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文化왕국 新羅 이야기 
      
     4~6세기 북방 草元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의 先進 문화가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일본인의 주장.
    趙甲濟   
     
     *2002년 1월호 月刊朝鮮/편집장의 편지
     
      저는 지난 11월 말 일본 도쿄에 가서 유명한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62)씨를 만났습니다. 북한 관계 간담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치바나씨를 역사적 인물로 만든 것은 1974년 11월호 文藝春秋에 쓴 「다나카 연구 - 그 인맥과 金脈」이란 기사로 인해서 다나카 당시 수상이 물러난 사건이었습니다. 文藝春秋 기자를 잠시 하다가 그만두고 프리랜서 신분으로 일하던 당시 34세의 다치바나씨가 쓴 이 기사는 일본 정계의 巨物 다나카의 정치자금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치부 기자들은 알면서도 안 썼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언론은 이 심층취재 기사를 묵살했는데 일본 주재 외국 특파원들이 거론하면서 큰 스캔들로 확대되었고, 집권 자민당內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져 다나카는 실각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가 끈질긴 추적으로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닉슨 측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한 사건)의 여파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것이 그해 8월. 미국과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가 젊은 기자들의 특종으로 물러났으니 그때 29세의 초보 기자였던 제가 『나도 언제 저런 특종을 하나』 하고 부러워했던 것은 독자 여러분들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다치바나씨는 그 뒤에도 줄곧 사회·정치 문제에 관한 심층취재를 계속하였고 수많은 저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쓴 冊名만 봐도 관심의 폭이 대단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공산당 연구」, 「아메리카 性革命 보고서」, 「록히드 재판 방청기」, 「우주로부터의 귀환」, 「腦死」, 「農協」, 「증언·臨死체험」, 「신세기 디지털 강의」, 「로봇이 거리를 거니는 날」, 「원숭이學의 현재」 등등. 
        
      과학과 컴퓨터에 전문적인 저서를 남긴 그지만 지금도 만년필로 원고를 쓰고 있었고 자료 관리는 부인이 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집체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고독한 단독 작업이란 것을 새삼 확인하니 저도 안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론의 새로운 類型을 만든 사람입니다. 언론사에 소속되지 않고도 세상을 바꾸는 언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셈입니다. 다치바나씨는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우리 집 서재엔 소설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직업인 기자는 想像이나 架空을 습관적으로 기피하게 되는가 봅니다.
     
     
      다치바나씨를 만나러 가기 전에 서점에 들렀더니 그에 관한 신간이 있었습니다. 「다치바나의 전부」란 책인데 「知의 巨人, 不斷의 行步」란 선전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정치와 사회 문제를 많이 다뤘던 다치바나씨는 최근엔 死後 세계의 존재 여부, 디지털 세상, 우주 이야기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적이 있다는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臨死體險」이란 기사는 月刊朝鮮에 번역되어 실린 적도 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영혼이 死後에도 살아 있다고 믿느냐』고 했더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 책의 결론도 그런데,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은 死後 세계의 존재를 입증한 글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도쿄 한복판의 오래 된 주택가에 다치바나씨의 집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 옆집에 뉴스위크誌 도쿄특파원 다카야마 히데코 여사가 살고 있습니다. 다카야마 특파원은 탈북자들을 同行 추적한 기사를 뉴스위크의 커버 스토리로 쓰는 등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참 기자입니다. 다카야마 특파원의 집에서 밤 늦게까지 다치바나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쿄대학 佛文科를 졸업했다가 다시 철학과에 학사 입학했다는 그는 살이 찐 몸과 큰 머리, 독서와 집필에 지친 듯한 표정, 그리고 天才의 눈 -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갖고 있는 初老의 남자였습니다. 헤어질 때 그의 사무실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3층짜리 검은색 건물은 정말 희한한 곳이었습니다. 바깥 벽면에 고양이 눈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고양이 빌딩」이라고 불립니다. 그 안에는 약 3만 권의 책들과 자료철이 書架, 바닥, 화장실 안에 어지럽게 꽂혀 있었고, 책들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한복판에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통로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았는데, 꼭 사이공 근교의 구치 땅굴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다치바나씨는 지금 열심히 밑줄을 쳐 가면서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서 보여 주었습니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66)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 문화 왕국 - 新羅」(新潮社)란 317쪽 분량의 원색 사진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책의 띠에 쓰여 있는 선전문구가 아주 섹시했습니다.
     
