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 (18)

    프란체스카와 가장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朴瑪利亞)가 될 것이다.
    박마리아는 1906년생 이었으니 당시에 나이는 45세, 프란체스카는 51세로 6살 연상이다. 박마리아는 교회 전도사로 일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공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래서 고학 하다시피 호수돈여자고보,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갔다.

    일제시대에 더구나 여자가 고학을 하다싶이 하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 가지고는 힘들다. 박마리아는 마운트호러대학, 스카렛대학을 졸업하고 피바디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귀국해서 이화여자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그러다 1935년 29살 때 10살 연상인 이기붕과 결혼한 것이다.

    「파파, 마리아가 가져온 과자 좀 드세요.」
    경무대 2층 응접실로 들어선 프란체스카가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릇에는 먹음직스런 과자가 놓여 있다.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나는 주미대사 장면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타자기에서 손을 뗀 내가 프란체스카에게 물었다.
    「매미, 어제 마리아가 뭐라고 그랬지?」
    「뭐 말 인가요 파파?」
    소파에 앉은 프란체스카가 나를 보았다.
    「서대문에서 술취한 순경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했지 않아?」
    「그랬지요, 참.」

    프란체스카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작당해서 몰려다니는 바람에 시민들이 불안해서 도망갔답니다.」
    「마리아가 직접 보았대?」
    「그건 모르겠어요, 파파.」

    나는 타자기에 걸린 편지를 빼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프란체스카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과자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내가 서대문 서장한테 알아보니까 그들은 순경이 아니었어, 훈련을 마친 국군 포병 하사관이 휴가를 가던 길에 술 마시고 저희들끼리 싸웠다는군.」

    과자는 미제로 맛이 있었다. 전에는 박마리아가 뭘 가져오면 어디에서 샀느냐 값이 얼마냐 하고 꼬치꼬치 물었지만 나는 요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익숙해져서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웃음 띤 얼굴로 프란체스카를 보았다.

    「매미, 하마터면 서대문 서장이 문책을 당할 뻔 했어. 잘못 본 사람의 말 때문에 말야.」
    「미안해요, 파파.」

    금방 말뜻을 알아차린 프란체스카가 사과했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동양 속담에 여자가 나서면 안 될 일이 있다고 했어, 그것은 남자가 하는 바깥일에 관한거야 매미.」

    나는 남녀평등주의자이며 개화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때는 프란체스카에게 못을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어른들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매미, 마리아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간에 내가 막을 수는 없어, 온갖 이야기를 다해주는 것이 매미가 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프란체스카는 머리만 끄덕였다.

    「하지만 매미,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 안돼, 난 한국 대통령이야. 그런 말을 듣고 선입견이 생길수도 있는 거야.」
    「알았어요, 파파.」
    착한 프란체스카가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내 몇 명 안 되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 너무 내 건강을 챙긴다면서 민원인도 못 만나게 하는 것, 한약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것 따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