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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현대사의 올바른 이해<5>1950년대의 모순과 성취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0년간은 조선왕조의 패망, 일제의 지배, 해방, 분단, 건국, 전쟁으로 이어진 격동의 역사가 남긴 깊은 상처와 부(負)의 유산으로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던 지독한 모순의 시대였다.

    전쟁은 약 200만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자를 냈다. 전장에서 죽고 다친 군인들이 100만이라면, 전선의 이동에 따라 죽이고 죽임을 당한 민간인의 피해가 역시 100만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폭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 시대의 한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통은 가난, 곧 배고픔이었다. 전쟁은 산업시설의 40%를 파괴했다. 1955년 1인당 국민소득은 65달러에 불과했다. 1910년의 소득 수준이 그러했다. 역사는 50년이나 후퇴했던 셈이다.

  • ▲ 1960년대 충주비료 공장 전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공업화 정책에 따라 건설된 충주비료 공장은 가깝게는 우리나라 초기 화학공업에, 멀게는 중공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1960년대 충주비료 공장 전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공업화 정책에 따라 건설된 충주비료 공장은 가깝게는 우리나라 초기 화학공업에, 멀게는 중공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 나라의 경제를 지탱한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1950년대에 걸쳐 미국은 약 27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 한국은 단일 국가로서는 최대의 원조 수혜국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인의 기초적 생필품을 제공했으며, 국가재정의 dir 절반을 충당했다. 미국이 볼 때 한국은 그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구했을 뿐만 아니라 먹여 살리기도 해야 하는 부담 그 자체였다.

     절대적 가난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고 부정부패를 만연시켰다.
    정치가, 관료, 은행원, 회사원, 군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부패했다. 영관급 장교라 해도 월급만으로는 보름을 넘기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 위에 정치는 심하게 분열했다.

    국민의 70%는 문맹이었다. 모든 종류의 국제적 기준에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후진적인 나라에 속했다. 1948년 자유 이념의 국가가 들어섰다고 하나 겨우 기초를 닦고 기둥을 세웠다고 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잘 통합된 국민국가로 발전해 갈지 여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역사는 캄캄한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었다.
     대개 이러한 이유로 50년대는 지금까지 허무와 불임의 시대로 통해 왔다. 이 같은 50년대 인상은 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를 주도한 정치세력에 의해 조장됐다. 나중에 80년대가 되어 이 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둬 중진국의 대열에 끼게 됐을 때 엉뚱하게 이 나라가 애당초 잘못 생긴 나라라는 역사 인식이 널리 유포됐던 것도 따지고 보면 위와 같은 50년대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한편의 원인이 있었다. 많은 역사 교과서는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살 만한 사회는 아니었어, 모두가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 때문이야.”

     그렇지만 최근의 많은 연구는 그 시대가 허무와 불임의 시대만은 아니었음을, 미약하나마 창조와 생산의 싹이 움텄던 시대이기도 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제약은 시장의 결여였다. 60년대 이후처럼 국제적으로 넓고 자유롭게 열린 시장이 그 시대에는 없었다. 원조로 이루어진 무역을 제외한다면 50년대 말 한국경제의 개방률은 10%가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일제하 1940년은 60%였다.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소득을 안기는 시장이 닫혀 있으니 무슨 재간을 부려도 큰 소용이 없는 시대였다.

    한때의 지배자 일본은 1956년부터 고도성장의 길에 들어섰다. 그 일본과의 협력이 절실했지만 불가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거부하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시장을 결여하기는 한국만이 아니었다. 50년대는 자유진영에 속한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재건하는 시대였다. 아직 자유무역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런 악조건 하에서 이승만 정부가 후대의 역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이른바 교육혁명이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과학주의의 기치 하에서 근대문명에 대한 국민적 학습이 그 시대에 광범하게 이뤄졌다.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으로 성립했다. 1945~60년에 걸쳐 초등학생이 163만에서 359만 명으로, 중ㆍ고등학생이 13만에서 78만 명으로, 대학생이 7800에서 9만8000명으로 증가했다. 50년대에 걸쳐 2400명의 공무원이 해외훈련이나 시찰을 다녀왔으며, 9000명 이상의 장교가 미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같이 축적된 인적자본은 60년대 이후 이 나라가 고도성장의 경주를 벌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배경에는 구래의 신분질서를 대신해 학력이야말로 개인의 사회적 성취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 국민의 향학열이 있었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한국인의 가정경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규범이었다.

     자립적인 국민경제의 건설을 위한 이승만정부의 집념도 적지 않은 성과를 낳았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승만 정부가 원조자금의 배분이나 환율정책에 있어서 원조의 공여국인 미국의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원조 자금과 물자에 기초해 면방직, 제당, 제분과 같은 소비재 공업이 건설됐다.

    그뿐만 아니라 철강, 유리, 시멘트, 비료 등 생산재 공업의 건설에서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에는 원조자금만이 아니라 한국정부가 애써 조성한 재정자금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기존의 연구는 그 과정에서 권력과 유착한 재벌의 어두운 면을 그렸지만, 최근의 연구는 그와 다르다. 비록 정부로부터 큰 지원을 받은 기업이라 하더라도 기술혁신과 시장개척에 소홀할 경우 머잖아 시장에서 도태됐다.

    50년대의 한국경제는 종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활기찬 자유경쟁의 시장이었다.

     그 결과 1960년께면 면방직과 철강 등을 필두로 해 좁은 국내시장을 넘어 해외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약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국내정치와 국제관계의 모든 것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건국을 위한 이념의 정치가 아니라 부국을 위한 실용의 정치여야 했다. 역사적으로 이 땅에 축적된 성장의 잠재력을 총체적으로 동원하고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러한 시대적 요청과 더불어 건국의 성취, 전쟁의 방어, 초기공업화의 역사적 과제를 완수한 이승만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갔다.
    50년대는 그렇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결코 허무와 불임의 시대는 아니었다.

    <국방일보, 2011.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