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로 美化한 교과서 
     
      교과서는, '봉기'라고 사태의 성격을 둔갑시킨 다음 공산당이 주동한 폭동이란 사실, 경찰관과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을 생략, 은폐하였다. 
    趙甲濟   
     
     한국은 단일 민족이 오래 동안 모듬살이 한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 많이 있었던 종교 분쟁, 종족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 同族끼리의 대규모 학살은 2000년간 한번도 없었다. 1946년 10월1일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공산 폭동은 한국인이 계급적 증오심을 품고서 다른 한국인을 학살한 최초의 사건이다. 공산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同族끼리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주동자들은 민족반역의 反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천재교육에서 올해 새로 발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4 페이지는 '남과 북의 체제 정비'란 소제목하에서 이렇게 썼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10월 폭동'으로 통용되던 단어를 '10월 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바꿨다. '폭동'을 '봉기' '저항'으로 바꾸면서 폭동 주동자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반역적 惡行을 덮는 정도가 아니라 美化하였다. '봉기'와 '저항'이란 낱말을 결합시키면 민중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용감하게 들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교과서는, 사실을 왜곡, 동족학살 행위를 '저항운동'으로 성격 규정한 뒤, 이런 결론을 위하여, 공산당이 주동한 폭동이란 사실, 공산당이 경찰관과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을 생략, 은폐하였다. 이 교과서 필자는 동맹국인 미국을 비방하고, 主敵인 공산당을 비호할 목적으로 이런 왜곡된 記述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를 교과서로 채택,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한 이 정부이다.
     
      *사실은 이렇다
     
      공산당의 선동에 속아넘어가 10월 폭동(대구폭동)에 가담하였던 학생의 증언을 소개한다.
      김계철(金桂澈)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월북,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44년 만에 귀향한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특별하게 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金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金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잠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日給制 반대’ ‘박헌영 선생체포령을 취하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흰 까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데 이용한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극렬세력은 同族을 상대로 한 살육의 祭典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 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加虐(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해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 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사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 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 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50년’)”
      이날 10월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全身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1946년 10월 13일자>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가 주동한 구미폭동은 위에 묘사된 살육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대구시보〉정치용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선산군 민전(民戰)(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조직) 사무국장이자 선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구미에 있는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여 배철상 서장에게 全機能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金聖東(前 통일원 비상계획국장)소년은 경찰서 옆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구경삼아 거리로 나왔다. 폭도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을 둘러메고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종술 경사가 경찰서 뒤편 철조망을 넘다가 곡괭이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日帝 때 기마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민전간부 김정수가 무기고를 열고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좌익폭도가 처음으로 쳐들어간 곳은 대성당 약방주인 송대헌의 집이었다. 폭도들은 송씨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더니 기름통을 가져와 2층 건물 현관에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려는 찰라“야 이놈들아”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송대헌의 아들 송재욱은 구미초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이 사건을 목격했다)/ 박상희였다.
      “누가 이 집에 불 지르라카더노. 어느 놈이 시켰노. 앞으로 투쟁과업을 계속하다가 보면 부상자들도 나올낀데 약방을 태우면 느그들은 어데 가서 약 바를 거야.”

      청년들은 호랑이 같은 박상희의 호통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약방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송재욱 선생은 학교에서 노래 가르치지 느그들한테 욕 가르치나. 이 할아부지(宋秉根 목사)는 독립 운동했는데 느그들한테 뭐 잘못한 거 있노. 그런데 왜 불 질러. 집에 안 가나.”
      박상희는 청년들이 흩어지자 멍하니 서 있는 송재욱을 향해서 야단을 첬다. “조사부 차장은 여기서 뭘 하노, 신분도 안 밝히고.”
      송재욱은 광복 직후 박상희의 지도하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의 조사부 차장이었다.
     
      박헌영 세력이 조종한 10월 폭동을 봉기라고 미화하고 사태의 책임을 美軍政에 轉嫁(전가)한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꼭 기억해야 할 공산주의자들의 민족반역적, 反인륜적 행위를 모르게 된다. 오히려 공산당이나 농민들이 의로운 저항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교과서를 채택, 학생들을 가르치는 李明博 정부는 '이념은 낡은 것'이라 외치고, '중도실용'을 자처한다. 한국인이 가져야 할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이는 진실, 正義, 자유를 3대 가치로 한다.
    이런 이념을 버린 집단은 별 고민 없이 진실을 팔아넘긴다. '중도실용 집단'은, 학생들에게 미국을 싫어 하고 敵을 좋아하도록 가르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일제히 채택, 열심히 反국가적 교육을 시키고 나라를 亡國의 길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