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 (17)

    나를 지지하는 대한민국당이 71석이지만 나는 여전히 무당파(無堂派), 초당적(超黨的)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못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직 신생 대한민국의 상황은 급박했으며 내 행동이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이상만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까지 내가 의도적으로 국회를 장악하려고 들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1950년 1월 27일, 민국당의 서상일이 제안한 내각제 개헌안은 민국당의원 70명, 무소속 9명, 계 79명의 동의를 얻었다. 과반이 되려면 아직 20여표는 더 얻어야 될 것이다. 그 상황에서 표결을 앞둔 1950년 2월초의 어느 날 나는 용산에 주둔한 수도사단을 방문했다.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정예다. 나는 일본군 출신이더라도 육사특별반, 또는 군산영어학교 과정을 거치게 한 후에 국군 지휘관으로 재임용했다. 그 것은 장교를 육성할 시간도 없는데다 좌익의 테러와 반란을 막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육사를 나와 대좌까지 승진했으니 친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종찬은 이제 신생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이종찬의 조부 이하영이 1904년에 외부대신으로 한일협약을 맺은 친일파 가계라도 그렇다. 
    친일파가 밉다고 신생 대한민국을 공산당에게 바칠 수는 없다. 이종찬은 내 뜻에 부응하고 있다.
    이종찬은 1916년생이니 당시 35세의 청년이다.

    갑자기 방문한터라 긴장한 채 서 있는 이종찬에게 내가 말했다.
    「여기 노영호 소련이 있지? 그 사람을 불러오게.」
    「예, 각하.」
    발뒤꿈치를 붙인 이종찬이 회의실을 나가더니 금방 소령 계급장을 붙인 군인과 함께 들어섰다. 소령의 얼굴을 본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아버지를 닮았구나.」

    그 순간 소령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가 곧 붉게 상기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종찬이 눈만 껌벅였고 내 뒤쪽에 서있던 국방장관 신성모, 헌병사령관 채병덕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회의실 안은 잠깐 정직에 덮여졌다. 지금 내 앞에 선 노영호는 내가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에서 일할 적에 일본총독부의 이구치 대좌 통역관이었던 노석준의 아들이다.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남한에만 계셨어도 그렇게 공개처형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니, 내가 증인이 되어서 네 아버지의 애국적인 행동을 증언하고 애국자로 표창을 받게 해드렸을 것이다.」

    그 때 노영호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종찬도 내막을 짐작했는지 숨을 죽이고 있다.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공산당 무리는 이제 네 조국과 네 아비의 원수다. 알겠느냐?」
    「예, 각하.」

    울음기를 없애려고 노영호가 쥐어 짜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년 말쯤 노영호가 경무대로 제 아버지 노석준과 자신의 사연을 적은 편지를 보냈을 때 나는 바빠서 만나지 못했지만 바로 국방부장관에서 조치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노석준의 아들 노영호는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위로 관동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그러다 아버지 노석준이 함흥에서 공개처형을 당하자 가족과 함께 월남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국군 소령이 되어서 내 앞에 서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계속 주시할테다. 노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