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道(?) 이명박, 極左 박원순의 '든든한 후원자' 
      
     서울시장 재직당시 <아름다운재단>에 '4년치 월급 전액기부'
    金泌材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박원순 주도의 ‘아름다운재단’에 자신의 매달 급여 전액을 기탁했었다.  당시 이명박의 월급은 제세공과금을 제외하고 500만원이었다. 이 금액은 매달 이명박의 우리은행 계좌를 통해 ‘아름다운재단’의 ‘등불기금’으로 자동이체됐다.  

    ‘아름다운재단’은 이런 방식으로 이명박의 급여를 모아 임기동안 2억이 넘는 규모의 기금을 조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복수의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 박원순은 <프레시안>(2009년 8월17일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했다. ‘아름다운 가게’를 하고 있을 때 이명박 당시 시장이 ‘아름다운 가게는 지상최대 벼룩시장’이라고 하면서 격찬한 적도 있다. 그래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데를 찾아보라’고 해서 지금껏 영동 대교 밑 뚝섬에서 벼룩시장을 매주 한 번씩 열고 있다. 이명박 시장 때문에 된 것이다. 그래서 명예고문으로도 모셨고, 행사도 여러 차례 참석했다.”

     MB, 아름다운가게 ‘명예고문’ 되기도 

    당시 ‘이명박 시장에게 정책적 조언을 했는냐’는 질문에 박원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만났는데 그 때는 시민 사회 단체 등이 낸 아이디어를 많이 받아들였다. 서울 숲이 그렇다. 상암동 골프 연습장을 없애는 일도 같이 했다. 이명박 시장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하면 바로 실천하는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실용정부를 내세웠을 때 관료의 비효율을 개혁하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었다…(중략)” 

    박원순은 또 <시사IN>(2009년 9월21일)과의 인터뷰에서 ‘서울시장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느냐’는 질문에 “이명박 시장 4년 임기 동안 그는 월급을 전액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다. 아름다운 가게 행사에 여러 차례 참석하고 본부 사무실을 방문해 미래 발전방향 브리핑을 들은 뒤 명예고문이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박원순은 이어 “이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실용정책과 의견 수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면서 “그 답례로 나는 서울시에서 자문기구로 운영하던 ‘에코 카운슬(ECO COUNCIL)’ 멤버로 ‘다양한 자문’에 응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좌파단체 자금줄?

     박원순은 《야만시대의 기록》 외에 《국가보안법1·2·3》등의 저서를 통해 국보법 폐지와 좌파적 역사관 확산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2000년 이후 줄곧 ‘아름다운재단’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左派단체를 후원해왔다.

     ‘아름다운재단’은 구체적으로 긴급구호, 아동·청소년, 장애, 여성, 교육, 노인, 문화, 공익일반 등으로 세분된 세부사업 가운데 공익일반 사업 지원 금액의 상당규모를 국보법폐지, 한미FTA체결반대, 평택범대위 등 친북반미 운동을 벌여온 시민단체 혹은 활동가들에게 제공해왔다.

    이와 함께 재단은 ‘내일을 위한 기금’이란 명목으로 2004년 국보법폐지연대를 비롯,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녹색연합’, ‘참여연대’ 소속의 활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왔다.

     2004년에는 통일연대와 국보법폐지연대, 파병반대행동, 평택범대위 회원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소속 부부 활동가의 ‘美대륙 횡단여행, 국보법폐지연대, 파병반대행동, 평택범대위 산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 소속된 활동가의 ’즐기며 공부하는 캐나다 어학연수‘ 등에 각각 300만원과 200만원을 지원했다.

     2007년에는 광주경실련(김재석, 프로그램명: 북해도 가족여행), 전농나주농민회(김양정, 프로그램명: 체게바라를 닮아라! 그래 다시 일어서는 거야), 전북여성농민회연합(박연희, 프로그램명: 여성농민 희망 찾기),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고유경, 프로그램명: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 등의 단체 활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재단은 또 ‘변화의 시나리오’라는 이름의 기금프로그램을 통해 2006년 22개 단체를 신규 지원하고, 15개 단체를 지속 지원했다. 지속 지원을 받는 단체 가운데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열린사회시민회의´ 등은 국보법폐지연대 소속이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인천여성민우회´등은 파병반대행동 소속이다.

     2006년 신규 지원된 단체 중 ‘경남여성회’, ‘대전여민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국보법폐지연대 소속이며 △대구참여연대 △서울여성노동자회 △두레방 △경남여성회 △대전여민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파병반대행동 소속이다.

     박원순, 한상렬 주도 ‘통일연대’ 지도위원으로 활동

     박원순은 대표적 從北단체로 국보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을 주장해온 통일연대 지도위원으로 홈페이지에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수년 전 삭제됐다. 통일연대는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출신의 목사 한상렬이 주도했던 단체이다.  

