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현대사의 올바른 이해(3)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올해는 6ㆍ25전쟁의 제61주년이다. 우리는 그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가.

    전쟁은 한 나라의 성립, 존속 또는 멸망과 관련된 최고 수준의 정치다. 이에 전쟁에 대한 기억은 정정당당해야 한다.

    6ㆍ25전쟁과 대한민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6ㆍ25 하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역사책을 보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산업 시설이 파괴됐다고 한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남북의 대립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한국에서는 반공주의가 극성을 부려 인권 탄압이 자행됐다고 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전쟁의 기억이 그렇게 어두워서는 곤란하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6ㆍ25를 내전이라고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에서 상이한 이념의 두 국가가 들어섰다.

    남한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본 이념으로 했다. 북한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공산주의를 지향했다.

    두 국가는 각기 상이한 방향의 통일을 추구했다. 한국은 북한 동포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국토완정론을 추구했다. 조만간 통일을 위한 전쟁은 불가피한 형국이었다. 그러했던 한, 6ㆍ25를 두고 서로 다른 두 이념의 정치세력이 벌인 한판의 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편에서 지적했듯이 어느 쪽이 옳은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불투명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정치와 지성이 이 문제를 두고 분열하고 대립했다. 그런데 역사가 60년이나 흐른 오늘날에서까지 어느 쪽이 옳았는지를 망설인다면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는 우리에게 역사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값비싼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인간의 깊은 본성은 자유다.

    그 자유가 보장된 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누린 반면, 그 자유가 부정된 곳에서는 하나 같이 빈곤과 부패와 폭력의 굴레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이에 더 이상 6ㆍ25를 두고 동족상잔의 슬픈 내전이라고 해서는 곤란하다.

    6ㆍ25는 장차 우리 민족을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 자유 이념의 국가를 건설해 가는 길목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무력 도발을 물리친 정정당당한 이념의 전쟁이었다. 그 위에 6ㆍ25가 갖는 국제전으로서의 성격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ㆍ25는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 건의하고 그의 재가를 받고 그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이었다.

    당초 1949년 3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묵살했던 스탈린은 같은해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차지하는 국제정세의 유리한 변화가 있자 1950년 1월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했다. 연후에 T-34 탱크 242대를 북한에 보내는 등,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해 5월 마오쩌둥은 약 3만 명의 팔로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부대를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최근에 밝혀진 스탈린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그가 전쟁을 승인한 것은 단지 한국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에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을 극동의 군사적 분쟁에 묶어 둠으로써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체제를 건설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 혹 있을지 모를 미국과 중국의 화해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두 나라를 군사적 분쟁으로 이끎으로써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소련의 지도력을 굳건히 할 수 있다는 점, 바다를 건너온 미국이 광대한 중국을 쉽게 꺾을 수는 없으며 이에 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위신이 추락하리라는 점,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공산혁명을 위한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겨냥했다.

    소련이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결의한 안보리 회의에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다목적의 노림수에서였다.

     요컨대 6ㆍ25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 공산주의 세력이 미국을 한반도로, 나아가 만주로까지 유인해 심대한 군사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동서냉전의 초기단계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겠다는 계산 하에 치밀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방어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과 민주주의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세계혁명을 휴전선에서 봉쇄하는 전략적 교두보로서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6ㆍ25전쟁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기대하지 않은 큰 선물을 안기기도 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그것이다.

    전쟁 이전의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성립하자 1949년 5월 약속을 지켰다며 쉽게 군대를 철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후 발칸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1950년 1월 양쪽을 다 감당할 수 없다며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했다.

    그런 미국이 6ㆍ25 소식을 접하자 주저하지 않고 개입한 것은 그 전쟁이 소련이 미국을 겨냥한 국제전이란 점을 예리하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전쟁 과정에서 3만5000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됐다. 미국은 한국에서 물러날 수 없는 이해관계의 당사국이 됐다.

    그 결과 1953년 10월 한국과 미국 사이에 군사적 동맹이 체결됐다. 피로 맺어진 동맹이었다. 이후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원조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하도록 조언했다.

    한국은 미국이 전후 아시아에서 펼친 정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공 사례를 이뤘다. 한국의 성공은 1980년대까지 제3세계에서 만연했던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6ㆍ25전쟁은 다음과 같이 강건하게 기억되고 기념돼야 한다.
    6ㆍ25는 더 이상 동족상잔의 슬픈 내전이 아니다. 6ㆍ25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 도발에 맞서 그들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지켜낸 정당한 이념의 전쟁이었다.

    나아가 6ㆍ25는 소련과 중국 등 국제 공산주의 세력이 동서냉전의 초기단계에서 미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로 치밀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다.

    6ㆍ25는 대한민국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 세계혁명을 휴전선에서 봉쇄함으로써 장차 동서냉전에서 자유진영의 승리를 이끌어낸 전쟁이기도 했다. (국방일보. 200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