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22)

    출국 허가증이 나왔다고 합니다.」
    군정당국에 다녀온 박기현이 조급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이철상이 저격당한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이다. 생명은 겨우 건졌지만 이철상은 두달은 더 병원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박기현이 말을 이었다.
    「맥아더 원수가 직접 하지한테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지가 출국 허가증에 사인을 했는데 중간에서 놈들이 통보를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미군 고문단 소속으로 중국국민군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박기현은 하지 사령부 안에도 정보원이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지?」
    내가 묻자 박기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알고 있어도 모른척 해야겠지요.」
    암살 사건이 빈번한데다 흉흉한 세상이어서 총에 맞은 이철상이 병원에 실려 갔어도 언론 보도는커녕 이야기꺼리도 되지 않는다.

    그때 응접실로 경비원 안윤택이 들어섰다.
    「박사님, 스튜어트 대령이 왔습니다만.」
    안윤택이 말하자 박기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출국 허가증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들어온 스튜어트가 인사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사령관께서 약속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시선만 주었더니 스튜어트가 말을 잇는다.
    「첫째, 미국무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마실 것. 둘째, 미·소간 우호 관계를 깨뜨리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마실 것. 이 두가지만 지켜주시면 출국 허가증을 발급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내가 끝쪽에 앉은 박기현을 보았더니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외교는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를 갖춰놓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 하지 않는다.

    내가 박기현으로부터 먼저 허가증에 대한 정보를 받지 않았다면 스튜어트의 말에 길길이 뛰면서 실수를 했을지 모르겠다.

    내가 스튜어트에게 말했다.
    「미국과의 친선관계에 해를 끼치는 행동은 하지 않을거요. 그리고,」
    내가 스튜어트를 똑바로 보았다.
    「가는 길에 맥아더 원수를 만나 이런 약속을 해야만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 드리겠소. 맥아더 원수가 내 허가증 발급에 관심을 갖고 계실 테니까 말이오.」

    스튜어트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맥아더의 지시로 허가증이 이미 발급한 상황인데 하지가 건방지게 조건을 붙여서 제가 발급한 것처럼 행세한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군인은 단순하다. 서둘러 일어선 스튜어트가 방을 나갔을 때 내가 박기현에게 말했다.

    「내가 미국에 가면 미국무부의 공산당 첩자들이 바짝 긴장하게 될 것이야.」
    「떠나시기 전까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박기현이 굳어진 얼굴로 말을 잇는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박사님.」

    그렇다. 이제는 나도 미국무부와 미군정당국의 나에 대한 적개심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미개한 일본 식민지로만 여기고 진주한 제24군단장 하지와 그 참모들, 그리고 병든 루즈벨트가 작성한 미·소 협력 관계를 내세우는 국무부의 소련 첩자들.
    그들에게 한반도는 귀찮은 땅덩어리일 뿐이다.

    길게 숨을 뱉은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도대체 이 위급한 상황을 다들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