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⑨

    방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30대 중반쯤으로 중키에 양복 차림이다.
    지난번 해주의 포목상 박씨의 손주처럼 얼이 빠져 양탄자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지는 않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누가 밀기라도 하면 어디가 부러질 것만 같다.
    내가 지그시 사내를 보았지만 조부 양성남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다가선 사내가 허리를 절반이나 꺾더니 절을 했다.
    「양영태라고 합니다. 제 아버지는 양만호라고 조부 양성남의 둘째 아들이십니다.」
    「아, 그래?」
    자리를 권한 내가 앞쪽에 앉은 양영태를 물끄럼히 보았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입술도 꾹 닫쳐 있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다. 지난번 포목상 박생원의 손자는 무학(無學)으로 커가는 자식이 셋이나 달린 마흔네살의 가장이었다.
    해방이 되고나서 월남을 했지만 먹고 살길이 없어서 지게꾼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지게꾼으로 다섯 식구가 어떻게 살겠는가?
    그래서 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학교소사」가 되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목이 메인 내가 비서를 불러 서울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의 「일등 소사」를 시키라고 했더니 펑펑 우는 것이 아닌가? 소사가 어디 「일등소사」가 있는가? 다 소사지, 아마 지금 쯤 박생원의 손자 박기돌은 소사를 잘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하고 내가 물었더니 뒤쪽에 서있던 비서 윤호기가 수첩을 꺼내 적을 준비를 한다.
    그때 양영태가 말했다.
    「제 동생이 지난번 여순 반란사건때 잡혀 감옥에 있습니다.」
    거기까지 는 또박도박 말하더니 치켜뜬 눈에서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러더니 이제는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반란에 가담해서 20년 형을 받고 지금 용산의 군 형무소에 갇혀 있습니다.」
    「허어.」
    탄식한 내가 양영태를 똑바로 보았다.
    「네, 조부는 살아 계시냐?」
    「돌아가신지 13년 되었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양성남의 손자라면 내 손자 뻘이다. 내가 꾸짓듯이 묻자 양영태가 시선을 내렸다.
    「조선문학가 동맹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놀고 있습니다.」
    그말을 들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조선 문학가동맹은 좌익 문인들이 구성한 단체로 지금은 월북한 벽초 홍명희가 위원장이었다.

    머리를 든 내가 물었다.
    「너, 글을 쓰느냐?」
    「예,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 공산주의가 너희들 이상향이 될 것 같더냐?」
    그러자 양영태가 다시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일제에 투쟁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산당 조직에 가입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공산당 공부는 제대로 못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다가 공산당 분위기에 휩쓸려 전사(戰士)가 되고 선동가가 된다.

    양영태가 말을 이었다.
    「제 동생 영식이가 더욱 그렇습니다. 그놈이 국방 경비대에 들어간 것도 주위에서 홀렸기 때문입니다. 그놈은 머릿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영태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체제의 공산당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뛰쳐 나오지 못하고 동생놈만을 사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제발 제동생을 구해 주십시오. 각하.」
    이런 사연이 양영태 하나 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