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23)

     애둘러 말하지 않겠다.
    그 한민당이 나를 밟고 나가려고 했다. 내가 국내 저항세력을 가장 높게 평가했듯이 모든 일에는 앞뒤가 있다. 한쪽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제를 주장한 반면 한민당은 내각제를 주장했다. 내가 대통령제를 주장한 이유는 혼란기의 국가를 정돈하자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74세, 나는 독서량도 많았고 많이 겪었다. 역사가 판단해 주겠지만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끄는 대통령제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내각책임제로 권력을 분산시켜 남북으로 분단된데다 테러와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정국을 어떻게 수습할것인가? 나는 한민당의 내각제 주장을 권력욕으로 보았다.

    나, 이승만의 독재를 견제한다는 핑계는 당치가 않다. 나는 정권을 쥐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을 내가 세웠다는 자부심이 내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내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은 언감생심 해본적이 없다.

    내가 물욕이 있는 인간인가? 교회에서 연설을 하고 몇십불씩 받아 살아왔던 나다. 나는 집념이 강하고 꺾이지 않을 뿐, 권력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나는 첫 조각을 하고나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인촌(仁村) 김성수에게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인촌, 당분간은 내게 맡겨주게, 나하고 한민당하고의 갈등이 드러나면 피차 이로울 것 없네.」
    「그건 잘 압니다.」
    김성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경무대로 옮겨온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조각을 할 때 김성수와도 여러번 상의를 했지만 한민당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재무장관 김도연 한명 뿐이다. 한민당측 에서는 각료 12명중 7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시 김성수가 말을 이었다.
    「이런때 고하(古下), 설산(雪山)이 간절하게 생각 나는군요.」
    나도 그렇다. 송진우와 장덕수가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수는 그 둘이 나를 설득하여 한민당 입장을 관철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김성수는 한민당의 지도자며 동아일보 사주이기도 하다.

    나는 물끄럼히 김성수를 보았다. 1948년이었으니 내 나이 74세, 김성수는 나보다 16년 년하니 58세가 되겠다.

    30년쯤 전에 김성수가 하와이에 있던 나를 찾아온적이 있다. 그때 김성수가 했던 말이 지쳐있던 나에게 희망과 활력을 일으켜 주었었다.

    「박사님같은 분이 조선을 이끌어 주셔야 하는데요.」
    했던가? 그때는 김성수가 경성방직을 세웠던 때인 것 같다. 그 다음해인 1920년에 동아일보를 창간했었지, 그때 머리를 든 김성수가 불쑥 말했다.
    「각하, 한민당이 각하의 뜻을 펼치실 곳입니다. 그리고 한민당만이 각하의 신념과 부합되는 정당입니다.」
    「알고있네.」

    나는 머리를 들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이곳까지 온 김성수를 보았다. 그렇다.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은 한민당을 친일세력이 섞인 정당으로 보았다. 임정요원과 송진우등의 말다툼이 그 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한민당을 싸안고 연합하며 때로는 옹호한 것을 정치적 거래로 받아들일수도 있겠다. 주고 받는 거래, 그렇다면 나는 한민당의 신의를 배신한 것일까? 내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인촌. 누가 계산을 한다면 나하고 한민당과의 거래에서 내가 엄청 손해를 보았다고 할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