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②

    내가 다시 귀국한 날은 1947년 4월21일이다.
    1946년 12월4일에 진주군 사령관 하지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출발했다가 또한 미국무부와 하지의 갖은 공작을 뚫고 중국의 장개석 전용기를 얻어 타고 귀국했다.

    이런 나를 공산당 무리들은 친미주의자, 미국의 주구(走狗)라고 선전한다.

    하긴 미군이 소련군처럼 점령군 행세를 했다면 나는 진작 총살을 당했을 것이다.

    소련과는 달리 하지는 한국땅에 진주하면서 전혀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인들이 군의 사병처럼 시키는대로 따를 줄만 알고 있었던것 같다.
    루즈벨트가 소련의 스탈린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다.

    2차대전이 종반전에 들어가면서 루즈벨트는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 1백만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한반도와 사할린에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의 지상군 투입이 절실했다. 그래서 대소 유화정책이 이어졌으며 한반도의 소련군 진주가 용이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련군이 진주한 1945년 8월9일부터 한반도는 이미 분단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나는 그 분단이 한반도 전체의 적화(赤化), 즉 공산화의 순서로 이어지게 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1947년 4월말 당시, 북한은 이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세우고 토지개혁, 국유화등으로 일당독재 체제를 굳혔다. 1947년2월에는 최고행정기관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그래놓고 「북노당」이 남한의 「남노당」을 독려하여 남한의 공산화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이다.
    그것을 하지는 피부로 느끼고 있겠는가?
    그 상황에서 5월21일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된 것을 보면 미군정 당국과 미국무부의 무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와중에도 공산당의 폭동과 테러가 계속되는 상황이니 남한의 운명도 풍전등화다.

    또한 내가 미국에서 반소, 반탁 로비를 하는 동안 김구는 한국국민대표자 회의를 수집하고 대한민국 임정을 승인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임정의 대표자가 되어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고 반탁의 기세로 몰고 갈 계획이었다. 그것은 임시정부 주석으로 투쟁해 온 김구가 당연히 밟아야할 순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에서 모인 1500여명의 대표자들은 김구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의장직을 사임해버린 김구 대신으로 미국에 있던 나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내가 적진으로 들어가 금방 눈에 띄지않는 로비활동을 하는 동안에 김구는 마치 쿠데타처럼 대의원 소집과 의장취임, 주권요청과 사임등 일련의 파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우파간 분열이나 투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국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되었지만 그런 감투야 어디 하나 둘인가?
    이 사건으로 김구는 다시 미군정청으로부터 견제를 받는다. 1945년말, 임정으로 주권을 이양하라는 시위를 벌인 후로 두 번 째였다.

    돈암장으로 돌아온 나에게 인사차 찾아 온 수도청장 장택상이 말했다.
    「박사님, 김 주석 심기가 불편하십니다.」
    내가 잠자코 있었더니 배석했던 조병옥이 거들었다.
    「하지가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불쑥 말했다.
    「이미 북한은 김일성의 공산당 독재국가가 되었어.」
    내 목소리가 컸기 때문인지 방안이 조용해졌다. 숨을 고른 내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이젠 남한도 하나로 뭉쳐 정부를 세워야 하네. 그러지 못하면 남북한은 소련 앞잡이 김일성의 왕국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