    한상렬은 노무현 정권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反美·從北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2010년 6월12일 정부 승인 없이 평양을 방문해 70일 동안 머물면서 ‘천안함 사건’ 및 북핵 문제 등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주도, 공안당국에 의해 구속됐다.  

    한편, 이명박은 대통령 당선이후 박원순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성권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이 2010년 9월7일 ‘참여연대 창립 16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 참석,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김민연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의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후원금을 전달했다. (참여연대는 박원순 주도로 1994년 결성됐다) 

    당시 이성권 비서관이 악수를 나눴던 박원석은 2008년 5월24일 촛불집회를 불법 거리 시위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당시 그는 무대에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청와대로 가자’고 방송으로 선동했던 인물이다. 

     청와대 관계자, 참여연대 등 左派 시민단체와 교류

     1970년생인 박원석은 1994년 참여연대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직에서 간사, 연대사업국장 등을 지냈다. 동국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90년 8월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과격 시위를 하다가 구속돼 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 ▲ 지난 9월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참여연대 창립 17주년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박원순.ⓒ
    ▲ 지난 9월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참여연대 창립 17주년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박원순.ⓒ

     참여연대는 極左인사 오종렬-한상렬 주도의 한국진보연대와 함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했고, 2010년 3월26일 천안함 폭침이후 북한의 도발을 부정하는 서한을 UN안보리에 보내 물의를 빚었던 단체이다.

     당시 이성권 비서관의 참여연대 행사 참석 문제를 보도했던 <한겨레신문>은 “참여연대 쪽은 ‘청와대 비서관이 요즘 시민사회단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분명 달라진 모습’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쪽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적 차이를 떠나 자주 만나 대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시민단체와 소통하려는 청와대의 노력은 지난 7월(2009년) 청와대에 시민사회비서관, 국민소통비서관 등을 포괄하는 사회통합수석이 신설된 뒤 좀더 활발해졌다는 게 시민단체 쪽의 평가”라며 “박인주 사회통합수석은 지난 7월20일 진보 단체들의 모임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후원 행사에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수석으로는 처음 참석했다”고 전했다. (조갑제닷컴)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

     [관련자료] 박원순의 홈페이지 '원순닷컴'에 게재되어 있는 이명박과 박원순의 관계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이야기

    1. 이명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시장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그만두고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사업을 열심히 벌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대통령이 서울시장 당선된 뒤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 나는 그 분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 때 나는 “월급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은 데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면서 환경미화원과 소방대원을 위해 기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환경미화원들은 새벽, 주로 미명에 일합니다. 그때가 가장 차들이 적게 다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때는 대부분의 차들이 속도를 많이 내는데다가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시간대이기도 합니다. 환경미화원들이 사상을 당하고 공상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주는 돈은 대단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과 그 유족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소방대원이라고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들의 유자녀를 돕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은‘등불기금’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기부해 주실 것을 요청 드렸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이대통령의 월급은 바로 이 기금에 4년 임기동안 전액 기부되었습니다.

     2. 이대통령과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가게 초창기에 ‘지상 최대의 벼룩시장’이라는 큰 행사를 우리가 주최했습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여러 기관, 단체, 시민들이 헌 물건을 가지고 나와 파는 일종의 벼룩시장을 연 것입니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이 행사는 30여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반향을 얻었고, MBC는 7시간 동안 행사 전체를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해외에서 귀국하자말자 긴 시간을 내서 잠실운동장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고무 받아 이대통령은. 차후에 벼룩시장을 지속적으로 열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는 등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뚝섬 영동대교 아래에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이대통령은 아름다운가게 행사에 여러 번 참여하였고, 아름다운가게 본부 사무실을 방문하여 아름다운가게의 미래발전방향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명예고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3. 뿐만 아니라 나는 서울시의 ECO-COUNCIL이라고 하는, 이대통령의 자문기구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이는 이 회의에서 서울시의 환경과 지속가능한 정책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논의의 상당 부분은 서울시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였습니다. 뚝섬의 서울숲이나 상암동 난지도 골프연습장 취소 등의 조치는 대부분 여기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만남과 논의를 통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이대통령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실용적 정책과 의견 수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내가 2004년 독일을 3개월 여행하게 되었을 때 베를린 도시국장을 꼭 만나보라고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나도 독일에서 돌아와 세계인권선언의 조문을 울타리에 새겨 넣는 테마공원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권유해서 승낙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대선에 돌입하고 있는 때여서 더 이상의 진전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 ECO-COUNCIL의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문국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고 또 다른 멤버였던 사람들이 정치권을 오갔지만 나는 이 선거과정에는 일체 중립을 지켰고 정치과정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원칙이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정파적인 입장에 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자고 변호사까지 그만두고 지난 20-30년을 이런 공익적 활동에 나섰겠습니까? 제가 권력에 관심이 있었다면 진작 청와대나 장관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나라당조차 저를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여러 차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처럼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든 것이지요.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