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침투해 핵시설 확인 공로…중국서 ‘미인계’로 납북남북 물밑 접촉으로 풀려나… 큰 공 세운 덕에 문책 안 해
  • 1999년 중국에서 피랍된 영관급 장교는 합참 소속 대령들이 아니라 북한 영변 등에 침투해 핵시설의 존재를 확인했던 정보사령부 소속 중령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관계자는 “정보사령부 정모 중령이 1998년 북한 핵 시설이 모여 있는 영변에 침투해 흙과 물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1999년 중국에서 북한 미인계에 걸려 납북(拉北)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일은 한국과 미국, 유럽, 일본 등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던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다. 1차 핵 위기가 있었던 1990년대 초중반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한 차례만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80g 추출했다고 IAEA에 신고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1998년 경 대북정보망을 통해 북한이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부는 특수부대를 동원해 비밀리에 증거를 가져오기로 했다.

    이때 선택된 부대가 정보사령부. 정보사령부는 정 중령 등 영관급 장교와 부사관으로 구성된 ‘침투팀’을 보내 영변 핵 시설 주변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과 물을 가져왔다.

    정부는 영변에서 가져온 흙을 IAEA에 건넸다. IAEA가 이를 분석한 결과 세 차례에 걸친 재처리로 킬로그램(㎏) 단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사실을 밝혀냈다. 북한은 미국 등 서방 국가의 기술력으로는 소량의 흙만으로도 분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정 중령 등은 이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정 중령이 이끌던 ‘침투팀’은 이후 평북 구성시 용덕동의 고성능 폭약 실험장 흙을 가져온 적도 있다.

    하지만 정 중령은 이후 중국 현지에서 대북 첩보 활동 중 ‘미인계’에 넘어가 피랍됐다. 정 중령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대 초 남북 간 물밑 접촉 덕분에 풀려났다고 한다.

    이 같은 놀라운 활약은 정보사 요원들만 한 게 아니다. 국정원 요원들도 북한 핵심세력을 탈북시키거나 평양의 고급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1997년 2월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같은 해 8월에는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인 장승길 씨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8년 2월 국제식량기구(FAO) 북한 대표부 김동수 씨, 1999년 1월 독일 주재 이익대표부 김경필 서기관의 망명도 모두 국정원의 작품이다. 

    국정원, 정보사 등의 대북작전에 위협을 느낀 김정일은 1999년 4월 연평해전을 일으키는 한편, 김대중 정부와 중국 정부에도 강력하게 항의했다. 보위부의 반탐(대간첩 작전) 요원들을 중국으로 보내 한국 요원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WTO 가입을 앞두고 있던 중국은 ‘이대로 뒀다간 큰 일 나겠다’고 생각해 대북정보망의 핵심 거점이던 선양 K 항공 지점(당시 부지점장이 국정원 요원) 등 한국 정보기관의 ‘안가’와 위장회사를 급습해 한국 요원 30여 명과 이들에 맞서던 북한 보위부 반탐요원들을 함께 체포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한국 요원들에게 “그동안의 활동 내역을 털어놓으면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한국 정보당국은 요원들에게 자백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요원들은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이때 대북 정보망이 모두 드러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어떻게 우리 활동을 낱낱이 알고 있었을까’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부 요원들은 그 배후가 누군지 추측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 ‘배후’를 말하지는 못했다. 그해 초부터 ‘국정원 대학살’로 불리는 숙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간부 125명 등 581명의 대북․대공요원들을 숙청했다. 당시 해직된 사람들은 “해직자들 자리에는 특채로 뽑은 ‘특정지역 인맥’들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국정원 양심선언’으로 유명한 김기삼 씨도 “북풍 이후 새 정권이 들어서자 대북정보망이 망가지고 요원들이 권력에 줄 대기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증언은 1999년 ‘대학살 사건’ 전후 상부에서 주목하던 젊고 유능한 정보요원들이 갑자기 대거 퇴직한 때 나왔던 말과도 일치한다. 이때 만난 요원들은 김만복 前국정원장 등을 거론하며, 대북정보라인이 점점 이상해진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노벨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블루 카펫 프로젝트’로 알려진 이 ‘로비 공작’에는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핵심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미국 뉴욕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기삼 씨는 2005년 전화통화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다(이때 그가 지목한 몇몇 인사는 결국 비리혐의로 구속됐다). ‘블루카펫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이러한 주장은 2010년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는 책으로 나왔다.

    이처럼 정 중령이 피랍되던 시기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대북정보능력과 공작능력은 추락했다. 이후 들어선 정권과 정치권은 대북정보수집․비밀공작 역량을 계속 축소시켰다. 현 정부 들어 대북정보망 복구를 꾀하고 있지만 지금도 90년대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한편 국방부는 정 중령의 피랍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보도된 내용과 실제 있었던 일은 약간 차이가 있다”는 ‘묘한 말’을 남겼다.

    지난 19일 '작계 5027' 등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긴 혐의로 기소된 박채서(57·일명 흑금성)씨의 재판에서 "1999년 우리 영관급 장교 4명이 북한에 납치됐다"는 북한전문기 출신 언론인의 법정 증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국방부는 "영관급 4명이 납북된 적은 없다"고 확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