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대한민국 ⑬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에 전문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수천명에 불과했으며 소학교(초등학교) 교육이라도 받은 인구는 전체의 14%였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정부 기관은 물론 사회는 인력난에 허덕였다. 정부와 사회를 유지 시키던 일본 인력들이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배치시켜야 되겠으나 그러지 못했다. 일단 정부는 1949년 1월에 6년제 의무교육 계획을 수립한 후에 남녀 평등하게 의무교육을 실시했는데 교육개혁은 한국민의 치열한 교육열과 잘 맞았다.

    대한민국 정보 수립 후에 내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농지개혁, 교육개혁, 그리고 국방강화일 것이다.

    「신생국은 기반이 중요해. 이건 마치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을 크고 단단한 것으로 골라 놓는 것이나 같네.」
    어느 날 내가 경무대에 찾아온 이기붕과 안호상에게 말했다.

    그때는 프란체스카가 모처럼 과자와 수정과를 가져왔으므로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안호상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터라 독일말을 잘한다. 문교부장관이 되기 전에 경무대에 왔다가 우연히 프란체스카가 안호상이 독일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알고 둘이 독일어로 이야기를 했다.

    그 후로 안호상이 경무대에 오면 프란체스카가 과자부스러기를 들고 나타났다. 프란체스카는 기회를 봐서 모국어인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겠지만 독일어를 모르는 나는 언짢다.

    안호상은 좌익분자가 많았던 서울대 교수 중에서 반탁에 대한 주관이 뚜렸했고 교육개혁에 나와 뜻이 같았기 때문에 문교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프란체스카와 독일어 환담을 나눈 것이 안호상에게 해가 되었을망정 득은 아니다.

    내가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에게 말을 이었다.
    「6년동안 남녀 평등하게 의무교육을 시킴으로써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 평등, 신분 평등의 문화적, 사회적 토양이 굳어지게 되는 것이네.」

    이것은 내가 국회에서도 대국민 연설에서도 말했지만 역사상 처음인 의무교육이다.
    의무는 강제처럼 보이지만 권리를 주장할 신분 상승의 효과가 따르는 법이다.

    내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민주국가의 가치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렇다. 이상주의자는 저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주변도 오염시켰다. 만일 그가 지도자가 된다면 나라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 때 안호상이 말했다.
    「교과서의 내용과 교육 방법, 그리고 교사 양성이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여러번 여러 장소에서 이야기 한 터라 안호상의  말도 술술 이었졌다.
    「건국이념입니다. 국가에 대한 존엄성 고취가 교육의 첫 과정인 것입니다.」
    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안호상은 장수(長壽)장관이다. 그것이 프란체스카와 독일말로 회담하는 유일한 장관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그 때 방문이 열리더니 박마리아가 들어섰다. 박마리아는 또 프란체스카의 통역이자 친구, 또는 동생 역할까지 한다. 이기붕이 내 비서 출신이었으니 부부간이 마치 식구처럼 느껴진다.

    「사모님, 소스 맛 좀 봐 주시지요.」
    하고 박마리아가 영어로 말한 순간 내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적절한 때에 프란체스카를 데려가려고 온 것이다.

    프란체스카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을 때 내가 못이긴 척 영어로 말했다.
    「그래, 안박사가 떠나기 전에 이야기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