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당시 이란대사관 점거, CIA 숙청, 국방비 삭감 등으로 논란우리나라와는 주한미군 철수로 박정희 대통령과 갈등'평화중재자'라는 그의 행동 속에 '역지사지'나 이타적 배려는 없어
  •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방북했던 카터 前대통령에 대한 한-미의 비판여론이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카터 前대통령을 ‘김정일의 대변인’ ‘김정일의 아바타’라며 맹비난하고 있다. 카터 前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에 끼어드는 원인을 찾으려면 그의 말이 아닌, 그의 행동과 행적을 살펴야 한다.

    재임 중 성공한 정책 드문 카터 前대통령

    지미 카터 前대통령의 본명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 1924년 10월 1일 조지아州에서 태어났다. 조지아공대를 졸업한 뒤 해군에 입대,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1953년 전역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가업인 땅콩농장을 경영했다. 1963년 민주당 상원의원, 1970년 조지아州 주지사에 당선됐다. 1976년 11월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시 현직이던 제럴드 R. 포드를 이기고 1977년 제39대 美대통령이 됐다. 그는 주지사 시절부터 이른바 ‘진보적 정책’을 펼쳤다. 카터는 유색인종 차별이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에 흑인을 주요 공직에 등용했다. 여기까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등을 실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뒤에 행한 정책들은 지금까지 논란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 체결 압력, 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은 카터 측에서는 ‘성공’으로, 다른 사람들은 ‘실패’라고 부른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중재한답시고 끼어들었지만 레바논 내전을 막지 못했고,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을 맺은 뒤에도 소련은 꾸준히 장거리 잠수함발사 탄도탄과 신형 대륙간탄도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실패한 정책’도 있다. 바로 CIA 등 정보기관 인원 숙청과 군비 삭감, 그리고 해외 미군 감축 및 철수 계획이다.  

    자칭 ‘평화중재자’의 과거…국제안보 정책은 ‘젬병’

    카터 정권은 소련과의 ‘무력 대결’로는 냉전을 종식시킬 수 없다며, 소련과 대화를 시작하는 한편 CIA 등 정보기관의 해외활동을 대폭 축소시켰다. 카터 정권은 또한 ‘정정당당하고 투명한 정보기관’을 표방하며 해외에서 활동하던 비밀공작요원 수 천 명을 숙청했다. CIA의 비밀공작부대인 SOG도 폐지시켰다.

    카터 정권은 ‘소련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명분으로 군비와 병력을 감축하고 무기개발계획도 축소시켰다. 케네디 정부 이후 해외 각지에서 공산주의 반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던 특수부대들도 대폭 축소했다. 육군 특전단 ‘그린베레’는 전성기 시절의 5분의 1로 줄었다.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에 맞서기 위해 개발 중이던 B-1 폭격기 개발도 4대만 만든 채 잠정 중단시켰다. 카터의 이런 조치는 서방진영의 위기감만 고조시켰다.

    한편 카터 정권은 우리나라를 찾아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카터 정권의 조치에 반발하며 핵무기 개발계획을 세운다(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개발계획인 ‘백곰’ 프로젝트도 이 때 시작됐다).

    이에 카터 정권은 ‘주한미군은 뺄 것이지만 한국의 자주국방과 핵무기 개발은 안 된다’는 이상한 태도를 취했다. 주한미국이 빠질 때 약화되는 한반도 방위력 보강을 향한 박대통령의 정책에 제동을 건 것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카터를 무시한 채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다. 이 같은 한미 간 갈등은 이후 전두환 정권과 레이건 정권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말로 평화 이룰 수 있다’던 카터, ‘압도적 힘 필요하다’는 레이건에 패배 

    이렇게 ‘말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던 카터 정권은 그러나 1979년 큰 실패를 겪게 된다. 카터 정권은 이란 ‘팔레비 왕정’을 ‘위험한 중동 속의 안정된 섬’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CIA를 모두 숙청해버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였다. 카터 정권은 이란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부정했다. 결국 미국은 중동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를 가장 반미 세력에게 넘겨주는 실책을 저질렀다.

    카터 정권의 이런 인식은 1979년 11월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다. 당시 혁명에 가담한 이란인들이 이란 테헤란 주재 美대사관을 습격해 미국인 직원 50여 명을 인질로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정보기관과 특수부대를 숙청한 카터 정권은 이들을 구출할 능력이 없었다. 1980년 4월 24일 특수부대를 동원해 인질구출을 시도했지만 작전 도중 헬기가 추락, 수십 명의 특수부대원이 부상을 당하면서 인질구출에 결국 실패했다.

    카터 정권은 국내 정책에서도 실패를 거듭했다. 경제 상황도 최악이었다. 결국 1980년 11월 대선에서 ‘강력한 미국’을 내세운 공화당의 로널드 W.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란 딱지가 따라 붙었다.

    카터를 꺽은 레이건 정권은 군비 증액, 특수부대 증강, 무기개발계획 복구, 정보기관 강화 등 카터 정권이 ‘박아놓은 대못’을 뽑느라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1983년 11월 레바논 美해병대 기지가 자살테러를 당해 해병대원 수백 명이 숨지고, 이슬람 테러조직에 미국인들이 계속 납치당하는 등 한동안 수모는 계속됐다. 카터 정권이 망가뜨린 정보기관은 9.11 테러 때까지 제 기능을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평화 중재자'라면서 실재 이룩한 '평화'는

    이런 식으로 미국의 안보기능을 망가뜨린 카터 前대통령은 그러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애틀란타市에 재단법인  ‘카터센터’를 설립한 뒤 ‘평화 중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집권 당시 기억들 때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4년 개인자격으로 김일성을 만나 북핵 위기를 넘기는 데 공을 세우자 인기가 높아졌다. 이후 카터 前대통령은 세계 곳곳을 뛰어다니며 ‘평화 조정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에는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제대로 ‘평화’를 가져온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의문을 갖는다.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이면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지만, 실제 ‘평화’를 이룬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번 방북에서도 그는 북한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대변했을 뿐,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한 북한의 책임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도 않았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어찌 보면 간단하다.

    침례교인인 카터 前대통령은 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에 반대하고 대화로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진국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전파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런 카터 前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미국 안보전문가나 안보연구가들은 카터 前대통령의 현실인식,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그가 대통령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행적도 그렇다.

    이런 비판과 현실정치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카터 前대통령은 ‘대화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무력에 대한 혐오감도 여전하다(이런 고집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다른 면에서 닮았다).

    여기다 그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분쟁 지역의 ‘대화 조정자’로 활동하며 언론플레이를 하는 점까지 종합해 보면, 그는 ‘분쟁조정’이든 뭐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타인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인다.

    그의 이번 방북 또한 진정한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런 그의 행적이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