      「古代史가 바뀐다! 東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다! 출토유물과 新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實在자료에 의하여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귀국하자마자 저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1973년과 이듬해 경주에서 발굴한 天馬塚(천마총·발굴 당시는 155호 고분)과 皇南大塚(황남대총·발굴 당시는 98호 雙墳) 출토 유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부산의 국제신보 문화부 기자로 있으면서 이 발굴 현장에서 수개월 간 취재하였습니다. 著者 요시미즈씨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草原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못지 않은 先進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라의 이런 입장이 바뀌게 된 것은,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 신라는 중국에 朝貢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著者는 이 책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그 후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唐과의 교류를 밀접히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도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소국 신라가 지녔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 문화의 수용 시대에 쌓아 올렸던, 중국 문화와는 다른 에너지의 잠재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도 통일의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합니다. 
        
      흥분한 요시미즈씨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습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합니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신라 왕과 異國의 왕·왕비 사이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玉구슬 속에는 뭔가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 전개와 고대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문화 상황이 넘쳐날 정도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신라의 王墓에서는 로만 글라스(로마 유리제품)를 비롯, 황금의 칼, 금가락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 裝身具나,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형 왕관, 자작나무로 만든 冠帽 및 말 배가리개(障泥·장니)가 나왔고, 무엇보다도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積石木槨墳이 확인되는 등 중국 문화권에는 없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씨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시미즈씨의 글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토해 내는 환희의 절규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논리 전개와 사실 확인 과정의 엄밀성과 과학성은 학자적입니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습니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1996년에 석 달 간 몽골 벨트 지역, 즉 중국 신강성-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파키스탄-인도-터키-불가리아-헝가리-폴란드-러시아를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古都 사마르칸트 박물관에 갔더니 7세기경의 벽화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한 외국 사절단의 그림이 있는데 그 속에서는 외국 학자들이 신라에서 온 使臣이라고 단정한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신라가 이 먼 곳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 몽골벨트 지역은 북방 草原 지대입니다. 스텝이라고 불리는 이 유라시아 대초원은 대륙 속의 지중해와 비슷합니다. 못 넘을 산도, 강도, 절벽도 없습니다. 가장 유용한 운송 수단은 말입니다.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말들은 지중해의 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농경지대에서 살아버릇한 민족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대의 騎馬군단은 기동력이 강했고 행동범위가 넓었습니다. 칭기즈칸 시절 몽골은 지금의 몽골이나 러시아 남부에 본부를 두고 저 멀리 지금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까지 騎馬군단을 원정보냈습니다. 이런 작전 기동 거리는 탱크나 비행기가 발견된 지금도 흉내내 본 적이 없는 사상 最長입니다. 驛馬制를 이용하면 몽골에서 유럽까지 말로써 수개월이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 淸의 기마군단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지 1주일 만에 서울에 당도했습니다.
     
      이런 기동을 가능하게 했던 草原과 말을 이해한다면 왜 로마 세계 및 중동·중앙아시아가 新羅와 교류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풀립니다. 大草原이란 「유라시아 지중해」의 서쪽 연안에 로마 세계가 있었고, 동쪽 끝에 新羅가 있었던 것입니다. 
        
