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분단 ⑮

    김규식도 김구가 떠난 며칠후에 뒤따라 월북을 했는데 민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가 주관적으로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북한 실상을 말해 주었기 때문에 남한 민중들은 알건 다 알았다.

    이젠 조선조말 시대가 아니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 전화 시대다.
    정보가 순식간에 전파되어서 옛날처럼 유언비어를 꾸며냈다간 역풍을 맞는다.

    그들이 방북한 첫 번째 이유는 곧 닥쳐올 남한 단독 선거 방해다.
    그리고나서 남북한의 총선을 하자는 것이었지만 이제 민중을 바보가 아니다.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것도, 나 이승만이 남한 지도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러는지를 다 아는 것이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나는 내 색깔을 분명히 했다.
    남한은 좌우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불분명했다.
    좌우합작위원회를 처음에 군정당국이 남한 주류(主流)로 세워준 때문에 김규식등 온건 좌파가 한때 세를 얻었으나 김구와 나는 다르다. 색깔이 분명하다.
    김구는 임정 주석을 지낼때까지 좌익과 공론해왔지만 공산당에 휩쓸릴 사람이 아니다.

    미국도, 소련 공산당의 압력도 배재한 독자국(獨自國)의 수립이 목표였다.
    훌륭한 이상이다.
    그렇지만 미군정치하에서 임시정부 정통성을 주장하며 두 번이나 군정과 정면 충돌을 하고 세력을 잃었다.

    군정의 압력으로 세가 깍인 것이 아니다.
    현실과 맞지않는 무력한 행동, 세계 정세와 미·소 역학관계를 무시한 정책이 민중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남한은 미군정 치하에 놓여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말하지만 미군은 수십만 인명을 희생하고, 일본을 패망시켜 한반도를 식민지에서 해방시켜준 은인이다.
    또한 그 미군이 38선 이남에 주둔하지 않았다면 남한도 이미 소련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 현실을 무시하고 미군을 점령군으로만 취급한 저항적 태도는 옳지않다.
    내가 35년동안 외교 독립을 외쳤지만 해방후부터 건국까지의 3년 동안이 한반도에 가장 외교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때 내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행운이며 신께도 감사 드린다.
    나는 민군정 당국은 물론 미국부부 정책 담당자들로부터도 수많은 압력, 무시, 암살 시도까지 당했지만  워싱턴 정가(政街)나 언론, 또는 지인(知人)을 적절히 이용하여 남한의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 민주독립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목표로 맹진했다.
    나는 타협하지 않았다.
    공상당이 잘 타협한다. 그리고 금방 배신한다.
    1948년 5월 남한정부를 세우면 일단 안정을 시킨후에 북한과 통일 협상을 하리라.

    그것이 내 계획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에서 돌아와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5월 6일 선거 닷새전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국군 철수후의 남북한 총선입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이철상이 김구, 김규식의 방북 성과에 대한 성명을 듣고와서 말했다.

    「북한은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언제라도 총선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돈암장의 응접실에는 장기영과 임영신, 장택상등 여럿이 모여 앉아있었는데 모두 입을 열지 않는다.

    예상했던 말이었고 때문에 표정도 담담하다.
    그 때 내가 말했다.
    「이제 선거가 끝나면 당분간은 뭉쳐서 정부 수립을 해야만 되네.」
    그, 뭉치라는 말은 40여년전 조선말 개화운동을 할적에도 썼다.
    그것이 내 입 버릇이 되었다.

    다시 내가 말을 잇는다.
    「일단은 덮어놓고 뭉쳐서 일해야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