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28)

     내가 첫 개각때 조봉암을 농림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그의 토지개혁에 대한 입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 되었다. 그리고 남한은 1948년 8월 15일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만방에 건국을 공표했지만 북한은 1946년에 정권을 수립한것이나 같았다.

    왜냐하면 1946년 2월에 북한은 김일성이 소위 인민민주주의 독재정권을 세운후에 3월에 토지분배까지 실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 정권이 강행한 정부 시책이다. 미·소 양국군 철수후 남북한 동시 총선이네, 단독정부 수립 반대네 하고 떠들어 대었지만 북한은 이미 1946년에 김일성의 독재정부를 수립하고 선포만 안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다.

    그리고는 남한에서 공산당이 테러와 암살, 폭동을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적화 노력을 했다. 북한의 이런 선전 선동 활동에 이용당한 인사도 있을것이고 다 알면서도 정권을 쥐려고 동조한 인사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4%의 지주가 전체 농토의 58%를 소유하고 있는데다 소작농이 75% 가깝게 되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했다.

    이 결과 지주들은 망했지만 소작농이 일시에 중농이 되어 그들이 모두 공산당원이 되었다.  중농이라지만 사실은 국유지 관리인이 된것이나 다름 없다. 또한 8월에는 모든 산업체를 국유화시켜 버렸는데 이것이 전체 산업의 90%를 넘었다. 따라서 국영기업이 75%가깝게 되었으며 개인기업은 20%대에 머물었다. 소련식 개혁이다.

    그러나 나는 조봉암과 함께 유상구입, 유상분배의 원칙으로 농지개혁을 할 작정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 해줘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농지개혁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주장에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민당측 반발이 심합니다.」
    하고 조봉암이 말했으므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민당은 지주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럴 때 북한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면 절대 다수인 소작농들이 환호할 것입니다.」

    그러면 정쟁(政爭)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리라.

    나와 시선이 마주친 조봉암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조봉암은 공산당 출신이다. 공산주의 교육을 깊게 받은 조봉암은 해방후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박헌영에게 공개 비판을 하고나서 우익으로 전향했다.

    내가 조봉암에게 농림장관을 맡긴 것은 공산주의 방식의 토지개혁도 참고 해보라는 의도였지 다른 생각은 없었다.

    경무대의 내 방안이다. 내가 앞쪽에 앉은 조봉암에게 말했다.
    「북한식의 급속한 개혁은 부작용이 클걸세. 그 체제에 반발한 월남민이 벌써 1백만이 넘었어. 민주주의 국가란 시간이 걸리더라도 협상, 절충 과정을 거쳐야 되네.  조 장관.」
    「알겠습니다.」

    서류를 챙긴 조봉암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결국은 각하께서 단안을 내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머리를 끄덕인 내가 물러가는 조봉암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었다.

    농지개혁 뿐만이 아니다. 반민특위법, 국가보안법에 미군철수 및 국방강화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국사(國事)가 첩첩산중이다.

    그런데 지금 국회는 내각제로 개헌하기 위하여 반(反)이승만 전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그 중심에 선 것이 한민당이다. 농지개혁, 반민특위법등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내각제 개헌이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조금전에 했던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