다.

    “지휘자로서 아직 저는 절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줄곧 음악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이제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그러면서 박성준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휘자를 꿈꾸는 후배들이 유럽으로 많이 건너와 함께 한국을 알리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인터뷰= 선종구 정치부장
    정   리= 안종현 기자
    사   진= 양호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