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반공 냄새" 어이없는 주장...'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하자고?"'생선가게 고양이들'반발
  • "역사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 단어를 쓰면 안된다."
    교과서 개편을 담당한 역사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아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고법이 ‘금성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교육과학부의 수정 지시는 합법’이라는 판결을 한 날 뜬금없는 ‘민주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논쟁이 벌여졌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연구진과의 논의 없이 고시단계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것에 반발한 국사편찬위 산하 역사교육정책연구위원회 위원들이 기자회견까지 열며 반발한 것이다.

    지난 16일 국사편찬위원회 산하 역사교육과정 개발정책연구위 오수창 위원장(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초·중·고 역사교육과정안 중 한국사 부문에서 정책위가 제시한 ‘민주주의’ 개념이 교과부가 고시한 교육과정에서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변경됐다”며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민주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입장”이라고 밝혔다.   

    오수창 교수는 “한국사 관련 교육과정에 ‘민주주의의 발전’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표현이 담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이는 앞으로 만들어지는 역사교과서에서 학생들이 공부해야 할 한국 현대사의 핵심 개념이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오수창 교수는 “(교과부가 자유민주주의로 표기한 것은) 충분한 학문적·사회적 검증과 합의 없이 고시안을 바꾼 것”이라며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개발정책연구위 24명의 위원 중 성명에 동참한 21명도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개념이다. 가능하면 그에 대한 제한이나 수식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법제처 공식 홈페이지의 영어번역에 ‘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라고 돼 있다. 이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뜻하는 것이지 ‘좁은 의미’인 자유민주주의에 해당하는 ‘liberal democratic’이 아니라는 견해가 학계에 제시돼 있다”고 주장했다.

    오수창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로의 표기변경에 대해) 정책위원들뿐 아니라 역사교육계 전체적으로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교과부의 대응을 보며 다음 단계의 행동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개발정책연구위가 기자회견을 가진 뒤 <경향신문> 등은 ‘자유민주주의 표기 반대’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것은 민주주의이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1항)’로 시작되는 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제4조)’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1972년 유신 때였다. ‘자유민주적’이란 표현은 냉전시대 반공의 색채가 다분하다”고 주장하며 ‘자유민주주의’로 표기하는 것을 마치 ‘반공주의’로 표시하는 것처럼 거부감을 드러냈다. <경향신문>은 사설 외에도 여러 편의 기사를 통해 ‘민주주의’라는 용어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다. <한겨레신문> 또한 오수창 교수의 의견을 상세히 전달하고 있다.

    대부분의 좌파 역사학자들은 “현재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는 시장 자유나 정부 개입 반대를 뜻하는 정치적 이념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합의된 개념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맞서 <문화일보> 등 우파 진영 매체들과 한국현대사학회 소속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로 표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맞서고 있다. <문화일보>는 17일자 사설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와 함께 대한민국 정체성의 양대 축이라는 사실은 결코 움직일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배이념”이라며 “교과부는 너무나도 당연한 ‘대한민국=자유민주주의’ 표기의 관철은 물론 서울고등법원의 16일 교과서에 대한 판결 그대로 좌편향 교과서의 전면 수정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껏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교과서가 인민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도구가 되어왔다. 따라서 교과서 속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바뀐 것은 진일보한 일”이라고 반겼다.  시간을 갖고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 밑에 인민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좌파적 논의들을 집어넣을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한편 교과부는 다수의 언론들과 통화에서 “국사편찬위에서 조율한 의견을 받은 것일뿐 교과부가 일방적으로 고친 사실이 없다”고 말했고, 국사편찬위는 “정식으로 개발정책연구위와 조율을 한 게 아니라 담당직원이 이메일로 이런저런 논의를 한 거 같은데 현재 직원이 휴가 중이라 모르겠다”는 답만 내놓고 있다.

    이번 ‘민주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논쟁이 8월 말까지 판가름 나지 않을 경우 ‘2011 역사 교육과정 개정’에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8월 말까지 최종 개정안을 고시하고 연말까지 집필 기준안을 발표한 다음 2012년 3월까지 교과서를 집필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