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6.25  (22)

    1950년 10월 29일 오전 7시 반, 나는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C-47 수송기에는 신성모와 정일권, 김광섭 비서에다 김장흥 총경, 이선조 대령 등이 동승했고 프란체스카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수송기의 창밖으로 공군의 김정렬 장군이 이끄는 공군기들이 경호비행을 하면서 따르고 있다. 비행기는 금방 38선을 넘었고 내가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매미, 잘 봐둬, 이곳이 북쪽 땅이야.」
    「네, 머릿속에 넣고 있어요. 파파.」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프란체스카가 대답했다. 그러나 산천은 다 비슷비슷하다. 남쪽 땅은 파랗고 북쪽은 붉은 것이 아니다. 매미가 열심히 보기는 했지만 곧 어디가 어딘지 잊어먹을 것이었다.

    나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본 채 감회에 젖어 있었다. 국군은 두만강까지 닿았지만 국군이 평양을 수복한 같은 날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고 10월 25일에는 중국군이 한국 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아직 규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군의 참전은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평양 비행장에는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국군 1사단의 부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단장 백선엽은 영변에서 달려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곧장 평양 시청으로 갔는데 이미 시청 앞 광장은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단에 선 나는 환호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목이 메었다.

    이곳은 평양,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긴 이름의 공산당 체제가 군림하고 있었다는 감회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 순간 공산당은 물론 김일성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직 환호하는 10만여 명의 군중들을 보면서 50여 년 전의 만민공동회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청년 연사로 개혁의 사명감을 품고 군중들에게 외쳤었다. 그런데 50여년이 지난 지금,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루면서 이렇게 평양 시청 앞 광장에 서 있구나.

    한민족의 시련은 언제 끝날 것이냐? 내 소원인 통일 대한민국의 수립은 내 생전에 이뤄질 것인가?
    「친애하는 평양 시민 여러분, 그리고 이곳에 모인 사랑하는 군민 여러분.」
    나는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내 나이 76세, 그 동안 수많은 교회 연설, 대중 연설을 해왔지만 평양시민 앞에서처럼 감개와 사무친 경우는 없었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의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억압 받지 않고 남녀평등하며, 열심히 일한 자는 그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언론의 자유를 행사하며, 통치자는 국민의 명령에 따르는 세상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세상이며 대한민국인 것입네다.」
    내 목소리는 쉬었지만 굵게 퍼져 나갔다. 주먹을 쥐며 올린 내 눈에 어느덧 눈물이 고여졌다. 내가 다시 소리쳤다.

    「이제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일흔여섯, 평양이 대한민국에 수복되었으니 이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승만은 곧 죽어 흙이 되겠지만 여러분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번영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 민주주의를 겪어 보십시오. 공산당이 말하는 평등한 세상은 공산당 간부 외에는 모두 노예라는 뜻이나 같습니다. 우리에 가둔 짐승처럼 똑같은 먹이를 주고 부리는 사회가 바로 공산당 사회인 것입니다.」

    그 때 내 머릿속에 수만 명이 학살당한 기록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를 악문 내가 다시 소리쳤다.
    「동포 여러분, 모두 용서하고 함께 뭉쳐 나갑시다. 한민족이 함께 뭉치면 위대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용서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