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북한의 씨받이공작을 아시는가요? 
      외형은 외국인, 출신은 북한인인 사람 만들기 전략
    장진성  /시인,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현재 일본과 북한 사이에 국교정상화가 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납치문제 때문입니다.
    특히 납치된 그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 국민들이 가장 아파하는 상징적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1977년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될 때 당시 13살이었던 요코다 메구미입니다. 다음해인 1978년에도 북한 공작원들은 남한의 전북 군산 근처에서 16살 고교생 이었던 한국인 김영남을 납치 했습니다.
     
    그럼 왜 그 시기에 북한은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성인도 아닌 아이들을 상대로 납치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때 당시 대남공작부서들을 총 지휘했던 김정일의 현지화 공작지침에 의해서였습니다. 196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내외정책은 사실상 인민무력부가 주도해 왔습니다. 6.25 전쟁 이후 반한정서를 이용한 내부결속과 권력정돈을 위해 김일성이 군을 인위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하여 북한군은 프에블로호 나포사건, 청와대 기습사건, 판문점 도끼사건 등 온갖 테러와 범죄를 저지르며 대내외정세를 주도하게 됩니다. 1967년 당 선전 부 지도원으로 첫 후계업무를 시작한 김정일에겐 이러한 인민무력부가 경계대상이었습니다. 군이 정책주도를 하는 과정에 권력주도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대혁명가극, 혁명영화, 백두산혁명유적지 건설, 등 당선전선동부를 수령 신격화 선전부로 만든 공로로 김정일은 마침내 아버지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당조직부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후 김정일은 김일성유일지도체제 확립 명목으로 당조직부를 내세운 권력정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첫 실행으로 가장 먼저 인민무력부의 대남사업권한을 군 첩보 수집기관 정도로 축소시킵니다. 그때 인민무력부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제도를 허용하고, 나중에 연방제형식으로 통일한다는 김일성의 고려연방제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연방제통일이 실현되자면 무력의 방법이 아니라 남한에서 군사정부가 물러나도록 민주화세력을 지원하는 지능적인 적화공작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하여 당 안에 적화통일정책, 대남심리전, 지하당구축, 민주인사포섭, 등을 전담하는 통전 부, 작전 부, 35호실, 지금의 대외연락 부 전신인 대외조사부, 이렇게 4개부서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듯 김정일이 북한의 대남권한을 독점하게 되면서부터 일본의 메구미 가족의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부서들의 조직 구호는 “현지화”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통전부도 역시 “현지화”를 생명처럼 간주했습니다. 제가 처음 통전 부 문턱을 넘어설 때 방 한 끝에 “서울 속의 평양이 되라!”는 김정일의 지침서를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현지화를 위해 인민무력 부 정찰국은 38선에서 넘어온 월북자들을 간첩으로 재교육한 반면 당 대남공작부서들은 주로 외국인납치를 통해 부족한 “현지화”를 메우려 했습니다.
     
    더욱이 당 35호실 같은 경우 김정일이 이스라엘의 “모싸드” 같은 강력한 정보기관처럼 만들겠다고 공언한 후 그 방법이 더 대담하고 다양해졌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시작된 외국인납치공작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북한 간첩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현지화 교관용,
    둘째는 북한출신 간첩들을 외국인신분으로 파견하기 위한 신분세탁용,
    셋째는 적응능력과 충성도에 따라 현지인 간첩으로 양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요꼬다 메구미의 납치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됩니다. 완벽한 외국인이면서도 북한적인 충성심을 주입시키자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자면 성인보다는 아이들이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 대남공작부서들은 현지 간첩들이 북한으로 복귀할 때 아이들을 납치하도록 했고, 그렇게 일본의 메구미, 남한의 김영남과 같은 많은 외국인 아이들이 북한으로 끌려오게 됐던 것입니다.

    외국인 납치인들 중에서도 특히 일본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 대남공작부서 지부와 같은 조총련이 있고, 남한과의 자유왕래가 가까운 정치적, 지리적 유리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의 독재가 아무리 집요해도 동심까지 왜곡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애들에게 체제이념의 세뇌란 불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김정일이 선택한 대안이 이른바 씨받이 전략입니다.
    외형은 외국인이지만 출신은 북한인인 그런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북한 대남 공작부서들은 외국 여성들을 납치하는 것과 함께 미모의 북한여성들을 해외로 내보내 백인, 흑인, 동남아인 등 외국인들을 상대로 임신공작을 벌이게 됩니다.

    얼굴 피부색이 전혀 다른 이 아이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북한 아이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며 성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우한 운명들입니다. 인간병기로 훈련시키는 이 아이들은 당 대남공작부서 요원들만 치료받는 당 작전 부 소속 915연락소가 건강검진을 담당하고, 생활편의는 당 조직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1965년에 탈영, 월북했다가 40여년 만에 풀려나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간 주한 미군병사 젠킨스도 자기의 회고록에서 이와 유사한 증언을 했습니다. 북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자기를 닮은 자녀들이 대남공작부서로 끌려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들은 방북 외국인들을 상대로 현지처공작도 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 동대원구역 문수봉 근처 냉천사이다공장 뒤로 올라가다 보면 다른 일반주택들과 다른 개인저택들이 있을 것입니다. 
    은밀한 시선들이 밤낮으로 지키는 거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만 사는데 그들의 남편들은 모두 과거에 방북했거나, 혹은 지금도 방북하고 있는 외국의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기자, 종교인, 학자들입니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그 현지처와 아이들을 인질로 외국인들에게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대외지원이나, 협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렇듯 국제범죄를 마구 저지를 수 있었던 배경은 합리적 정책구조가 아닌 김정일 개인지배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일성으로부터 세습자격을 인정받으려던 김정일의 무모한 과대발상과 독재의식이 국경을 넘어 외국에서까지 함부로 범죄를 감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김씨일가 실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