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 ⑫

    「아니, 난 본적이 없소.」
    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러자 노인이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했다.
    「난 그 양반이 만민공동회원들 모아놓고 종로에서 연설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소.」
    「어이구, 오래전 일이오.」

    내가 놀란 표정을 짓고 말했더니 노인이 담배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콧구멍에서 연기가 굴뚝처럼 품어 나오고 있다.

    「암, 50년도 더 전이지, 내가 열대여섯살 무렵이니까.」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딱  일흔이오, 내가 오래 산 편이지, 허지만 이 박사는 아마 일흔 다섯쯤 되었을 거요.」
    하더니 노인이 나를 보았다.
    일흔이라면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내 또래로 보인다. 나보다 고생을 더 한 것 같다.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자제분은 몇이나 되시오?」
    「하나 있었는데 일찍 죽었소.」
    「허어, 손주는?」
    「여럿이오.」

    답답해서 그렇게 말했더니 노인이 담배 연기를 뱉고 나서 말했다.
    「내 자식은 둘인데 전라도 정읍에서 농사를 짓고 있소.」
    「아, 그럼 노인장만 서울 올라 오셨구려.」
    「남의 땅 소작일로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워서 온가족이 다 서울로 올라왔다가 재작년에 자식 식구들만 먼저 고향으로 내려갔지요.」
    「아, 고향이 정읍이시구만.」
    「그렇소.」

    다시 연기를 내품은 노인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농지개혁이 되면 나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거요. 가서 고햐에서 죽어야지.」
    「개혁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소?」

    그러자 노인이 흐린 눈을 치켜떴다.
    「아, 지주 놈들이야 땅값을 많이 받으려고 할 것이고 농꾼들은 적게 낼려고 하지 않겠소?」
    「북한은 지주 땅을 그냥 다 빼앗아서 무상으로 분배 해주었다던데...」
    「모르는 소리 마시오.」

    쓴 웃음을 지은 노인이 다 탄 담뱃재를 소나무 둥치에 두드려 털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다 공산당 땅이라고 합디다. 공산당은 개인땅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오.」
    「허어.」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다 말해 주었소. 거긴 공산당이 되어야 살아간다고 합디다. 지주들은 다 맞아 죽었다는 거요.」
    「허어.」

    「지주가 다 나쁜 게 아니오. 내 고향 정읍의 김진사 양반은 땅 부자였지만 흉년때는 세도 안 받고 곡식을 나눠 주었소. 나중에는 일본 놈들이 정읍 농지 태반을 다 빼앗아 갔지만 말요.」

    「좀  땅값이 비싸더라도  빨리 토지를 정리 해야겠지요?」
    「아, 그러믄요.」
    「이 박사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같습니까?」

    낯이 간지러웠지만 외면한채 그렇게 물었더니 노인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면서 대답했다.
    「일제 시대에는 찍소리도 못하고 박혀있던 놈들이 해방이 되고나서는 이놈 저놈 다 튀어나와서 저마다 애국자라고 떠드는 세상이 되었소.」

    지게를 등에 맨 노인이 담뱃대를 허리춤에다 꽂으면서 말을 이었다.

    「해방되면 다 잘될 줄 알았더니 거 시끄럽고 더 불안하지 않소? 이박사가 얼른 수습을 했으면 좋겠소.」
    이것이 민심이다. 이 말 속에 다 포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