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가 즐거운 남자

심양섭 객원논설위원 | 최종편집 2011.04.07 14:26:01

설거지가 즐거운 남자

심양섭

밥을 먹고 나면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는 내가 해야 할 나의 일(my business)이다. 때로 아내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나는 웬만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식후에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대개 컴퓨터 앞으로 가는데 그러면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 설거지는 식후에 하는 산책만큼이나 필요하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설거지를 가사분담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아내는 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식후에 설거지를 하는 것이 된다. 역으로 내가 밥을 했다면 식후 설거지는 아내 몫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요리를 했을 때라도 설거지를 내가 한다. 내가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아내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설거지가 즐거운 남자’다. 인터넷을 여행하다가 설거지나 요리를 즐기는 남자를 만나면 반갑다. ‘친구’를 찾은 느낌이다. 최근에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찰깨빵과 피자를 만들어주고 설거지까지 했다는 남자를 인터넷에서 만났다. 그는 요리와 설거지 과정을 일일이 사진으로 촬영하여 올려놓고 글까지 써놨는데 퍽 재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그 설거지가 참 즐겁다. 설거지할 그릇이 수북이 쌓인 것을 보면 오히려 기쁘기까지 하다. 세상살이에 지친 나의 손길을 애무하는 듯 주르륵 흐르는 물의 포근한 리듬을 타고 몸과 그릇이 하나 되어 열심히 손을 놀리다 보면 상쾌하다 못해 순결해지는 마음……. 나는 접시의 겉을 닦지만 설거지는 내 영혼 깊숙한 곳을 말갛게 씻어 준다.”

설거지가 쉬운 일은 아니다. 요리를 잘하면 칭찬을 듣지만 설거지는 좀체 빛이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쉴 때 나 홀로 외롭게 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요즘은 가족이 단출하여 설거지 양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수고롭기는 매한가지다. 한국 음식은 그릇에 달라붙는 게 많아 설거지할 때 유난히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세제를 풀어놓은 통에 접시를 담갔다 꺼내서는 바로 마른 수건으로 닦고 만다.

설거지를 자동으로 해주는 식기세척기가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가 식기에 달라붙은 찌꺼기를 애벌로 헹군 다음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다. 내 아파트 부엌에도 식기세척기가 처음부터 설치됐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서양 사람들은 식기로 주로 접시를 쓰기 때문에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기가 좋다. 식구가 적은 가정에서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려면, 설거지 거리를 쌓아두었다가 사나흘에 한 번씩 가동하면 되는데 이것도 한국문화에는 익숙하지 않다.

식구가 많거나 손님이 들이닥칠 때면 설거지 시간이 길어지고 힘도 든다. 장시간 서서 그릇을 닦다 보면 허리도 아프다. 여성들이 이른바 명절후유증, 제사후유증을 앓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제사를 남이 지내주는 제사대행업이 유행인 것을 보면, 명절 가족모임도 조만간 뷔페나 호텔에서 열리지 않을까 싶다. 제사는 한, 중, 일 아시아 3국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만 있는 풍습이라고 한다.

명절이 여성에게 반갑지 않은 것은, 나 같이 평소에는 요리나 설거지를 잘하던 남자도 명절에는 손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형이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가면 나도 따라가겠는데 그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내 경우에는 그나마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집안 여성들의 고생이 덜한 편이다. 제사를 지내게 되면 상을 두 번 차리고, 두 번 치워야 한다.

명절 음식 장만과 설거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서 본 어느 남자는 벌써 5년째 명절과 제사 때마다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매우 어색하고 다른 남정네들의 눈총도 받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다만, 일 년 두 차례 명절에 친가와 처가를 오가고, 한 해에 수차례나 되는 제사 때마다 ‘노력봉사’를 하다 보니 이젠 지쳐버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명절이나 제사라면 넌더리를 내는 ‘남성주부’(男性主夫)가 되고 만 것이다.

설거지나 요리를 직접 해 보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다. 명절후유증과 제사후유증이 고부갈등과 부부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서로의 느낌과 생각에 마치 심연(深淵)과도 같은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으로 “고생했다”고 위로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집안행사 때마다 으레 여성들만 고생하는 것은 미풍양속이 아니다.

맞벌이부부가 점점 많아지지만 그 결과는 맞벌이여성의 이중고로 곧잘 나타난다. 남자의 일이 더 중요하고 힘든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많은 남자들은 퇴근 후 회식과 술자리로 바쁘다. 많은 맞벌이여성들이 밤늦게 퇴근해서 집안정리, 방청소, 설거지까지 하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자녀의 도시락을 싼다. 그야말로 슈퍼우먼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다. 내가 아는 어느 정신과 의사는 밤늦게 퇴근 후 빨래를 개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한다.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이지만 자녀양육으로 바쁘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맞벌이여성의 1인2역 또는 1인3역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설거지나 요리를 못하면 아이들이라도 좀 하면 어떨까. 한국에서는 그것도 어렵다. 아이들에게는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절대 안 시킨다는 불문율이 많은 가정을 지배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맞벌이하는 부모를 위해 설거지도 하고 요리도 한다는 어느 여대생의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 들어가고도 가사에 동참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습관이 안 돼 있다. 공부는 설거지를 비롯한 가사를 회피할 가장 좋은 피난처이다. 어릴 때부터 설거지놀이 장난감을 갖고 놀아 설거지에 친숙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역시 여자아이들이다.

설거지는 지금까지 허드렛일의 대명사였으나 이제 한국사회의 큰 쟁점이 되었다. 이 문제를 잘못 다루면 자칫 부부갈등, 남녀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가정과 가문이 파탄난다. 설거지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이 숙제가 어렵다면 명절과 제사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가부장적이기로 유명한 한국사회에서 점점 설거지를 즐기고 요리를 즐기는 남자들이 늘어나니 다행이다. 어떤 면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고 요리를 더 맛있게 한다. 남성이 일찍 귀가하여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면, 한국남성의 밤 문화가 바뀐다. 그러면 남성 자신의 영혼과 정서에 좋을 뿐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좋다. 나는 오늘도 즐겁게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가 즐거운 남자’가 많아지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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