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 문명은 인류 最古의 문명이며 아시아의 始源文化
  • <중국의 역사 공정>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인류 문명의 시원에 관한 역사 발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 박상은 전 보험감독원장 ⓒ뉴데일리
    ▲ 박상은 전 보험감독원장 ⓒ뉴데일리

    기록문화 보다도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기존의 통설이 바람처럼 바꿔 버리니 알려진 만큼의 순간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우리가 고구려사 등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려 한다 해서 동북공정의 진행에 흥분하고 있는 사이 중국은 그 보다 훨씬 차원 높은 고대역사의 새로운 창조 작업을 진행 시켜왔다.

    1980년대 중반에 요녕성의 요서지방 적봉(赤峰) 지역에서 발견된 오래된 문명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꽤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중국이 오래 동안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치부 해 왔던 황하문명 보다 최소한 2,000년은 앞선 요하지역 문명의 유물 발견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족이 주장하던 만리장성 밖의 오랑캐 지역에서 발견된 문명이 황하의 역사를 뛰어 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중국에서는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계획에 따른 5개년 계획과 대중화의 역사 재건의 국가 전략 이행 중, 새문명의 출현으로 고민에 빠지게 되자 등장한 것이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團代工程)이다.

    9.5계획(9차 5개년계획 1996-2000)의 일환으로 시작된 고대 왕조의 성립 연대의 확정으로 역사  끌어올리기 공정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 역사 기행에 자극 받은 청화대(淸華大) 송건(宋建) 교수의 건의에 따라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이 모여 하·상·주 존속 연대를 상향 확정 한다.

    기록 문헌상 중국의 역사 시대는 주나라 원년인 기원전 841년이 상한이었으나 이 공정의 결과 주나라에 앞선 夏나라의 생성 연대를 기원전 2070년으로 획정함으로서 무려 1229년을 끌어 올려놓은 것을 위시하여 하상주연표(夏商周年表)를 공식화 했다. (동북공정 너머 요하 문명론/ 우일하저P.36)  

    하상주단 대공정을 성공적으로 마친후 다시 10.5계획(2001-2006)에 맞추어 본격적으로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을 시작 하면서 중국의 신화적인 전설들은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게 된다.

    3황5제(三黃五帝)의 신화시대가 중국 역사로 들어와 중국 역사를 끌어 올려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 보다 앞선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 정리 해 버렸다. 따라서 유교적 도통(導通)에 따라 황제-요(堯)-순(舜)-우-무왕-주공-공자로 이어진 것으로 된다.

    이 과정에서 3황의 하나인 염제(炎帝)와 황제의 자료를 집대성하여 ‘염황자료집’을 완간 한다. 탐원공정으로 고대 중국 문명을 정리하는 거대한 기획 작업의 일부로 동북 지역 역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이 2002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제껏 중국은 黃帝를 그들의 전통적인 시조로 받드러 왔으나 언젠가 염제도 신화적 조상으로 편입하여 스스로 염황지손(炎黃之孫)으로 하더니, 이제는 치우(蚩尤)까지도 그들의 조상으로 편입해 버린 것이다.

    북경에서 서북쪽 120Km 하북성 탁록현에 생긴(1992-1997) 귀근원의 중화3조당(中華三祖堂)에는 바로 중화민족 3명의 조상으로 황제, 염제 그리고 치우가 드높이 모셔져 있다.

    중화3조당이 있는 탁록은 황제와 염제에 대항해서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 치우황제와의 탁록대전(啄鹿大戰)을 했다는 그 자리다. 그들의 스스로의 조상이라던 황제와 싸웠던 동이족의 수장이라 주장 되어 왔던 치우를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넣어 버린 것이다.

    치우는 2002년 서울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들의 상징인 치우천황이 그 이다.                                

    <요하문명과 고조선>

    중국은 역사공정에 앞서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5천년 전의 제단, 여신상 적석총 등 놀라운 유적들을 집체조사 등 면밀하게 이행한 결론은 인류 최고의 문명으로 제5의 문명의 존재를 확인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 문명은 요하문명으로 명명하고 황제를 시조로 하는 한족의 문명으로 연계하므로서 황하유역에서 발원하여 은. 주나라로 이어지는 종전 사학계의 통설을 완전히 뒤집었다.

    요하문명 발견과 상고사의 연계 정리와 더불어 중화민족 개념의 공정으로 티벳과 위그르를 중국화 하기 위한 서남공정과 서북공정(위그르 신장대상)으로 한족 이주 계획을 완료하고,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조선족에게는 삼관교육(三觀敎育)을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삼관교육은 조국관 민족관과 역사관으로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조선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하는 내용을 주입하는 교육이다.

    동북공정은 서남공정(티벳),서북공정(위그르)의 연장 선상에서 보아야 하고 그 위의 탐원공정 등 역사공정을 올려놓고 대중화의 역사 재창조에 열중하고 있다. 역사공정이 완성이 되면 중국내에 있는 모든 부족은 중국이 조국이 되고 모든 역사는 중국 것이 되어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 주몽 광개토대왕까지 중국의 지방 부족의 수장으로 전락하는 해괴한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서(遙西)지역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식 적석총·빗살 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은 이른바 중원의 황하문명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한반도 쪽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라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이 유적들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유물로서 요하문명이 주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전래된 동북아 문명의 시원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라시안 네트위크. 스마트 코리아로 가는 길. 이민화)

    고조선이 이 지역에서 발원 했다는 내용의 산해경(山海經)과 시경(詩經)의 분명한 기록으로도 그들이 동이족의 나라 고조선과 고구려의 발원 지역인 것이 맞는 것일진대 문명의 주인공이 뒤 바뀐 채 중국의 역사공정이 진행 되고 있다.