      復元된 경주 천마총 안에 들어가보신 독자분들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5세기경의 이 積石목곽분은 왕릉으로 추정됩니다. 제가 취재할 때 현장에서 느낀 이 무덤의 이미지는 황금과 馬具와 무기 창고였습니다. 天馬塚이란 이름은 말의 배를 가리는 자작나무 가리개에 그려진 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140種의 출토 부장품 가운데 29종이 裝身具, 21건이 무기, 15건이 馬具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북방 유목 민족식 기마군단 전법을 쓰고 있었는데 이 무덤은 그런 야성과 호화스러움으로 넘쳐 있었습니다. 신라 흉노 등 북방 草原 계통 지배층의 공통 상징물은 황금, 말, 積石목곽분 같은 것들입니다. 신라가 유독 북방 초원의 길을 잘 이용하여 로마 세계와 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신라 지배층이 이 草原 지대의 왕자인 흉노족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흉노와 신라 지배층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상력을 동원한 說들이 있습니다. 張漢植(KBS 기자)씨는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흉노족 계통의 鮮卑族 모용황이 지휘한 5만5000기병의 일부가 신라로 쳐들어와서 정복왕조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月刊朝鮮 1999년 9월호 게재). 신라 지역에서 4세기경 이후에 천마총 같은 거대한 積石목곽분이 등장하는 것은 흉노계 세력이 정권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張기자는 법흥왕의 이름이 중국 史書에 慕秦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慕容氏의 후손이란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신라 文武王陵의 碑文에는 문무왕의 조상이 기원전 120년 漢武帝에게 포로로 잡힌 흉노왕의 아들 金일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 3國 지배층의 출신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계통으로서 지금의 몽골 동부 지역에서 南進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나라 지배층의 무덤은 주로 석실묘입니다. 고대 신라의 고분양식은 이와는 다른 積石塚인데다가 여기서 나온 금관 馬具 장신구 무기 등 유물도 백제, 고구려보다 더 짙은 북방 기마민족의 냄새를 풍깁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본다면 신라를 일으켜 세운 4~6세기의 지배층이 匈奴계열일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입니다. 匈奴는 대체로 몽골 고원의 서쪽 알타이 지역, 즉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이들의 행동반경 안에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흑해 연안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로마 문명권과 겹쳐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 등 유물이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정도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스키타이族은 기원전에 러시아 남쪽, 이란 북쪽,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했던 서양인 계통의 유목 기마 민족이었습니다. 스키타이 계통의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흉노에게 전해졌을 것이며 흉노계인 新羅 지배층에게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동부 몽골 계통의 고구려와 백제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해서 중국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는데, 서부 匈奴 계통의 신라는 중국보다는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서방문화, 즉 흉노-스키타이-로마 문화를 많이 수입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史實일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4~6세기 신라의 집권세력이 인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시 북방 초원을 주름잡던 유목 기마 민족과 친밀했고, 그 자신들도 조상들의 무대였던 북방 초원에 대한 노하우와 기억이 살아 있어 그 통로를 활용하여 서방과 교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古新羅는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서방 로마 세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당시 北중국에는 北魏란 나라가 섰는데 이 나라의 지배층은 흉노계의 선비족이었습니다. 이 北魏는 로마 세계와 교류했습니다. 신라 지배층은 同族이 지배하는 북방 세계의 질서를 잘 활용하여 로마 세계와 교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北魏도 수도를 중국 내륙으로 옮기면서 신라는 북방초원의 길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 「로마 문화 왕국 - 新羅」의 해석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상상하고 추리했던 것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요시미즈씨의 推論에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요시미즈씨의 주장이 종전의 학설과 다른 것은 종전의 연구가 신라와 西域, 신라와 스키타이 정도의 교류에 집중되고 있었던 데 비해 그 교류의 動線을 로마의 세계 - 흑해·中東·불가리아 및 루마니아 지역으로까지 연장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입버릇처럼 우리 민족사의 로마는 新羅란 말을 했습니다만 요시미즈씨는 저의 直觀을 과학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예컨대 천마총 건너편에 있는 황남대총 발굴 때는 南墳과 北憤 두 무덤에서 모두 11점의 로만 글라스 제품이 나왔습니다. 로만 글라스란 것은, 서기 395년에 로마 제국이 西로마와 東로마로 분열한 이후 西로마가 망한 476년까지 사이에 만들어진 유리 용기를 말합니다.
     
      이런 로만 글라스는 고구려, 백제 무덤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시미즈씨는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신라 고분 10基에서 출토된 24점의 로만 글라스를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신라 사람들이 로마 세계로부터 기술을 수입하여 만든 국산품 로만 글라스도 있었습니다.
     
