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고도 성공한 북베트남의 구정공세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들
  • 월남전 자료사진ⓒ
    ▲ 월남전 자료사진ⓒ

    "테트(Tat)"는 베트남어로 구정 이란 뜻이다. 대부분의 동양국가들처럼 설은 베트남 월남에서도 최대의 명절이다. 1968년 1월, 설 연휴 기간 베트남 전국은 귀향행렬로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은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대공세를 벌이기 전, 그들은 치밀한 위장전술을 썼다. 우선 북베트남은 구정연휴 기간 동안 휴전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베트콩은 남베트남군 포로 14명을 석방했다.

    휴전으로 느슨한 분위기가 만연해진 1월 30일, 북베트남과 베트콩 연합군은 총 85,000명의 병력으로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총공세를 개시했다.
    물론 당시 미군 등 연합군도 구정연휴 기간에 전부 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북위 17도선 일대에 주둔한 연합군 부대만 비상이 걸려 있었고, 후방부대들은 비상이 해제된 상태였다.

    이점을 노린 북베트남군은 후방지역에 집중해 도시와 촌락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공산군은 대통령궁, 각 군 본부, 미국 대사관 등 주요 시설을 기습 공격했다. 공격을 받은 미국 대사관에선 6시간 넘는 교전 끝에 베트콩 특공대를 물리쳤고, 월남 대통령 궁도 기습 공격을 당했다. 마침 인근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을 경비하던 한국군 소대원들도 참여해 교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공산군이 장악한 지역을 대부분 회복했으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과 과거 베트남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에선 한 달이 넘는 교전이 이어졌다.  

    테트공세는 군사적으로 본다면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었다. 대통령궁과 미 대사관 공략에 실패했고 무엇보다 공세에 참가한 85,000명의 병력 중 절반 이상인 45,000명이 전사했다.특히  베트콩은 간부급들이 대부분 전사하여 조직이 거의 와해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습작전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테트공세 기간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장면과 참혹한 모습이 TV카메라를 통해 곧바로 미국인들의 안방에 전해진 것이다.

    미군 장병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참혹한 ‘전쟁 영상’을 안방에서 접하면서, 미국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반전여론에 불을 지핀 것이다. 그렇잖아도 주월미군 병력 증파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악화된 여론으로 병력증파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북폭중지 명령과 함께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야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 실패작인 테트공세가 멀리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심장부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테트공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공산군이 제안하는 ‘휴전’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공세 직전 북베트남이 휴전을 선언하고 베트콩이 일부 포로를 석방한 것은 결국 그들의 대공세를 숨기기 위한 기만책일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 6.25 한국전쟁 직전에 우리 역시 북한 공산당의 평화 제스처를 경험한 일이있다. 전쟁 발발 직전, 북한은 그들이 구금한 조만식 선생과 우리가 체포한 간첩 두명을 교환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테트공세 직전 북베트남의 휴전과 한국전쟁 직전 북한의 제의는 똑 같은 맥락의 술책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북한 노동당 세력과 그들을 추종하는 친북-종북세력들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테트공세는 매우 귀중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민족 멸망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