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⑩

    나는 상해 임정 때부터 공산당을 겪었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공산당은 임정의 주(主) 지원세력이기도 해서 임정 내부에도 공산당 간부가 많았는데 고립무원이었던 당시에는 그들이 든든한 배경이었다.

    임정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대통령인 나를 견제하려고 임정 분산안을 꺼냈지만 그것도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한 갈등이라고 다 이해했고 다 넘어갔다.

    그러나 내가 공산당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한 것은 정확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다.
    미국에 있었던 나는 소련의 팽창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내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일본의 진주만 침공 4개월 전에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에는 펄 벅 여사 같은 문인으로부터 「소름 끼친다」고 할 정도로 찬사를 받았지만, 정계나 군, 일반대중들은 나를 「미친 한국인」이라고 조소했다.
    그러나 4개월후에 진주만 침공이 일어나자 내 책이 베스트셀러기 되긴 했다.

    나는 내 예지력을 말하려고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러시아를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절부터 겪어 온 나, 이승만이다.
    그들의 국가성향, 그리고 대한국관(對韓國觀)은 러시아 제국이 소련연방이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을 경계, 견제해야 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 정계, 사회에 대고 외친 것이다.

    그런 나를 루즈벨트와 그의 정권은 또 미친 놈 취급을 했다.
    내가 1945년 10월에 한국 땅을 밟은 후에 온갖 압력, 박해, 연금, 암살 미수까지 당하게 된 것도 미국의 잘못 된 정책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혼미했던 루즈벨트는 대일본 전쟁에 소련군을 끌어 들이려는 욕심으로 대소 유화정책을 펴 놓은 채 사망했다.
    그러나 뒤늦게야 처칠이 소련의 「철의 장막」을 비난하면서 트루만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그때서야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 되었다.
    1947년 3월이다. 그러니 2년 가깝게 한반도는 혼란에 싸여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목전에 닥쳐오고 있다.

    남북한 총선 문제다.
    1947년 9월17일 마샬이 상정한 한반도 총선안은 11월14일 유엔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43:0이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이제 1948년 3월31일까지 선거감독위원회가 설치 되면 즉시 남북한의 총선이 실시될 것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독립정부가 수립되면 1948년 7월1·일까지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군이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장덕수가 나를 찾아 왔을 때는 1947년 11월 하순쯤 되었다.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총선입니다.」
    장덕수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하면서 돈암장 응접실에 앉는다.

    사실 이 돈암장도 장덕수가 구해 준 집이다.
    1895년생인 장덕수는 나보다 20년 연하이니 당시에 53세가 되었다.
    장덕수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활동했는데 1920년에 동아일보 초대 주필을 지냈다. 1923년에는 나와 함께 미국에서 3·1신보를 발행한 인연도 있으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 부사장까지 지낸 김성수의 측근이다.
    지금 장덕수는 송진우등과 한민당을 창당하여 정치부장을 맡고 있다.

    장덕수가 말했다.
    「박사님, 이기셔야 합니다. 공산당과 방해세력들을 누르고 결국 남북한 총선까지 눈앞에 다가 왔으니 기운을 내십시오.」

    「내가 이기자는 게 아냐, 이 사람아.」
    나도 밝은 장덕수의 표정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용케도 공산당에게 넘어가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장덕수에게 덕담을 했다.
    「장박사, 자네는 나보다 20년 덜 살았으니 대한민국을 20년 더 지키고 살게. 나는 자네의 그것이 부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