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24)

     「뭉쳐도 통일이 될까 말까 한 판국에.」
    피를 토하는 것처럼 임영신이 말을 뱉았지만 방 안에는 곧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조선독립당이란 처음 듣는 단체였지만 하루에도 서너개씩 당이 만들어졌다가 없어지는 상황이라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공산당 단체일 수도 있고 중도파, 또는 우파일 수도 있다.

    그때 임병직이 말했다.
    「국무부가 좋은 핑계거리를 잡았습니다.」
    다시 모두 입을 다문다.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겪었지만 내 가슴도 미어졌다.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그렇다. 제네바에 갔을 때 하와이의 반대파들은 중국 대표는 물론 국제연맹 총장한테까지 이승만은 조선 대표가 아니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 편지를 받은 국무부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으리라. 미 국무부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 중 가장 불편한 인간이 바로 나, 이승만일 것이다.

    신탁통치 추진안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한의 좌우합작위원회 구성에도 회의적이며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난, 선동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의 유대관계를 깨뜨리고 있다.

    그리고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내가 미국 의회와 언론계의 인연을 이용하여 국무부 정책에 조직적으로 반발을 한다는 것일 게다. 군 원로인 맥아더를 이용하여 한국을 빠져나온 것도 국무부의 울화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윽고 머리를 든 내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나를 친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그러자 임영신이 바로 대답했다.
    「공산당 동조자나 사리사욕에 빠진 역적, 매국노 일당들일 것입니다.」

    이제는 임병직이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한다.
    「지금 한국에서 박사님처럼 미 국무부, 진주군 사령부 또는 의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박사님이 안계셨다면 누가 이 난국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남한은 미국무부의 계획대로 임정도 철저히 무시된 채 좌우합작정부가 성립되어 공산당 박헌영이 주도권을 잡고 북한과 합방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처럼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렇다. 때로는 나 스스로도 내 자만심을 의식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70이 넘은 지금까지 무국적자로 해외를 떠돌며 독립을 기다린 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 자만심이 나를 버티게 한 것이다.

    머리를 돌린 내가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워싱턴의 저녁 하늘이 펼쳐져 있다.

    나 외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김구? 김규식?
    다시 자만심이 일어났고 늙은 몸에 활력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해 봅시다.」
    탁자 위에 놓았던 건의서를 다시 집어든 내가 말을 이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났을 때보다는 지금 형편이 나아. 김윤정 같은 반역자도 없고 말이네.」

    「일본 대신에 소련이 한반도를 집어 삼키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임병직이 말을 받았지만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는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미국이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요.」

    이것이 약소국의 운명이다. 스스로 쟁취하지 못하면 이런 수모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내 말이 맞다는 것이 곧 증명될 것이네.」

    모두 말이 없다. 그때도 내 자만심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으리라. 미국무부의 어설픈 정책가 놈들 보다 내가 낫다는 자만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