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랑했다5일 김을동 의원 등 300여 명 참석…양화진 선교 100주년 기념관서
  • 아버지는 대학 총장, 어머니는 아이비리그 대학 창립자의 증손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그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Hommer. B Hulbert. 1863.1.26 ~ 1949.8.5)는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였다. 美버몬트州에서 당시 미들베리大 총장인 아버지와 다트머스大 설립자의 증손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헐버트 박사는 1884년 다트머스大를 졸업한 후 뉴욕의 유니온신학대에서 2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집안은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을 갖고 있었다. 가훈대로 실천했던 헐버트 박사는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이튼 美교육장관에게서 ‘한국으로 갈 영어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게 된다.

  • 1886년 한국에 첫 발을 디딘 헐버트 박사는 왕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에서 5년 동안 한국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를 눈여겨 본 고종 황제는 교육 분야 총책임자 및 외교자문관으로 임명했다. 헐버트 박사는 1891년 한국 사람들을 위해 세계 각국의 문화와 지리 등을 알려주기 위한 ‘서민필지’라는 책을 한글로 편찬하기도 했고, 1893년 다시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와 1895년부터 10년 동안 한성사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초학지지’를 편찬했다.   

    한편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고종 황제는 1905년 을사늑약 후 평소 친분이 있던 헐버트 박사에게 밀서를 건넨다. 美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면담해 일제가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한국의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헐버트 박사는 이후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욕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일행이 참석하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헐버트 박사의 활동을 본 일제는 1909년 그를 미국으로 쫓아냈다. 40년 동안 헐버트 박사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헐버트 박사는 방한 1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영면한다. 헐버트 박사의 가족들은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평소 그의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기로 했다. 정부는 헐버트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헐버트 박사 서거 62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마포구 합정동 소재 양화진 외국인묘지 내 선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식은 최완근 서울보훈청장, 김을동 국회의원, 광복회 안홍순 부회장, 박홍섭 마포구청장, 기념사업회원, 시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력 및 내빈소개, 기념사업회장의 식사, 서울지방보훈청장․광복회장(부회장 대독)․김을동 국회의원의 추모사, 서울경찰악대의 연주(아리랑), 마포구청장의 인사말, 충암 고등학교 학생대표의 박사님께 드리는 글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