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 (19)

    1950년 2월, 농지 보상과 상환을 각각 년 생산량 150%로 환상하여 5년 분할로 결정한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추진했던 농지개혁 법안은 마침내 1950년 3월 10일 법안으로 공포 되었다.

    대한민국의 토지개혁도 북한의 무상 몰수, 무상 분배와 반대로 유상 구입 유상 분배 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굳혔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요약하면 첫째, 경제적 효과로서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를 태동 시켰으며, 둘째 평등 사회를 구현했다. 이제 농민이 경제 주체가 될 것이다. 셋째 공산주의자와 달리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주인의식과 함께 자립심을 배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면 첫째 지주 중심으로 구성된 민국당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었으며 둘째 남한 농민에게도 농지가 제공됨으로써 남로당의 정치 공세를 차단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셋째는 정부에 대한 농민의 지지기반이 확고해진 것이다.

    그리고 3월 14일, 민국당의 주도하에 국회에 상정했던 내각제 개헌안이 표결에 붙여졌다. 전체 의원 179명중 내각제 개헌에 찬성한 의원은 79명, 그리고 반대가 33. 기권 66, 무표 1표로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대한민국당 등 나머지가 모두 반대, 기권으로 돌아섬으로써 과반수 획득을 못한 것이다. 이미 민국당이 무소속 의원 9명을 합류 시켰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씁쓸했다. 한민당은 민국당으로 세를 불려 끝까지 내각제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연합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극동의 미군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존ㆍ무초가 말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1950년 3월 중순, 나는 미국대사 무초를 경무대로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무초 옆에는 유엔 대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조병옥이 앉아있다.

    무초가 말을 이었다.
    「각하, 김일성이 아무리 무모하다고 해도 남침이란 도박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 스탈린이 허가하지 않을 겁니다.」
    예상 했던 대로 올해 1월 12일 미국무장관 에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은 항구적인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방어선에서 제외된 국가들을 위무하고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에 대한 시위일 것이었다.

    그 때 조병옥이 말했다.
    「2월 14일 중ㆍ소 우호조약이 체결 되고나서 이번 달 말에 김일성이 다시 스탈린을 만나러 간다는 소문이 다 퍼져있습니다. 이것은 뭔가 한 계단씩 준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나 하고 조병옥이 상의한 내용이다. 그러자 무초가 가늘게 숨을 뱉는다. 무초는 남북한 실정을 가장 잘 아는 미국인 중 하나일 것이었다.

    「물론 대비는 하고 있어야겠지요.」
    내가 당시에 보고 받기로는 중국의 모택동도 전쟁이 일어나면 돕겠다고 김일성의 대리인으로 방중했던 김일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는 포로로 잡힌 빨치산으로부터 나온다. 또 스탈린은 아직 남침은 허락 안했지만 남한의 빨치산을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초에게 말했다.
    「대사, 김일성이 하루라도 빨리 남침하려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기반이 굳어지기 전에 점령하겠다는 의지요.」

    무초는 정색했고 내가 말을 이었다.
    「김일성 옆에 있는 부수상이며 남노당 당수 박헌영이 남한을 잘 압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을 말이오.」

    이제 겨우 내각제 개헌안을 부결 시켰으니 김일성은 더 초조해졌을지도 모른다.
    이쪽이 안정되면 저쪽은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