      요시미즈씨는 이들 로만 글라스의 거의 대부분은 지중해 동해안, 즉 이집트·시리아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이 러시아 남쪽의 초원지대로 건너갔고 여기서 북방 기마 민족의 벨트를 타고 신라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 고분에서 로마 문화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물건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갔으며 로마의 정신문화도 묻어왔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든 것이 1973년에 경주 鷄林路 공사장에서 발굴된 황금 寶劍입니다. 길이 약 30㎝ 되는 이 보검은 황금판에다가 여러 개의 보석을 박은 호화찬란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名品입니다. 요시미즈씨는 이 보검의 계보를 추적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 생산하여 신라 王家에 선물한 칼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트라키아 왕이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까지 가서 下賜받았든지 둘 중 하나란 것입니다.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왕이 금세공 기술자를 신라로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습니다.
     
      신라 고분만큼 황금 세공품이 많이 나오는 유적도 세계적으로 드물 것입니다. 흉노 등 유목 민족의 황금 숭배 사상은 유명합니다. 신라를 세운 시조가 金씨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황금은 말과 함께 북방 유목 민족의 상징물입니다.
     
      4~6세기 신라 發興期의 지배층이 흉노와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유물 중에서 금관과 積石목곽분이 가장 결정적일 것입니다. 천마총,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은 중국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서방식입니다. 즉,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북방 유목 민족들이 사용한 양식인데(나뭇가지 장식 등), 이 양식은 로마의 冠을 상당 부분 본뜬 것이라고 요시미즈씨는 주장하였습니다.
     
      積石목곽분은 우리가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달형의 고분입니다. 나무로 목곽을 짜고 그 안에 목관을 넣습니다. 그 목곽 위에 강돌을 쌓아올리고 나중에는 흙으로 덮지요. 세월이 가면 목곽과 목관이 썩어 안으로 무너지지만 그 덕분에 도굴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墓制는 가까운 고구려, 백제, 중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저 멀리 알타이 산맥 지방, 중앙아시아 지방, 러시아 남쪽의 초원지대에서는 자주 발굴되는 전형적인 흉노의 무덤입니다.
     
      아무리 火葬을 강조해도 埋葬이 성행하는 것은 장례풍습이 바꾸기 어려운 문화이고 그 때문에 한 민족의 정체성을 분석할 때 매우 유용한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에겐 같은 묘제를 쓴 흉노족이, 인접해 있으나 다른 묘제를 쓴 백제·고구려 사람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삼국사기」의 신라통일기 記事를 읽었을 때 등장하는 통일 주역들의 人物像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도층의 희생정신과 率先垂範(솔선수범),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 높은 자주성과 깊은 교양,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한 성품, 활달하면서도 퇴폐해 보이지 않는 性 풍습, 그리고 국제정세를 보는 넓은 안목. 꼭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국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 문화 왕국-신라」의 著者 요시미즈씨는 신라 통일의 원동력이 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졌습니다. 한반도의 한구석,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금의 영남지방에 갇혀 있었던 신라인들이 백제·고구려보다도 국제 정세의 변동에 기민하게 대처했고 當代의 슈퍼파워 唐의 힘을 주체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하나의 驚異입니다.
     
      唐이 10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보내 신라를 도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 신라가 불쌍하고 귀여워서 자선사업 삼아 했겠습니까. 그런 일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自國 젊은이들의 피를 쏟게 한다는 것은 死活的인 국익을 도모한다는 것인데, 唐은 신라를 도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엔 신라마저 먹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신라와 동맹하여 서기 660년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唐은 평양에 일종의 총독부로서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 舊土와 백제 舊土, 그리고 신라까지도 사실상 식민지배下에 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文武王과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唐의 패권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게 하면 평화를 구가할 것입니다. 아니면 국가의 命運을 걸고 최종 결전을 감행할 것인가. 이럴 경우 또다시 엄청난 인명피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세계 최강의 唐, 그것도 최전성기의 대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의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668~670년 신라 지도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對唐 결전을 결단합니다. 평화에의 유혹을 버리고 자존심과 생존권을 택한 것입니다. 이 결단 덕분에 저와 독자 여러분들은 지금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국에 달려든 반도의 小國을 나무라는 唐將 薛仁貴의 편지에 문무왕이 답장을 보냈는데 이는 强首란 선비가 草案(초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문무왕은 그동안 唐兵이 한반도에서 작전할 때 신라가 희생적으로 도와 준 예를 든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유인원 이하 병사들은 皮骨(피골)은 비록 漢나라 땅에서 갖고 났으나 그 血肉은 신라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 뒤 6년 간의 결전에서 신라는 唐軍을 육지에서, 바다에서 무찔렀습니다. 문무왕은 勝戰에 오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길 때마다 唐에 사신을 보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달랬습니다. 唐의 침략을 막을 수는 있지만 唐을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한계와 분수를 잘 알았던 것입니다. 唐도 신라를 먹으려면 큰 상처를 입어야 하지만 저 작고 독한 나라를 그냥 버려두어도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을 한 끝에 신라의 통일을 인정해 주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철수시켰습니다. 한반도가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바탕에서 언어, 가치관, 풍습을 같이하는 한민족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正統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선택-對唐 결전을 결단한 신라 지도부의 배짱과 자존심에는 그 수백년 전 받아들인 로마 문화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까. 요시미즈씨의 논법에 따르면 신라 지도부는 6세기 법흥왕 때부터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배우기는 했지만 가슴 한쪽에는 『북방 초원 - 로마 문화를 아는 우리가 너희들보다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오기를 지니고 있었지 않을까요. 이는 虛勢의 오기가 아니라 실력 - 경제력, 예술, 종교, 군사력, 製鐵 기술로 뒷받침되는 배짱과 자존심이었을 겁니다.
     
