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현대사의 올바른 이해<2>대한민국 성립의 진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yhrhee@snu.ac.kr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은 광복절이다. 그런데 광복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다. 강의실에서 광복에 대해 설명해 보라 하면 학생들의 대답이 몇 가지로 엇갈린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2010년 8월 15일 정부는 제65회 광복절을 경축했다. 해마다 그랬듯이 우방들도 축하의 전문을 보내왔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제62회 독립기념일(Korean Independence Day)을 축하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자기의 독립기념일이 있는 줄 알지도 못하는데, 미국은 광복절이 원래 그날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 ▲ 1948.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이날이 건국기념일이다.ⓒ
    ▲ 1948.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이날이 건국기념일이다.ⓒ


    잘못 된 역사 교과서의 잘못된 교육

     국민이든 정부든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이 자신의 역사 이해에서 큰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은 언제부턴가 이 나라가 원래 생겨서는 안 될 나라라는 인식이 역사교육의 밑바닥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지난 편에서 지적했듯이 대한민국으로 인해 민족분단이 이뤄졌고, 친일 반민족세력이 미국을 업고 나라 같지 않은 나라를 세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어느 역사 교과서를 보더라도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하는 한 페이지가 있다. 한 사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던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민족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하자고 주장했다. 교사든 학생이든 후자가 옳았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밖에 없는 역사교실의 분위기다.

     이 같은 생각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이다.

    첫째, 분단을 향해 먼저 달린 것은 북쪽이었다.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모스크바의 공문서관이 개방됨에 따라 그간 몰랐던 우리 현대사의 많은 비밀이 밝혀졌다.

    19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에게 북한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국가를 세우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북한 전역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1946년 2월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행해졌다.

    그토록 중대한 개혁을 남한의 미군정이나 정치세력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독자로 추진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공산주의로 가겠다는 의지의 명확한 표시였다. 그에 따라 재산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민족 분단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

     둘째, 아무리 같은 혈통의 민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함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이념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하는 원리다.
    국가란 그 이념의 결정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그것의 물적 기초로서 재산권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반면, 공산주의는 개인보다 계급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이에 개인의 재산권을 부정한다.
    이 두 이념은 한 국가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수많은 나라의 경험에서 보듯이 두 이념이 비슷한 세를 이룰 경우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세월이 6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명확해졌다.
    후쿠야마는 이를 두고 ‘역사의 종언’이라 했다.

    지난 편에서 지적했듯이 개인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깊은 본성으로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다. 60년 전의 인간들에겐 그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그러했다. 세계의 정치가, 세계의 지성이 분열하고 대립했다. 바로 그 세계사적 분열과 대립이 해방 후 한반도를 찾아왔다. 민족분단은 누구도 어쩔 수 없었던 세계사의 모순이었다.

     셋째, 1946년 6월 후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같은 북한의 현실과 세계사의 모순을 직시해서였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미국은 멀고 소련은 가까웠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잘 단합된 정치세력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신탁통치 5년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 당시 동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점을 예민하게 파악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신탁통치를 결사코 반대했다. 화가 난 미군정은 반대운동의 중심인물인 이승만과 김구를 심하게 박해했다.

    “당신에게 미래는 없어.” 하지 미군정 장관은 이승만을 협박하고 연금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처리를 둘러싸고 구연합국 소련과의 협조 노선에 충실했다. 그 1년 6개월은 참으로 위험한 기간이었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의 노선을 추인하는 것은 1947년 2월 소련과의 냉전을 선포한 뒤부터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결코 미국의 등에 업혀 거저 생겨난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을 견인하면서 쟁취해 낸 국가였다.

    미국, 이승만 박해...김구, 북한협상 불가능

     자유민주주의로의 건국 대열은 1948년 2월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으로 이탈함에 따라 또 한 번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에 올라간 김구 등의 협상파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짜놓은 각본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해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고 일어선 사람은 회의장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세계사의 모순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민족의 비원인 통일은 북한보다 100배나 부강해진 대한민국에 의해, 그렇게 만든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한국사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19세기 말 개화기에 서구 세계로부터 수입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 한국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했다. 그 기간 자유민주주의는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분들에 의해 함양됐다.

    일제는 한국을 영구 병합하고 지배하기 위해 시장경제체제를 성립시켰다. 그 속에서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을 무릅쓰면서 근대문명의 실력을 양성했다.

    대한민국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국내에서 성장한 근대문명 세력이 합작해 세운 나라다. 결코 친일 반민족 세력이 미국을 업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나라가 아니다.
    (국방일보, 201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