    고대로 올라 갈수록 ‘역사는 흐름과 교류의 결정체’ 라는 말을 따라 중국 측 주장은 감안하고 여러 상항을 종합하더라도 고조선의 활동지역은 한반도 일부와 만주지역에 존재한 것이 되고 활동 연대도 거의 기원전 3천년 가까이 올라간다고 보아 단군의 역사와 비슷하게 된다.    

    역사에 기록이 없는 전설상의 시대를 자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공정을 통해 중화민족의 역사로 재창조 하는 과정을 보면 우리의 상고사는 더 멋지고 논리적이라 할 수 있다.

    요하문명의 중심지인 우하량(牛河梁) 지역의 홍산문화만기(紅山文化晩期·BC3500-3000)에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로 진입하면서 이미 초급 문명사회에 진입한다고 한다.

    본격적인 동석병용(銅石甁用) 시대인 소하연(小河沿) 문화(BC3000-2000)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단군조선의 개국시대와 맞닿는다는 것은 단군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실존 단군시대를 둿받침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하문명은 인류의 최고 문명이며 아시아 공통의 공동의 역사다>

    전세기 말엽 발견된 요하문명의 출현이 공교롭게 세계문명의 동진 과정에서 나타나면서 중국의 현대화와 막강한 경제 파워와 함께 다민족 국가를 한족 중심의 세력화로 집약해 가는 과정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중국의 동북지역 만주 요하 일대의 문명은 비교적 늦게 발견되어 황하문명 보다 앞선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중국 안에서 발견됨으로써 모두 중국 제일봉. 중국제일촌 등의 중국 명칭을 붙여 자국화 하고 고대 황제의 자손으로 연결하여 자국역사로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소수민족과 티벳.위구르.몽골제국.고조선.고구려 강역 등을 완벽하게 중국의 역사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발굴 되는 문화적 요소들이 황하권 중원 문화와는 다른 북방계 문화로 고조선의 특유의 문명으로 요하지역에 널려 있는 유적들 그 가운데 치(城의 튀어 나온 부분)가 있는 석성, 적석총, 고인돌 등은 고구려로 이어진 전형적인 형태로 만주 남부와 한반도 쪽으로 이어져 있다.

    중국 내에서 비교적 말성이 작은 티벳의 장족(莊族)을 제외하면 위구르 만해도 인잡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이슬람 문화의 혈족국이 존재하고 우즈베키스탄 등 탄국과 터키까지 투르크족(돌궐족)에 둘러싸고 있다.

    베트남 북부, 몽골, 북한과 한국 멀리 입본까지 직간접의 혈연국가고 그리고 역사를 공유하는 나라들이 조용히 있을 리가 없다.

    이와 같이 요하문명 관련국들은 중원의 한국과 분명이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순이 다르고 푸른 반점이 있는 민족이 많다.

    요하의 적봉지구는 가로 질러 퍼져 있는 몽고리안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내 사정으로 넘기기에는 역사 독점 사태는 인접국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도 서구 문명의 기원으로 에게문명이 뒤늦게 등장함으로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문명이 독일의 고고학자(H.술라만)과 영국의 A.J 에번스에 의하여 마케네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의 발굴 등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주변국들이 서로 ‘에게 문명은 자기 나라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주도권 다툼이 있었으나 이제 에게해 일대에 산재한 에게문명은 유럽의 공동 문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중국에 대해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듯하다. 과거에 문을 닫고 역사도 익히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의 중국처럼 고대 역사에 관심을 둔다면 요하지역으로 뛰어 들어 단군 기원에 접속을 해야 하지 않는가.

    ‘흐름과 교류’의 역사관을 놓고 한 때 젊은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영국 사학자 E.H.카(1892-1982)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 한다. 대화는 “현재에 속하는 역사와 과거의 사실(Fact)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라 했다. 과거의 뿌리 없는 미래를 상정할 수 없듯이 대화 지속성은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요하에서 역사의 지분을 찾아야 한다. 한민족 겨레가 황제(黃帝)의 자손이 될 수가 없고 전설의 황제보다는 단군의 사화가 선명하고 창조적이다. 고고학적 자료가 은폐 되지 않고 쌓여 간다면 황제와 그 후예들의 것이 아닌 그들이 지적한 동이족의 몫이 늘어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역사의 공유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재야 사학자들이 늘어놓은 많은 사료나 고증 자료에 의한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요하문명에 의하여 그 사실이 뒷받침 되고 있지 않은가.

    훼손 되었던 사료보다 더 믿음직한 유물·유적이 쌓여가고 있다. 조선조의 의제 반환이 준비 되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가 말살 했다는 사료 중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져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깊이 협의 해 볼만 하다.

    이민화 박사의 의견대로 몽고리안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요하문명은 몽고리안의 시원일 수도 있고 중원과 연계된 인류 문명의 시원이 될 수 있다. 역사가 존재 하는 곳(땅)을 기초로 보지 말고 역사의 흐름과 교류로 보는 대승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 지역과 인접하고 역사를 같이 하는 한·중·일·몽고의 공동의 관심 사료들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역사 시대를 열어 가는 관용과 슬기가 필요하다.

    문화가 결핍된 초강국 이웃을 원하지 않는다. 서방세계가 우려하는 보편주의 가치를 넘어 중국 고유의 문명 방식으로 서구의 짧은 역사 사고방식에서 5천년 역사의 연장된 시간 척도에 동승하는 역사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中國이 홍콩을 안으면서 그 자본주의 체재를 그대로 두고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했듯이 동북아 문화 공동체의 선행 요건도 바로 일사병용(一史竝用·二國一史)로 정리하면서 역사의 소통으로 먼저 동북아를 묶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 되면 자연스럽게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은 새로운 세계의 시대정신이 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