      신라는 북방 초원의 군사 문화, 로마에서 유래한 물질 문화, 중국으로부터의 종교 및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多層的 문화 국가였습니다. 文武가 균형잡힌 완성형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균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圓光 법사가 만든 世俗오계의 맨 마지막 殺生有擇이란 말입니다. 「전국시대인데 국가를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적을 죽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가려서 죽여라」 하는 충고가 高僧의 입에서 나왔다는 데 신라의 格과 균형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화를 다 받아들여 그 장점만 취할 수 있는 소화력을 가진 국가나 개인은 성숙한 인격과 안목을 가집니다. 신라가 7세기의 국제 환경 변동기에서 東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고 삼국통일을 해낼 수 있었던 비결도 다양한 외래 문화를 소화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요. 소국이 강대국을 이용하려다가는 거꾸로 이용당하는 것이 정상인데 신라는 唐을 이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주체성도 로마 문화 수입 경험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양한 경험과 국제적 안목을 가지면 사물을 볼 때 입체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대책을 내놓을 때도 여러 수를 쓸 수 있게 됩니다. 小國이 단선적 사고방식과 외통수의 전략으로 大國을 대하다가는 먹히지만 신라처럼 한쪽에선 唐과 싸우고 다른 쪽에선 唐에 사과하는 양면전략을 쓸 수 있어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단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한 신라에 대해서 『비겁하다』,『솔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신라가 唐을 이용하여 삼국통일을 해낸 것에 대해서도 『사대주의적이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연장선상에서 국가관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아주 미숙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입니다. 신라의 통일 지도부는 복잡한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본질을 단순화하여 결단을 내리되 그 추진은 전략적으로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음이 확실합니다. 대한민국이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우리도 신라처럼 한반도 상황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를 우리 페이스대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북한 정권을 흡수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킴으로써 신라가 그랬던 것처럼 東아시아에 항구적 평화공영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국가 지도부가 국제적 교양·文武 통합의 원숙함·실력을 딛고 일어선 자존심을 두루 갖춰야 할 것입니다. 로마 문화는 미국에까지 흘러간 서양 문명의 저수지요, 북방 초원의 騎馬 문화는 총이 발명될 때까지 세계사를 지배한 육상 군사력의 선두주자였으며, 중국 문화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文民 문화의 正統입니다. 이 세 일류 문화를 다 소화한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여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었으나 그 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당시의 야성과 지성은 우리 민족의 무의식으로 沈潛해 버렸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로마 문화에 源流를 둔 서양의 해양문화(시장경제+자본주의)와 다시 만남으로써 한국인은 4~6세기경의 로마·北方 草原 문화 기억을 우리의 DNA 유전자 속에서 끄집어 내고 본래의 야성과 지성을 다시 찾아낸 것이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저의 말이 我田引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중으로 「삼국사기」를 사서 金庾信傳을 먼저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신라정신을 詩로써 추구했던 未堂 徐廷柱의 詩도 한 번 읽어보십시오. 가슴이 시원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