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⑯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실시된 제헌국회의원의 선거인 등록율은 86%였고 투표율은 95.5% 였으니 국민의 엄청난 열기가 명명백백하게 표출된 셈이었다.

    남로당은 격렬한 선거 반대 투쟁을 벌였지만 국민의 참여를 막지 못했다.
    김구, 김규식이 선거 불참을 선언하고 지지 세력의 동조를 받았지만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

    투표율 95.5%는 남한 전체 유권자의 75%에 해당하는 수치인 것 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선거당일 44명을 살해했고 13,000여개의 투표소중 62개가 공격당했다.

    정부 수립과 법 질서 회복이 긴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으로도 증명된 셈이다.
    총의석 298석에서 북한 대표를 위해 할당된 100석을 뺀 198석의 제헌의원이 선출되었다.
    나도 동대문 중구에서 당선 되었는데 내가 주도한 독립총성국민회의가 54석, 한국민주당 29석, 대동청년단 12석, 민족청년당 6석, 대한노동연맹 2석, 그리고 나머지 95석이 무소속과 군소 정당이었다.

    나는 만족했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U·N선거관리위원단은 5월25일 선거의 합법성과 공정성을 인정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써 남한 총선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게된 셈이다.
    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어 내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부의장에는 신익회와 김동원이 임명 되었다.
    또한 나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을 임명 하였는데 대한민국 헌법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체제 정비작업은 공산당의 테러와중에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대한민국」국호가 정해진 것이 바로 이때다.

    임시정부 시절부터 사용했던 대한민국 국호가 정해지고 정부 체제가 갖춰감으로써 남한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김구. 김규식이 주장했더대로 미·소 양국군이 철수하고 남북한 총선거가 이루어질수 있겠는가?

    아마 그 와중에 남한은 남로당의 테러로 더욱 혼란스러워졌을 것이고 북한에 의해 침식 당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공산당으로 남북한이 통일 되었을때의 미래를 생각해보라.

    한반도가 한국가로 통일 되는 것은 한민족의 소망이긴하다.
    그런데 그 국가가 김일성 치하, 스탈린의 위성국인 공산당 국가라도 상관없다는것인가?
    이것도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962년이다.

    후대에 김일성의 북한과, 나 , 이승만의 남한이 어떤 과정으로 발전되어 갔는지 드러나지 않겠는가?

    1948년 6월초순, 내 나이 74세, 해방되고 나서 3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땅에서 쏟은 열정은 내 지난 50여년 동안 축적된 에너지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감히 말한다.
    「불굴」의 정신으로 지난 3년을 견디어 1948년 5월10일 남한 총선을 치루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탄생된 것이다.

    6월3일부터 헌법제정작업이 착수 되었는데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한 기초의원 30명이 법조계 전문위원 10인을 선임하여 작업했다.
    정부조직도 대통령 중심제로 하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임하도록 하는 내각제 요소가 포함되었다.

    국회는 단원제로 결정한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것은 1948년 7월 17일이며 7월 20일에 내가 국회의원 투표에 따라 절대다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부통령에는 임시정부 원로 이시영(李始榮)을 선출했으며 국회의장은 신익희, 국무총리에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 대법원장에 김병로를 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해방된지 만3년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한반도 반쪽만의 정부 수립이지만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 국가의 탄생이다.
    북한을 포함한 통일 대한민국은 헌법에만 명시했지만 언젠가 국토통일의 날도 오고야 말리라.


    그날, 동경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려고 날아온 맥아더가 나에게 말했다.
    「박사, 절반은 지켜 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